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3/054] 난무하는 ‘정치’ 속 변방으로 밀려나는 ‘민’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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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라디오를 듣다가 문득 가슴이 막힌 듯 답답했다. 청취하는 3개 프로그램 모두 비슷한 사람들이 번갈아 나와 비슷한 말을 하는듯 했다. 대통령과 유력 정치인의 일거수 일투족에 대한 세밀한 추측과 해석, 전망이 넘쳐난다. 한때 이렇게 세세한 정보를 주어담다 보면 세상 돌아가는 걸 더 종합적인 안목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하기도 했다.

정치판은 언뜻 역동적으로 보이는 듯 하다. 하지만 꾸준히 접하다 보니 아무래도 판을 진행할 생각 없이 샅바싸움만 요란하다는 느낌이 들게 됐다. 윤한 갈등, 총선 백서, 국회의장 후보 선거와 이어지는 당원권 확대 논의, 대통령과 전 대통령 관련 수사와 특검···이것들이 중요하지 않다는 말이 아니다. 답답한 것은 이슈들 사이의 현격한 밀도 차이다.

스포트라이트 바깥의 모습은 안쪽과 사뭇 다르다. 주변에서 마주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기자 생활을 시작한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유구하게 고인 듯 변하지 않는다. 얼마 전 피고인석에서 움츠리고 앉은 한 노인이 흐느끼는 모습을 봤다. 장애인 아들을 전적으로 간호하는 독박 간병을 40년간 이어오다 결국에 파국적 결말을 맞이한 사람이다. 그는 “반성하고 참회합니다”며 울부짖었다.

이번 달에는 충북 청주에서 장애인 일가족 3명이 숨진 채 발견됐다. 장애인 가족이 피부양자를 살해하고 자살한 사건이다. 국가의 적절한 보호를 받지 못한 탓에 사망한 장애인 사례가 연간 10건 가량 보도된다. 가족을 책임지려 일생을 소진했을 부양자의 고통에 대해, 유사한 사건을 맡았던 한 판사는 판결문에 이렇게 썼다.

“자폐와 발달장애를 가진 아동을 위해 전력을 다한 어머니가 저지른 범죄의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지, 비극적 결과를 온전히 가족에게만 묻는 것이 합당한지 고심했다. 형사 법정은 개인만을 단죄할 뿐 국가와 사회를 단죄할 수 없어, 재판부를 무력하게 만든다”. 2019년 어머니가 발달장애인 딸을 살해한 이 사건 이후에도 세상은 조금도 바뀌지 않고 같은 문제가 반복되고 있다. 사건을 들여다보는 이들의 무력감만 커지고 있다.

얼마 전, <뉴스민>이 터 잡은 남구 대명동 일대에서 전세사기 피해자가 명을 달리했다. 그는 살고 싶어서 대구시청 문을 두드리고, ‘살려달라’는 민원도 제기했다. 대구시는 그에게 국토부에 전세사기 피해자 신청을 하라는 원론적 답변을 했다고 한다. 그는 ‘피해자’가 아닌 ‘피해자 등’으로 지정됐다. 그가 신청한 긴급생계지원금은 그가 사망한 다음에야 지급됐다. 그가 살았던 집은 전세사기 문제가 표면화되자 감옥으로 바뀌었다. 같은 전세사기 임대인에게 사기를 당한 피해자들도 처지는 매한가지다.

살던 집이 경매에 넘어가도 전세금을 받지 못했는데, 사기 가해 임대인은 그 와중에 피해자들에게 건물 관리비를 내라고 문자를 보냈다. 황당한 피해자들이 관리비를 내지 않자, 건물의 전기, 수도, 인터넷을 끊었다. 피해자가 대응을 위해 유명 로펌에 찾아갔더니 이미 임대인 측을 변호 중이라 계약할 수 없다고 한다. ‘언젠가 웃으며 볼 일이 있겠지’란 생각으로 일지 기록을 시작한 피해자는 같은 건물에서 희생자가 나오자, 합의고 뭐고 임대인 처벌만 바라게 됐다.

‘독박 돌봄’ 발달장애인 가정, 전세사기 피해자에게 국가는, 상황이 나아질 수 있을 것이란 일말의 믿음도 주지 못하는 것 아닌가. 정치는 민주주의를 확장하는 과정일 텐데, 난무하는 ‘정치’ 속에서 ‘민’의 이야기는 꾸준히 변방으로 밀려나고 있다. 전세사기 이후 살고 싶어서 이곳저곳 국가의 문을 두드렸던 고인의 이야기를 듣고, 또 그와 같은 처지가 됐다가 이미 목숨을 잃은 분이 일곱분이나 더 된다는 것에서, 장애인 가정에 놓인 극단적 상황이 꾸준히 이어진다는 점에서, 우리 사회는 곤경에 빠진 이들이 청원하는 것으로는 한치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할 것처럼 보여 막막하다.

전세사기 피해자가 쓰는 ‘일지’, ‘단전, 단수’, ‘국가 기능의 부재’가 그들의 세세한 일상에 어떠한 영향을 끼치는지에 대해 뉴스민 기자가 전세사기 피해 현장을 다니고 피해자들을 만나 기록될 수 있었다. 한 치 앞이 보이지 않는 세상에서, 뉴스민이 할 수 있는 일은 문제가 문제화하도록 기록해서 전파하는 일일 테다. 그 기록이 곤경에 빠진 이들에게 미약하나마 위안이 되기를 기원하며, 나도 정치와 언론의 밀도가 낮은 변방으로 더 들어가 보자고 다짐한다.

박중엽 기자
nahollow@newsmi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