[장정일의 플라톤 추방] 다시「서울로 가는 전봉준」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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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도현의 첫 시집 『서울로 가는 전봉준』은 ‘가다’ 동사를 주축으로 삼은 운동으로 가득한데, 그 운동은 장소 아닌 유토피아적 시간을 향한다. 시인이 북한의 어느 젊은 시인에게 말을 거는 형식으로 쓰여진「젊은 북한 시인에게 1」에서 저 동사가 가닿은 곳은 “우리가 하나”되어 세워야 할 “찬란한 공화국”, 즉 미래의 ‘통일 조국’이다. 흥미롭게도 시인의 통일 조국은 한반도와 그 부속 도서에 그치지 않고 만주까지 아우른다. 이 때문에 시인의 ‘가다’ 동사는 고구려 유민들이 세웠다는 발해로 거슬러 올라가기도 한다. 서정시는 타임머신이다.

서정시는 기억의 형식이며, 서정시의 매력은 그것이 잃어버린 우리의 과거를 되찾아주는 마법에 있다. 서정시가 아니라면 “어느 누가 추억 속에 숨어 있는 우리 고향을 만나”(「귀(歸)」)게 해주랴. 더욱이 ‘민중적 서정시’는 개인적 기억에만 함몰되지 않고 민족의 집단적 기억까지 담당하려고 한다. 안도현의 시에 통일신라ㆍ백제ㆍ고구려ㆍ조선은 물론, 만주나 발해가 자주 나오는 이유이다. 그런데 저 과거들이 지금의 남한과 북한을 하나로 묶어줄 수 있을까. ‘나는 너고, 너는 나’라는 자기 동일성에 충실한 서정시에서는 저 과제가 선험적으로 완수되어 있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서울로 가는 전봉준』첫 머리에 실려 있는「눈 오는 날」이나「밥 2」등의 시들은 모두 아버지에 대한 지극한 존중과 존경에서 나왔다. 독자들은 별 수고하지 않더라도 “아, 바로 아버지가 하늘이었지요”(「빈 논」), “나는 아버지가 모랫벌에 찍어놓은/ 발자국이었다”(「낙동강」)와 같은 구절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아버지 계시지 않는 땅에 어머니/ 혼자 어떻게 농사 지으시겠어요”(「오랑캐꽃 피기 사흘 전에」) 같은 구절로 보아, 시인의 가부장 의식은 농경 시대의 산물이다. 농경 시대에 남자는 여자가 하지 못하는 열일을 했었기에 말이다. 이 논의는 더 나아가야 한다. 시인도 나서서 “간다 우리가 저렇게 유유히/ 조선 사내로 불알 흔들며 갈 때”(「가자」)라고 응원하고 있으니.

「서울로 가는 전봉준」네 번째 연 첫 두 행은 “우리 성상(聖上) 계옵신 곳 가까이 가서/ 녹두알 같은 눈물 흘리며 한 목숨 타오르겠네”이다. 전봉준이 메이지 유신을 학습한 흔적은 찾아볼 수 없지만, 그가 일으킨 농학동민혁명은 고종과 조선 왕실을 살리기 위한 근왕 쿠데타의 성격도 짙다. 그런 점에서 저 두 구절은 역사적 사실과 어긋나지는 않는다. 하지만 저 두 구절이 관군에 체포되어 국문을 당하러 가는 전봉준을 임금이 내려준 사약을 받고 충절가나 읊어대는 성리학 이념의 신봉자로 희화화해버린 것도 분명하다. 이것은 시인이 세심하지 못해서가 아니다. 시인을 지배하고 있는 것은 종법(宗法) 질서다.

종법의 핵심은 제사이며, 제사에 의해 정통(正統)이 유지된다. 조선 시대에는 이씨(李氏)왕가가 곧 종법이었으나, 조선이 망하고 나서는 ‘민족’이 종법이다. 시인의 두 번째 시집『모닥불』(창작과비평사, 1989) 가장 맨 앞에 실려 있는「청진 여자」의 화자는 남쪽에 아내가 번듯이 있는데도 북쪽 여자와 하룻밤을 보내고 아이를 낳고 싶다는 소망을 말한다. 어느 평론가는 이 시를 “시대착오적이고 남성중심적”이라고 말했지만, 새로운 종법주의자는 괘의하지 않는다. 민족은 하나! 그는 ‘나는 너고, 너는 나’라는 순정에 투신한다.

두 편의「젊은 북한 시인에게」연작에서 안도현은 북한에 시인이 있다고 말한다. 나는 아직도 시인이 뭔지 모른다. 그러나 구 소련과 같은 공산주의 국가, 그리고 박정희 때와 같은 권위주의 국가에서 시인은 규정되지 않고, 그저 드러난다. 지하출판을 하는 사람, 구금되거나 발언을 감시 받는 사람, 국제 사회의 구명이 필요한 사람, 추방당하거나 살해당한 사람. 월북 시인 임화는 처형당했고, 백석은 시를 쓰지 못했다. 「서울로 가는 전봉준」은 1980년대 대학생 문예가 빚은 절정이라고 할 수 있으나, 이 시를 쓴 시인은 전문 시인이 돼서도 그 시대의 ‘대학생 문예’가 가진 공상적이고 낭만적인 한계를 벗지 못했다. 자기 동일성에 사로잡힌 시는 운동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