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영의 시적 여정] (13) 어둠과는 타협하는 법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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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황규관 시인이 연재하는 ‘김수영의 시적 여정’은 매달 5일, 20일 뉴스민에 연재한다. 인용된 작품의 전문 수록은 저작권자와의 협의를 마쳤습니다.]

「수난로」에서 김수영은 “문명의 폐물(廢物)”에 고이는 “어둠”을 말한다. 이는 「영사판」의 “주야를 가리지 않는 어둠”과 일정 부분 의미론적으로 겹치면서 「서책」에서 말하는 “신(神)”과도 연결이 된다. “문명의 폐물(廢物)”에 고이는 “어둠을 신(神)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즈음 김수영은 어떤 판단중지 상태를 간헐적으로 보여준다. 어둠을 신이라고 부르는 것은 김수영 자신이 맞닥뜨린 한계 상황을 우회적으로 드러내는 비유에 해당된다.

특정 시간대에 생산된 시에서 특정 어휘들이 반복되는 것은 전혀 부자연스러운 현상이 아니다. 도리어 반복되는 그 어휘들을 통해 조금 더 명료하게 시인의 내적 상태를 읽을 수 있다. 물론 「헬리콥터」와 「영사판」에서 봤듯 “긍지와 선의”를 가지고 현실을 “떠받치고 있는 주야를 가리지 않는 어둠”을 느끼게 되었지만, 김수영은 아직 자신의 인식 안쪽에 자리 잡지 못한 세계를 일러 “어둠” 혹은 “신(神)”으로 명명해둔 것 같다.

그런데 “이 어두운 신은 밤에도 외출을 못하고 자기의 영토를 지킨다”. 왜냐면 한 문명은 끝났지만 이 땅에 온 새로운 문명을 시의 화자는 받아들이지 못해 몸부림치고 있는 것이다. 현실과의 이런 갈등과 불화는 1955년에서 1956년 사이에 집중적으로 드러난다. “이 어두운 신”의 현재 “유일한 희망은 겨울을 기다리는 것이다”. 수난로는 “그의 내부에” “더운 물”을 채워 실내는 덥히는 게 제 역할이기에, 수난로의 “유일한 희망”이 “겨울”인 것은 범상한 비유 같지만 “더운 물이 없어”진 상태를 “어두운 신”이라고 말하는 순간 이 “유일한 희망”으로서의 “겨울”은 다른 의미와 아우라를 한 겹 더 입는다. 여기서 우리는 어떤 정신주의를 읽을 수도 있다. 니체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 적이 있다. 겨울은 “가혹한 손님이다. 그런데도 나는 그를 공경하며, 마음이 여린 자들과 달리 배불뚝이 불의 우상을 경배하지는 않는다. 우상을 경배하기보다는 차라리 얼마만큼 이를 덜덜 떨겠다. 그것이 내 성미에 맞는 일이다. 나는 특히 발정을 하여 김을 내뿜는 후텁지근한 불의 우상 모두를 싫어한다”(제3부 ‘감람산에서’, 책세상, 282)

수난로의 “유일한 희망은 겨울을 기다리는 것이다”고 말한 다음 김수영은 돌연 “그의 가치는/ 왼손으로 글을 쓰는 소녀만이 알고 있”는데, “그의 머리 위에 반드시 창(窓)이 달려 있는 것은/ 죄악이 아니”냐고 묻는다. 어떤 연구자는 수난로의 가치는 “왼손으로 글을 쓰는 소녀만이 알고 있다”는 구절을 ‘오른손잡이’ 세계에 대해 ‘다른 가치’를 표상하는 이미지로 본다. 충분히 일리 있는 해석이지만, “그것은 그의 둥근 호흡기가 언제나 왼쪽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는 너스레에 의해 중화되어버린다.

도리어 “그의 머리 위에 반드시 창(窓)이 달려 있는 것은/ 죄악”이라는 다음 구절을 보건대, 중요한 것은 “어두운 신”을 섣불리 환기시키려는 구조적 의도들이다. “더운 물이 없어”진 수난로에는 아직 아무것도 당도하지 않았기 때문에 “창(窓)”을 통해 “어두운 신”을 섣불리 없애려는 현실은 신뢰할 만하지 않다. “그는 인간의 비극을” 알기에 아직 “어둠”이 더 필요하다. 그러나 “그는 낮에도 밤에도/ 어둠을 지니고 있으면서/ 어둠과는 타협하는 법이 없다”. 즉 새로운 시간이 오지는 않았지만, 다시 “문명의 폐물”에게로 돌아가지 않는다는 말이다.

