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1년은 끝나지 않았다] 1991년, 잊을 수 없다

1991년 공안통치 분쇄, 민중생존권 사수, 자주통일’ 투쟁이 이어진 가운데 4월 26일, 명지대 1학년 강경대가 총학생회장 연행 규탄 교내 시위 도중 백골단의 쇠파이프에 맞아 끝내 숨졌다. 이어서 4월 29일 전남대에서 강경대 열사 추모와 노태우 정권 퇴진을 요구하던 박승희 열사가 분신했다. 5월 1일 우리 지역 안동대 김영균 열사, 천세용 열사가 분신으로 맞섰다. 뒤이어 한진중공업 박창수 열사,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 김기설 열사, 노동자 윤용하, 이정순, 정상순 열사가 몸을 몸을 던졌다. 다시 대학생 김귀정, 양용찬과 대구대 특수교육과 예비교사 손석용 열사가 죽었다.

교사들을 가장 마음 아프게 만든 일이 일어났다. 5월 18일 광주 보성고 3학년 김철수 열사가 운동장에서  5·18 광주정신 계승과 교육현실을 비판하며 분신하고 6월 2일 사망했다. 전교조 대구지부 교사들은 한 해전인 90년 6월 5일, 전교조 해직교사를 지지한다는 이유로 교사들의 탄압을 받고 투신한 김수경 열사에 대한 아픔이 가시지도 않은 가운데 고등학생 열사를 맞는 일은 충격이었다. 이들 열사들은 대부분 1989년 전교조 결성으로 해직되던 교사들을 지키기 위해 싸웠던 고등학생들이 대학생이 되고, 참교육 1세대로 불리었다. 이들의 민주화를 위한 투쟁은 자연스러웠다. 그러니 1991년 열사들의 죽음은 전교조가 잊을 수 없고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전교조 교사들은 86년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다’에 대해 답한 것처럼 열사들의 죽음에 다시 답해야 했다. 경북지역 교사들을 시작으로 시국선언을 어어 나갔다. 5월 9일 ‘민자당 해체와 공안통치 종식 범국민대회’를 계기로 전교조는 참교육 깃발을 들고 거리에서 제자들을 만났다. 그리고 5.10교육민주화 선언 기념일에 맞추어 ‘폭력 정권, 살인 정권, 노태우 정권 퇴진하라’는 강도 높은 성명을 냈다. 대구지역 현장 교사 101명도 스승의 날에 맞추어 ‘현 시국과 스승의 날을 맞이하는 우리의 입장’이라는 시국선언을 했다.

5월 29일 23명의 교사들이 징계 위협에도 2차 시국선언에 참여했다. 이날로 15개 시도 5,748명의 현장교사들이 89년 해직 이후 위축되고 숨어있던 동굴에서 나와 외쳤다. 교육청의 시국선언 교사에 대한 문답서 요구와 징계 압박에 맞서 징계 철회 요구 서명이 이어졌다. 하지만 10월 17일 임성무(성북국)와 서수녀(북중)는 해임되었다. 나는 출근 투쟁을 하지 않았고, 서수녀 선생의 출근 투쟁은 계속되었다. 그해 시국선언으로 서울 김광철과 김호정, 경기 구희현이 함께 시국선언 관련 해직교사가 되었다.

▲1991년 당시 전교조 교사들의 시국선언문. (사진=임성무)

올해 30년 동안 1991년을 추모해왔던 각 열사추모사업회 등이 1991년 열사투쟁 30주년 기념사업회’를 결성했다. 4월 26일 강경대 열사가 쓰러진 날부터 5월 25일 김귀정 열사가 쓰러진 날까지 한 달 동안을 집중 추모기간으로 정하고 추모행사와 학술 심포지엄, 다큐영화를 발표한다. 기념사업회 목표는 ‘기억하고, 기록하고, 실천하는’ 일이다. ‘참담한 패배의 기억’이 아닌 민주주의 발전을 이룬 소중한 역사로 1991년 열사투쟁을 ‘재조명’하고, 알려지지 않은 열사들의 생애를 올바로 기록하며, 그들이 외쳤던 공안통치 분쇄, 민중생존권 사수, 자주통일의 과제를 다시 오늘에 실천하는 것으로 정했다.

