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여름 밤 이야기] (3) 빅데이터 되기를 거부하는 글쓰기 / 황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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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공지능 시대에 인간에게 중요한 것은 창의성이라고들 한다. 왜냐하면 그동안 인간 고유의 활동으로 여겨져 왔던 지적 노동의 대부분을 인공지능이 대신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공지능이 하지 못하는 창의적인 일을 해야만 그나마 인간의 존엄을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여러 사람이 꼽는 분야가 바로 예술이다. 하지만 어떤 이는 예술 작품도 인공지능이 창작할 수 있다고 주장하면서 다른 차원의 창의성이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즉 인공지능 시대에 필요한 것은 기존에 없는 새로운 데이터이며 새로운 데이터를 창조하는 능력만이 인간의 존재 역량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인공지능은 컴퓨터 기술의 비약적 발전과 뇌과학의 성과가 결합해 만들어졌다. 뇌과학이, 인간의 학습은 신경세포 간의 연결고리 즉 시냅스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밝혀내고, 컴퓨터 기술은 그것을 본떠 인공신경망이라는 알고리즘을 만들었다. 이 인공신경망을 최대한 복잡하게 만든 다음 거기에 빅데이터를 들이부어 인공신경망 스스로가 학습을 하게 만든 것이다. 그리고 학습에 필요한 데이터가 증가하는 것에 비례해 인공신경망의 소스 코드는 계속 추가된다. 이세돌 9단과 세기의 대결(?)을 펼쳤던 알파고는 이것의 결과물이다. 여기까지가 내가 아는 인공지능에 대한 지극히 초보적인 상식이다.

인공지능 시대가 우리에게 어떤 환경을 제공할지 자신 있게 말할 능력은 안 되지만, 인공지능 시대에 대한 전문가들의 예측 및 바람을 조금 다른 시선으로 따져볼 이유는 있다. 왜냐면 전문가들이 예상하는 인공지능 시대에는, 우리 자신에 대한 존재론적 문제가 심각하게 대두되기 때문이다. 당연히 이것은 구체적인 삶을 위협하면서 등장할 것이다. 여기서 창의성이 인간의 정신 및 영혼의 독특함을 드러내는 지표가 되는 듯한데, 창의성은 상상력이 기반이 되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일반적으로 상상력을 엉뚱한 일을 꿈꾸거나 꾸미는 것과 결부시키고는 하지만 도리어 창의성은 물리적 만남 또는 물질적 관계에서 시작된다.

윤재철 시인은 「창의성」이란 시에서 창의성은 “허리 꺾어지도록 끝없는 반복에서/풀리지 않는 그 고통에서” “불꽃 튀듯 생겨나는 것”이라고 비유한 적이 있다. 시인에 의하면 창의성이란 반복되는 몸의 활동이 어떤 불가해한 장애 앞에서 섬광처럼 찾아오는 것이다. 인간은 단지 뇌가 아니라 몸 전체를 통한 온갖 감각의 파동으로 이루어진 존재라는 점을 고려하면 시인의 이런 통찰 자체가 내게는 섬광 같다. 또 뇌에 저장된 정보로 취급되고 있는 기억이란 것도 단순한 데이터가 아니라 현실의 사건을 통해 끊임없이 재해석되는 서사 또는 은유나 이미지에 가깝다. 기억은 우리가 현재에서 만나는 사물이나 겪게 되는 사건을 통해 재구성되는 역동성을 그 특징으로 갖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기억은 고여 있는 게 아니라 흐르는 물 같다는 얘기다.

지성이란 것도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것처럼 지식과는 그렇게 큰 상관이 없다. 프랑스 철학자 앙리 베르그손은 (도서관에 가면 생물학 코너에 곧잘 꽂혀 있는) 『창조적 진화』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 적이 있다.