“차라투스트라는 그의 나이 서른이 되던 해에 고향과 고향의 호수를 떠나 산 속으로 들어”가서 “자신의 정신과 고독을 즐기면서 십 년을 보냈다”. “그러나 마침내 그의 마음에 변화가” 와서 동굴을 떠난다. (위의 책, ‘차라투스트라의 머리말’, 12) 많은 사람을 만나고 많은 대화를 하고 가르침을 행했지만, 다시 그에게 찾아온 것은 고독이었다. 그 고독은 처음에 동굴을 떠날 때의 고독과는 다른 것이다. 이제는 “일체의 좋은 사물의 근원은 수천 겹으로 되어 있”으며 “일체의 좋고 분방한 사물은 기쁨에 넘쳐 현존하는 세계 속으로 뛰어든다”(284)는 것을 알게 된 자의 고독이다. 이때 고독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병든 자의 도피”로서의 고독과 “병든 자로부터의 고독”이 그것이다.(286) “병든 자로부터의 고독”은 새로운 시간을 창조하는 자의 고독이며, “그것이 생이었던가? 좋다! 그렇다면 다시 한번!”(257)이라고 말할 수 있는 용감한 자의 고독이다.

김수영의 시적 여정을 보면, 현실에서 어떤 벽에 부딪혔을 때 과거의 유물로 돌아가는 모습을 찾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의 도약대는 언제나 현재였기에 현재가 어떤 모습을 하고 있든 부정적인 자세를 보이지 않는다. 5·16 쿠데타 이후 찾아온 혼란처럼 보이는 ‘신귀거래’ 연작마저도 과거로의 회귀는 아니다. 그에게 과연 니체처럼 “다시 한번!”을 외친 적이 있는가 하는 물음을 던질 수는 있지만, 그는 끊임없이 “병든 자로부터” 벗어나려고 했던 것만은 사실이다. 물론 그에게 가장 깊게 “병든 자”는 후진적인 현실이다. 그 현실은, 사회·문화적 현실뿐만 아니라 정치적 현실, 문학장 내부의 현실까지 모두 다 포함된다. 하지만 동시에 자신의 그런 현실을 깊게 사랑했음은 물론이다. 사랑이 아닌 원한 감정이나 연민은 새로움을 창조하지 못한다.

연보에 의하면, 1955년부터 1956년에 걸쳐 6개월 동안 <평화신문> 문화부 차장으로 일하게 된다. 「바뀌어진 지평선」 「기자의 정열」 「구름의 파수병」은 이즈음에 써진 것으로 읽힌다. 일단 전집에 표기된 작품 제작 연도도 그렇지만 「바뀌어진 지평선」의 시적 정황 자체를 봐도 그렇고, “타락한 신문기자의/ 탈을 쓰고 있단다” 같은 구절에서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기자의 정열」은 제목부터가 시의 화자가 기자라는 것을 밝히고 있는 데다, 시의 내용도 시의 화자인 기자가 자신에게 하는 말로 채워져 있다. 그러나 「바뀌어진 지평선」과 「구름의 파수병」에 의거해 보면, 이때 김수영은 우울을 앓고 있는데 그것은 자신이 하는 일이 “시와는 반역된 생활을 하고 있다는”(「구름의 파수병」) 자괴감 때문인 듯하다.

그나마 「바뀌어진 지평선」에서는 자신의 생활이 빠진 “경박성”과 “뮤즈”의 대립을 어떻게든 화해시켜보려고 하지만 「구름의 파수병」에서는 그 “경박성”에 끝내 등을 돌리고 만다. 김수영이 평생 받은 생활의 압력은 시를 낳게 한 동력이 되었다. 그러나 그 압력이 곧바로 시를 낳게 하지는 않았다. 그것과의 투쟁 과정에서 김수영의 시는 탄생한다. 「바뀌어진 지평선」에서는 표면적으로 “뮤즈”에게 자신의 “생활이 비겁하다고 경멸하지 말아”달라며 그래도 자신은 “로날드 골맨의 신작품을/ 눈여겨 살펴보며/ 피우기 싫은 담배를 피워본다”고 자위한다. 또 “뮤즈”는 “어제까지의 나의 세력”이나 “오늘은 나의 지평선이 바뀌어졌다”고 짐짓 자기 자신을 합리화도 시켜본다. 이게 “아슬아슬하게/ 세상에 배를 대고 날아가는 정신”이며, 동시에 “배반”이며, “모험”이며, 그러나 ‘간악“이기도 하다.