지금은 추모 기간이다. 91년은 전교조 결성 1,500여 명 해직교사들의 상처를 이겨내고 시국선언 투쟁으로 참교육을 현장에 살려낸 자랑스런 해였다. 전교조는 90년 김수경과 91년 김철수 두 분의 고등학생 열사와 함께 이 땅의 민주주의를 위해 죽어간 청년과 노동자 열사들의 꿈과 사랑을 기억하고 실현해 내야 할 책무가 있다.

▲ 1990.6.24 경북대학교 사범대학 앞에서 열린 고 김수경 학생 추모 학생 인권 유린 방지와 자주적 학생 활동 보장을 위한 교사·학생·학부모 결의대회. (사진=김수경열사추모사업회)

91년은 나에게도 참 중요한 한 해이다. 내가 해직교사가 된 해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해직되던 날, 후배들과 반월당 봉산동 동아양봉원 뒤에 있던 지부사무실에서 조용하게 축하 케이크를 잘랐다. 그동안 89년 해직교사들의 아픔을 바라 본 상처는 해직으로 치유되기를 바랐다. 전교조 결성에 참여했던 많은 교사들은 해고의 협박 속에 어쩔 수 없이 물러나야 했다. 현장에 남기로 한 선택은 교사들의 아픔이었다. 그래서 쉽게 다시 전교조 활동에 나서지 못했다. 나도 그랬다.

89년 6월 13일 이도걸 선생 구속에 이어 여러 국공립 교사들이 불구속기소가 되고, 6월 25일 광주 전남대에서 열린 제1차 전국대의원대회에 참가하고 내려오던 최이윤, 황영진 선생이 바로 구속되었다. 7월 7일 지금 사무실 옆 네거리에 있던 대구지부 사무실이 경찰에게 침탈당하고 21명이 연행되었다. 7월 26일부터 8월 5일까지 전교조는 명동성당에서 단식농성에 들어갔다.

나도 방학과 동시에 서부경찰서로 연행됐다. 전교조 활동에 대한 조사보다는 학급 문집에 실린 아이들의 글로 국가보안법 위반 조사를 받았다. 뒤늦게 연락을 받은 가족들이 왔다. 개인적으로 당시 한집에 살던 자형 최이윤 선생이 구속된 상태에서 나는 어머니에게 더 이상 불효를 할 수 없어 탈퇴서를 쓰고 경찰서 문을 나왔다. 전교조는 이미 ROTC(학생군사훈련단)로 군입대를 해야 하는 초등교사들에게 탈퇴할 것을 권고했다.

며칠 뒤 명동성당 문 앞에서 전국초등위원회 회의가 열렸다. 단식농성을 하는 해직교사들을 똑바로 볼 수가 없었다. 나는 다음날 열린 교육청 징계위원회에 참가하여 이은생 선생을 남기고 다시 탈퇴하겠다고 말하고 살아남았다. 나는 도망치듯 고향집으로 내려갔다. 나는 며칠 동안 그동안 전혀 마시지 않았던 술을 밤새 마시고, 구속된 동지들에게 미안해서 차마 방에서 잘 수 없어서 마당 평상에서 잠을 잤다. 며칠 뒤 어머니는 그러다 죽느니 차라리 해직이 되라고 하셨다.

89년 1,527명 해직 이후 가을부터 조금씩 초등 후배들을 모아 보았지만 기껏 대여섯 명이 전부였다. 어떻게 하면, 무엇을 하면 조직을 다시 살려낼 수 있을까 머리를 굴려도 뾰족한 수가 나지 않았다. 여기에다 90년 박노해의 ‘사노맹사건’으로 정미화 선생이 학교에서 연행 구속되고 해고되었다. 하지만 참교육 참세상에 대한 열망은 사그라지지 않았다. 전교조를 만든 목적을 이루기 위해 초등지회는 초등교사들은 수업시수 경감과 교과전담제 실시를 요구하는 투쟁을 벌였다. 교대학생회, 참교육육학부모회 등과 첫 번째 어린이날큰잔치 ‘야, 야 모두 나와라’를 열었다. 나는 우리 반 아이들과 같이 준비한 노래극에 참가하려다가 무태 버스정류장에서 교장에게 잡혔다. 아이들만 보내고 행사를 진행했다.

