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견벽청야(堅壁淸野) 푸른 밤에] (10) 새로운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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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선 연재>
[견벽청야(堅壁淸野) 푸른 밤에] (1) 섣달그믐
[견벽청야(堅壁淸野) 푸른 밤에] (2) 잠과 밥 / 설날 / 정월 초이틀
[견벽청야(堅壁淸野) 푸른 밤에] (3) 피난
[견벽청야(堅壁淸野) 푸른 밤에] (4) 청연학살
[견벽청야(堅壁淸野) 푸른 밤에] (5) 인정마저 앗아간 학살과 네 번째로 다녀온 저승의 문턱 ①
[견벽청야(堅壁淸野) 푸른 밤에] (6) 인정마저 앗아간 학살과 네 번째로 다녀온 저승의 문턱 ②
[견벽청야(堅壁淸野) 푸른 밤에] (7) 다섯 번째 저승 문턱
[견벽청야(堅壁淸野) 푸른 밤에] (8) 외갓집 / 봄은 왔는데
[견벽청야(堅壁淸野) 푸른 밤에] (9) 탄량골, 박산골의 호곡성

▲”한 많은 1951년이 가고 / 1952년 봄이 왔다”거창양민학살사건 위령제(사진=거창군)

■ 새로운 삶
살육을 당하고 집들은 불탔지만
그래도 살아남은 사람들이 있다
또 어떤 일이 생길지 한 치 앞이 보이지 않았다
집이 불에 탄 사람들은 움막을 지었다
남의 집 문간방을 빌려 눈비를 피하며
자갈밭을 일구어 농사를 지었다
질긴 목숨이었고 모진 세월이었다
식구가 반으로 줄은 아버지와 나는
당분간 큰집에서 보내야했다
큰아버지 내외분 슬하에는 2남 3녀가 있었다
큰 사촌누님은 산청군 차황면으로 시집을 갔고
큰 사촌형님 내외 슬하에는 1남 2녀가 있었다
우리 두 식구를 더하니 12명의 대식구가 되었다
설날에 어머니와 왔던 큰집인데
며칠 사이에 상황이 크게 달라지게 된 것이다
우리의 더부살이가 길어질 것 같으니
밥상머리에 앉으니 큰집 식구들의 눈치가 보였다
어려운 시절 보릿고개에 항상 배가 고팠다
냇가에 핀 버들강아지를 따먹었다
산에 가서 소나무 껍질도 벗겨서 달큼한 물을 빨아먹었고
산과 들을 맨발로 돌아다녔다
살육의 시간을 뒤로한 채
봄이 가고 가을이 갔다
아버지와 나는 한마을에 혼자 사는 고모님 집 옆방으로 옮겼다

추수가 끝나고 고모님 두 분이
내동 마을에 혼자된 아주머니를 새어머니로 모셔왔다
새어머니는 재가해 오기 전에 부부 금슬이 좋았는데
슬하에 딸 하나를 남기고 남편이 병으로 일찍 죽었다
아들을 보는 게 소원이어서 재가해오셨다
인정 많고 너그러운 분인데
나는 어머니란 말이 나오지 않았다
청연골에서 죽은 어머니의 참혹한 모습이 떠올랐다
까마귀에 눈알이 파 먹히고
여우에게 몸을 뜯긴 어린 여동생이 꿈에 자주 보였다

한 많은 1951년이 가고
1952년 봄이 왔다
11살의 늦은 나이에 신원국민학교에 입학했다
6.25와 거창학살사건으로 학교가 제대로 운영되지 못했다
45년생이 입학하는 나이인데
39년생도 같은 학년으로 다녔다
마을도 뒤죽박죽 학교도 뒤죽박죽이었다
난리에 많은 아이들이 죽었는데도 아이들은 두 반이나 되었다
나는 입학이 3년이나 늦어서 세 살 아래인 아이들과
동창이 되어서 공부를 했는데
나보다 세 살이 많은 동급생들도 있었다
학교에 책값이나 공납금을 낼 일이 있는데도
아버지는 돈을 주지 않았다
수없이 눈물을 흘리고 선생님한테 손바닥도 많이 맞았다
6학년 1학기 서울 큰형님 댁으로 전학을 가기 전까지
5년여의 시간 동안 눈물로 학교를 다녔다
3학년이 되었을 때는 5학년 선배들과 한 교실에서 공부를 했는데
담임선생님이 외지에서 부임해 와서 사택에서 살림을 했다
그 선생님의 땔나무를 해대던 생각이 난다
겨울이면 날씨도 추운데 방과 후에
산으로 땔나무를 하러 가는 게 죽도록 싫었다
빨갱이들을 토벌하기 위해 벌목해놓은 산으로 가서
5학년 선배들과 나무를 해서 집으로 오면 어둑해지곤 했다
아버지는 학교 끝나고 바로 집으로 오지 않는다고 꾸중을 하신다
그럴 때마다 엄마 있는 애들이 부러웠다
엄마가 그립고 보고 싶었다
엄마, 엄마, 엄마, 혼자서 숨죽여 엄마를 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