작품의 마지막에서 “뮤즈는 조금쯤 걸음을 멈추고/ 서정시인은 조금만 더 속보로 가라/ 그러면 대열은 일자가 된다”고 결정적인 화해를 시도한 듯 보이나, 결국 그것마저도 “오늘의 우울”과 “오늘의 경박을 위하여”라고 실토하고 만다. 김수영에게 시와 생활의 일치는 끝내 불가능했던 것일까. 그에게 생활은 시에 대해서는 일종의 잡음이었다. 돌연한 죽음 직전의 글인 「반시론」(1968)에서 그는 이렇게 쓴 적이 있다. “그 전에는 무엇을 쓸 때 옆에서 식구들이 누구든지 부스럭거리기만 해도 신경질을 부렸는데 요즘은 그다지 마음에 걸리지도 않고, 오히려 훼방을 좀 놓아주었으면 하는 생각이다. 그것이 약이 되고 작품에 뜻하지 않은 구명대의 역할을 해주기도 한다. 잡음은 인간적이다.” 죽음 즈음에는 어느 정도 관대해진 태도를 뒤집어 읽으면 그가 얼마나 그것에 평생 예민했는지 어림잡을 수 있다.

「바뀌어진 지평선」에서와는 달리 「구름의 파수병」에서는 “시와는 반역된 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을” 반성하고 “이미 정하여진 물체만을 보기로 결심”한다. 누군가가 이런 자신의 변한 태도의 “그릇됨을 꾸짖어주어도 좋다”. “함부로 흘리는 피가 싫어서/ 이다지 낡아빠진 생활을 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김수영에게는 “방 두 칸과 마루 한 칸과 말쑥한 부엌과 애처로운 처를 거느리고/ 외양만이라도 남과 같이 살아가다는 것이 이다지도 쑥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자기의 나체를 더듬어보고 살펴볼 수 없는 시인처럼 비참한 사람이 또” 없다. 한때 생활과 타협하려 했던 마음을 물리치고 “날아간 제비와 같이 자국도 꿈도 없이/ 어디로인지 알 수 없으나/ 어디로이든 가야 할 반역의 정신”이 곧 자신의 것임을 다짐하는 일은 그래서 고독의 다른 이름이다. 이렇게 자신을 고독이라는 “산정”에 유폐시킨 다음, 거기서 “꿈도 없이 바라보아야 할 구름”의 파수병을 자처한다.

하지만 이런 의도적인 자기 유폐가 문제를 해결해주는 것은 아니다. 「사무실」에서는 백수(?)가 된 김수영의 우울한 자의식이 다시 읽힌다. “남의 일하는 곳에 와서 아무 목적 없이 앉았으면” 순간 설움이라는 생활의 우울이 찾아온 것이다. 여기서 “설움”은 전쟁 직후의 설움과는 그 맥락과 내포가 다르다. (당연히 시어도 그렇지만 모든 언어는 언제나 구체적 맥락을 드러내면서 해석되어야 한다.) 마지막 결구에서 “어떻게 하리”를 반복하는 것은 아직도 생활에서 시로 전적으로 넘어오지 못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러나 생활에서 시로 넘어온다는 표현은 하나의 비유에 지나지 않는다. 현실에서는 그게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게 있다. 김수영이 <평화신문> 기자로 6개월가량 일을 하면서 느낀 것은 자본주의 체제가 자신이 생각하는 시쓰기의 삶과 대치된다는 점일 것이다. 그것이 “시와는 반역된 생활을” 강요한다는 것을 알게 되자 그 자리를 떠났을 개연성이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앞에서 말했듯, 그는 언제나 현재에서 새로운 출발을 다짐한다. 그래서 “이미 정하여진 물체만을 보기로 결심”한 것이다. 비록 「사무실」에서 봤듯 순간 ‘설움’이 다시 찾아오기는 하지만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수영의 의지는 「여름 뜰」과 「여름 아침」을 통과해 「백의(百蟻)」에 닿는다. 물론 단순한 도덕 감정으로 밀고 나가는 것은 아니다. 반대로 자신이 처한 현실이 아이러니로 가득 찬 세계라는 것을 전유하면서 나아간다. 현실에 만연한 이런 상황을 ‘현대성의 아이러니’라고 부르기도 하는 것 같지만, 정확히 말하면 그것은 아이러니 이전에 자본주의 근대가 강요하는 분열증적 사태에 다름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