“우리가 생각하는 인간 지성은 절대 플라톤이 동굴의 비유에서 보여준 것과 같은 지성이 아니다. 그것의 기능은 공허한 그림자들이 지나가는 것을 바라보는 것도 아니고 뒤로 돌아서서 눈 부신 태양을 관조하는 것도 아니다. 우리는 일하는 소처럼 중노동을 하도록 매여 있어 우리의 근육과 관절의 움직임을 느끼며 쟁기의 무게와 흙의 저항을 느끼고 있다. 행동하는 것과 행동할 줄 아는 것, 실재와 접촉하고 심지어 그것을 사는 것, 그러나 단지 우리가 수행하는 일과 우리가 파는 밭이랑에 관계되는 한도에서 그렇게 하는 것이 바로 인간 지성의 기능이다.”

▲사진=pixabay.com

이렇게 보면 인간의 지성이나 창의성은 신체적 활동을 통해 시작된다는 말이 된다, 그렇다면 인공지능에 신체적·정신적 노동을 빼앗긴 현실 조건에서 창의성을 요구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마르크스는 「자본론 1권」에서 자본주의 체제 하에서는 “과학이 독립적인 힘으로 노동과정에 도입되는 정도에 비례해 노동 과정의 지적 잠재력을 노동자로부터 소외시킨다”고 말한 바 있다. 이런 맥락에서 보자면 인간이 생산해내는 언어나 또는 시청각적 창작물을 데이터로 환원한 후 다시 빅데이터로 삼으려는 기술공학적 발상은 존재 자체를 비트(bit)로 환원시키려는 퇴행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인공지능 시대에는 지금까지의 힘든 노동은 사라지고 삶에 여유를 시간이 주어질 것이라고 말한다. 그 시간을 잘 사용하려면 예술 같은 창의적인 일이 필요하고 ‘로봇세’ 같은 것을 신설해 그 세입으로 기본소득을 지급하자고 한다. 하지만 이 또한 현실에서 벌어지는 구체적인 일을 모르고 하는 말 같다. 마르크스의 예측대로 지적 잠재력을 침식시키는 데이터 생산 노동이 이미 새로 출현했다. 또 온라인 구매가 늘어나면서 배달 노동자들처럼 노동시간이 고정되지 않거나 자기착취를 일삼아야 생존이 가능한 노동 형태가 점점 일반화되고 있다. 결론적으로 말해 인공지능은 인간에게 부스러기 노동을 제공하면서 그나마 남은 삶의 시간을 지금보다 더 잘게 해체해 자본의 시간으로 삼을 것이다. 즉 죽은 시간을 더 많이 생산할 것이다.

그렇다면 왜 이러한 퇴행적인 모험은 그치지 않고 시도되는 것일까? 과학기술의 발전에 곧잘 부여되던 가치중립성에 대해 쉽게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이 늘어나고는 있지만, 과학기술 발전이 가져다주는 생활의 편리에 대해서 숙고하는 광경은 그다지 흔하지 않다. 무엇보다도 과학기술 발전이란 것이 자본주의가 발전하면서 나타나는 현상, 즉 자본의 유기적 구성의 고도화인, 노동력의 비율을 줄이고 불변자본인 생산수단의 비율을 높이는 것과 같은 의미라는 것을 누구도 지적하지 않는 것 같다.

자본의 이런 고도화는 오직 이윤을 위함인데, 이런 맥락에서라면 육체노동의 파편화와 주변화는 당연한 수순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사람은 인공지능 시대를 피할 수 없는 사태처럼 받아들이고 있다. 어쩌면 이게 솔직한 내면 풍경인데, 중요한 것은 우리의 삶이 그만큼 비참해지고 있다는 점이다. 심지어 과학기술 발전으로 인한 생활의 편리를 마치 역사 발전의 한 단면으로 인정하는 진보주의자도 허다하다. 자본주의로 인한 생산력의 발전이 그다음 사회를 예비하는 것이라는 이상한 진보주의 사관이 만들어낸 이데올로기 효과 때문이다. 하지만 단언하건대 과학기술의 발전은 존재 역량을 감퇴시킬 뿐이다.