올해 대구MBC에 부탁해서 31년 전인 90년에 제작한 <오늘의 창, 전교조 1년 해직교사가 선 자리> 영상을 디지털로 변환해서 받았다. 원상회복을 요구하는 1인 시위를 하러 오는 해직교사 선배들에게 복사해서 나눠주고 있다. 31년 전의 모습을 보는 선배들의 얼굴은 착잡해진다. 91년 대구MBC는 이번에는 해직되지 않고 살아남은 현장교사의 삶을 제작하겠다고 요청을 해 왔고, 내가 추천되었다. 피할 수 없었다.

5월 스승의 날에 맞춘 제작은 순조롭게 진행이 되었고, 드디어 방송카메라가 성북초등학교 교실에 설치되어 시작을 하려는데, 급하게 방송국과 교육청에서 연락이 와서 방송은 중단되었다. 매일 대구MBC 노조는 대책회의를 했다. 며칠 뒤 어린이 동요프로그램에 출연했다. 이번엔 전교조가 아니라 전래놀이를 소개하는 것으로 정했다. 하지만 이 또한 방송촬영 직전에 중단되어 대신 산격초 이재완 선생이 경북대에서 촬영을 이어갔다.

그냥 임성무라서 안 되는 것이었다. 노조는 포기하지 않았고 출연 사실을 학교에 말하지 않고 토론방송에 출연했다. 무려 주제가 ‘오늘날 스승은 있는가?’였다. 두류공원에서 열린 교총 배구대회에 가서 인사만 하고 집에 급한 일이 있다고 핑계를 대고 녹화를 하러 갔다. 다음날 난리가 났다. 1교시 수업도 하지 않고 교장실에 모여 같이 출연한 제자가 녹화해온 영상을 봤다. 그런 시대였다. 나에겐 정말 짜릿한 스승의 날이었다.

그렇게 91년은 열사들의 투쟁과 함께 해고의 칼날은 점점 나의 목전에 다가오고 있었다. 전교조 활동을 하지 않겠다는 89년 탈퇴각서를 어겼다는 것으로 나는 다시 징계위원회에 회부되었다. 명령불복종, 겨레의 노래 공연에 학생들 참가, 교과서에 나오지 않은 노래 지도, 전교조의 어린이날 큰잔치 주최, 노태우 정권 퇴진 시국선언 참가 등이 징계사유였다. 나는 당당하게 해직되었다.

그해 여름, 전노협 파업투쟁에 참가한 파티마병원 노조 간부였던 아내에게 구속되면 내가 생계를 책임지겠다던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나는 9월 6일 직위해제 되고 10월 17일 해고되었다. 그리고 11월 먼저 해고되었던 아내와 혼인을 했다. 대구교대에서 열려던 캠퍼스 결혼식도 청첩장이 다 나간 뒤에 대학본부에 의해 번복되었고 대학이 구해준 보훈회관에서 했다. 당시 학교로 출근하는 버스에서 백창우의 ‘나이 서른에 우린’를 들으면서 나의 30대를 생각했는데 나는 나이 서른에 해직교사가 되었다. 이듬해 나는 대안교육을 실천하기 위해 참교육여름학교를 열었다. 여름학교는 계절학교인 민들레학교가 되었고, 대안교육모임인 민들레만들레로 독립해 나갔다.

91년, 열사들의 투쟁과 함께 나의 인생도 물러설 수 없는 참교육, 참세상을 위한 길에 서게 되었다. 많은 동지들의 삶도 누가 나에게 가라하지 않았지만 89년과 91년을 뼛속 깊이 상처로 자랑으로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겐 미래가 없다고 한다. 전교조로 인한 상처까지도 사랑으로 기억하기 위해 우리는 전교조의 역사를 기억해야 한다. (※91년은 3월 개구리 소년 실종사건, 낙동강 페놀유출 사건이 있었으며, 30년 만에 부활한 지방자치 선거가 있었다.)

임성무 전교조 대구지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