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듯 같은 역사] 기근에도 가흥창의 쌀은 썩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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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28년 음력 5월, 경상도 북부 지역의 기근은 말 그대로 역대급이었다. 당시 상황을 기록했던 김령의 표현에 따르면, 8년 전 많은 사상자를 남겼던 경신년(1620년)의 기근이 무색할 정도였다. 일반 양민들의 굶주림은 당연하기까지 했고, 평상시 굶어 본 적 없는 어지간한 양반집도 끼니를 연명하지 못해 곡식을 구하러 다닐 정도였다고 했다.

이러한 상황이니, 당장 굶어 죽는 것을 피하기 위해 논밭이라도 팔아 곡식을 구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재산이 있는 부잣집도 물건을 팔고 살 때 포목만 사용하면서, 곡식은 내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곡식이 화폐 역할을 하려면 그나마 먹고 남는 게 있어야 했지만, 당시 상황은 곡식이 화폐의 기능도 감당하지 못할 만큼 절대적인 빈곤 상태였다. 그 어떤 것도 곡식과 바꿀 만큼 귀한 것은 없었다.

이렇게 되면서, 이곳 저곳에서는 도적떼 출몰 소식이 들려왔다. 토지를 팔아서도 곡식을 구할 수 없는 상황이니, 남은 것은 활과 칼을 드는 방법 밖에 없었다. 영주에 사는 류화라는 사람은 곡식을 여러 곳에 저장해 두었는데, 그중 한 곳을 도적떼들이 들이닥쳐 불을 지르고 식량은 모두 약탈해 갔다. 상주에서는 굶주린 백성들이 활과 칼을 가지고 부잣집에 몰려들자, 이를 본 주인은 두려운 마음에 그들에게 곡식을 나누어 주면서 진정시킨 일도 있었다. 조금만 더 나갔으면 민란으로 번질 일이었다.

이와 같은 상황이면, 조정이나 지방 관아의 핵심 업무는 백성들을 구휼하고 굶어 죽는 사람이 없도록 하는 데 초점이 맞추어져야 했다. 그러나 당시 예안현(현 경상북도 안동시 예안면 일대) 상황은 달랐다. 예안 현감은 곡식이 부족한 상황을 잘 알면서도, 세금을 독촉하는 일에 몰두했다. 그는 이 일을 너무 열심히 하기까지 해서, 세금 독촉을 위해 먼길도 마다치 않았다. 게다가 세금을 내지 못하는 백성들은 곤장으로 다스렸다. 먹을 것도 없는 상황에서 세금까지 독촉하니, 백성들은 굶어 죽지 않으면 곤장에 맞아 죽어야 하는 상황에 내몰리고 있었다.

이처럼 엄중한 상황에서 충주 가흥창의 곡식이 썩고 있다는 소식은 모두를 절망에 빠트렸다. 충주 가흥창은 조선시대에 한강 물길에 따라 설치된 대표적인 세곡 창고로, 충청도 내륙지역과 경상도 북부 지역 세곡이 모이는 곳이었다. 지역의 세곡을 모아 물길을 따라 서울에 있는 경창京倉에 보내기 위한 시설로, 조정의 5품 관리가 이를 직접 관리했다. 세곡을 물길로 운반해야 했기 때문에 파도가 잔잔한 때를 기다려야 해서, 가흥창에는 운송 대기 중인 세곡들이 가득 차 있을 수밖에 없었다.

가흥창의 세곡은 특히 경상도 북부 지역 백성들 입장에서는 거두는 것도 힘들었지만, 이를 옮겨 납부하는 일 역시 쉽지 않았다. 경상도 북부 지역에서 세곡을 가흥창으로 운반하려면, 조령이나 죽령을 넘어야 했다. 육로 이동이 쉽지 않은 고개다 보니, 운송 자체가 매우 큰 난관이었다. 이 때문에 경상도 북부 지역에서는 세곡을 거둔 후, 이를 포로 바꾸어 죽령과 조령을 넘었다. 그리고 다시 가흥창 주변에서 포를 세곡으로 다시 바꾼 후 가흥창에 납부하곤 했다. 불법이기는 했지만, 운송이 너무 힘들다 보니 달리 방법이 없었다. 당연히 상인들은 이중의 이익을 취했는데, 경상도 북부 지역 백성들은 이 같은 이익분까지 책임졌다. 가흥창의 세곡은 그야말로 경상도 북부 지역 백성들의 피땀이었던 것이다.

1628년 기근이 심하리라는 예상은 이미 그 전해 가을이면 할 수 있다. 이 때문에 지방 관아에서는 세금을 거두는 게 쉽지 않을 것으로 판단해서, 쥐어 짜듯 세금을 거두었을 터였다. 상인들의 이익분까지 계산해서 백성들에게 무거운 세금이 부과되었고, 그 결과는 1628년 5월의 대기근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백성들의 기근과 맞바꾸었던 세곡이 한양으로 운송 대기 중인 상태로 썩고 있었던 것이다. 관리 부실이 원인이었겠지만, 백성들이 이 세곡을 어떻게 납부했는지를 안다면, 이럴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김령이 더 큰 절망에 빠지게 된 원인은 이를 대하는 관리들의 처사였다. 백성들이 굶고 있는 상황에서 곡식이 썩고 있다면, 이 곡식이라도 우선 꺼내 백성들을 구휼하자는 이야기가 나와야 정상적인 관료들이다. 그런데 창고 부실 관리의 책임을 지기 싫은 이들은 이를 외면했고, 조정 관료들 역시 자신들의 배가 고프지는 않으니 들어오지 않는 국가 세금만 걱정했다. 세금을 낸 백성들은 굶어 죽고 있는데, 그들은 빈 세곡을 어떻게 채울지만 고민하고 있었던 것이다.

백성이 국가의 근본이라는 당위는 예나 지금이나 바뀐 적이 없다. 당연히 국가의 근본이 무너지면 국가 역시 무너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세금을 내는 이들도 백성들이지만, 세금 역시 국가의 근본인 백성들을 위해 우선 사용되어야 한다. 백성들 입장에서도 자신들이 내는 세금이 그대로 자신의 안정된 삶과 연결될 때, 국민들은 세금 납부를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세금은 거두는 만큼 잘 사용하는 게 중요한 이유이다. 백성들은 굶어 죽고 있는데, 곡식은 썩을망정 백성들을 위해 사용하지 않는다면, 국가와 조정이 무슨 필요가 있을까?

이상호 한국국학진흥원 책임연구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