사람들은 대체로 승리의 환호성을 함께 지를 수 있는 다수자가 되고 싶어 하지 가장자리의 소수자가 되고 싶어 하지는 않는 것 같다. 그것은 (어떤 형태로든) 글쓰기에도 드러나게 되어 있다. 가급적 많은 사람에게 회자되는, 즉 지극히 일반화된 논리와 어휘를 무비판적으로 구사하려는 욕망들은 어렵지 않게 느낄 수 있는데, 나는 그것들을 ‘빅데이터가 되고 싶어 하는 글쓰기’라고 부르려 한다. 예를 들어 현실 정치 문제를 직접 다루거나 최근에 이슈가 된 주제를 가지고 글을 쓰면 ‘좋아요’는 쉽게 획득된다. 이것을 언론이 갖다 쓰고 다시 재가공한다. 뒤이어 언론 소비자들의 반응이 뒤따르고 ‘좋아요’를 생산하는 원료로 되돌아온다.

사건에 대한 다른 맥락이나 관점을 생략해야만 ‘좋아요’가 좋아한다. 간단히 말하면 이런 글은 텍스트 소비자들에게 아부하는 글이다. 자신이 쓴 글이 빅데이터가 되는 게 시대의 흐름에 동참하는 것 같지만 그것은 인공지능 시대의 자본이 되려는 욕망에 가깝다. 물론 그것을 의식하거나 직접적으로 욕망하는 것은 아닐 수 있다. 하지만 습관과 관행마저 당대의 문화에 의해 영향을 받는 것이라면, 우리는 우리의 의식과 무의식 전체를 우리의 바깥에 가끔 위치시킬 필요가 있다. 그것들은 태초부터 우리 자신의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역사적으로 그리고 문화적으로 형성된 것들이다. 우리가 갖고 태어난 것은 유전된 물질 형태뿐인데, 그것은 앞으로 어떤 것이 새겨질지 모를 어두운 서판이기도 하다.

우리는 소셜미디어를 통해 비판이라는 명목으로 언론 시장에 언어-데이터를 공급하는 유명인들을 잘 알고 있다. 그들은 언제나 자신의 기준과 척도가 옳다고 전제하고 있으며 자신이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다는 ‘앎의 신화’에 빠져 있는 사람들이기도 하다. 그들은 자신의 앎보다 모름의 영역이 훨씬 더 광대하고 심오하다는 것을 인정하려 들지 않는다. 그래서인지 끊임없이 비판이라는 명목으로 현실에 개입함으로써 현실을 개선하는 게 아니라 도리어 후퇴시키는 것만 같다. 사회적 사건이 일어나면 언론은 이러한 이른바 전문가를 찾아 나서고, 어느새 전문가들은 사건에 대한 권위 있는 해석자로 인정되며, 상징/문화 자본이 부여된다. 하지만 유사한 사건이 끊임없이 그리고 강도가 더해져 일어나는 것을 보면, 현실은 전혀 개선되지 않은 것 같다.

진정 창의적인 글은 빅데이터 되기를 거부하는 글이다. 빅데이터 되기를 거부하는 글은 언제나 ‘모름’ 속으로 자신을 던지는 글이다. 앎의 극단은 모름이라는 영역을 발견하게 되는 지점이며 여기서 앎과 모름을 가늠하는 정신의 탐침이 부르르 떨린다. 나는 이 정신의 탐침이 떨리는 현상 속에서 글쓰기가 시작된다고 생각하는 쪽이다. 따라서 글쓰기는 언제나 자신을 위험에 빠뜨리는 정신의 운동이며, 나락으로 떨어지지 않기 위해 이 운동은 “허리 꺾어지도록 끝없는 반복”을 하는 것이고 이 반복 속에서 언젠가 섬광이 일어나는 것이다. 이 정신의 반복 운동 속에서 찾아온 섬광이 빅데이터가 되고자 하는 언어들과 같을 리가 없다.

*이 글은 2018년 10월 11일 자 <서울신문>에 실린 ‘빅 데이터가 되기를 거부하는 글쓰기’를 고쳐 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