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1년은 끝나지 않았다] 지방자치 부활 30년을 돌아보는 소고 ①

1.
1948년 지방자치 실시로부터는 72년이 지났다. 한국전쟁 와중에서도 실시되었던 지방자치는 1960년 박정희의 5.16쿠데타로 중단되어 91년까지 31년 동안 명맥이 끊어졌다가 1991년 부활하였다. 재실시 된지도 올해로 30년째다. 필자는 91년 학생 시절에 지방선거를 맞이했고, 이후 지금까지 대구에서 시민운동을 해온 사람으로 직접 겪고 느낀 것을 개인적 관점에서 쓰고자 한다. 따라서 폭이 좁고, 흠이 많은 글일 수 있다는 점 양해 바란다.

돌이켜보면 1991년 전후는 민주주의의 거대한 전환기였다. 국내적으로는 군사독재에서 민주화 시대로의 이행기였으며, 국제적으로는 미국과 소련 중심의 진영 간 냉전이 해체되고 새로운 국제질서가 형성되는 시기였다. 그 속에서 필자를 비롯한 민주화 세력은 사회변혁에 대한 열정과 냉정, 희망과 절망, 위기와 기회를 동시에 대면하며 강렬한 투쟁과 전환을 위한 몸부림을 쳐야 했다.

필자는 1987년 대학 1학년생으로 6월항쟁의 거리를 누비며 군사독재의 호헌을 철폐시키고, 대통령 직선제를 쟁취하는 역사적 승리감을 맛보았다. 7, 8, 9 노동자 대투쟁을 비롯한 민중의 거대한 진출은 무엇이든 이룰 수 있을 것 같았다. 그해 대선에서 야권의 분열로 정권교체를 이루지는 못했지만 사회변혁을 위한 민중의 거대한 물결은 더욱 도도하게 나아갔다. 88년 총선에서 여소야대 정국을 만들었고, 이어 지방자치제 부활을 쟁취하였다. 각계각층에서 민중의 결사체들이 등장하여 세력을 확장했고, 대중운동의 의제도 확장되었으며, 새로운 운동방식을 표방하는 시민단체도 등장하였다. 그러나 90년 2월, 야권의 김영삼이 군사독재 세력과 야합하여 민주자유당을 창당, 집권세력은 민주화의 역사적 흐름에 대대적 반격을 시작했다. 같은 해 3월 군 복무를 마치고 복학했을 땐 반민자당 투쟁이 한껏 고무되어 있었고 필자도 그 흐름 속에서 91년 열사정국이 맞이했다.

그런 중에 실시된 91년 3월 기초의원 선거와 6월 광역의원 선거는 31년 만에 부활된 지방선거이자 민주화 이행의 중대한 요소로 정치적, 역사적 의미가 큰 선거였으나 지방자치의 개념에 익숙하지 못한 국민들의 무관심, 단체장 선거가 빠졌다는 점, 집권세력과 민주세력이 대격돌한 열사정국 등으로 인해 크게 주목받지 못했으며, 3당 합당의 효과와 야권 분열, 집권세력의 민주화 세력 매도 등으로 인해 집권당인 민주자유당의 일방적인 승리로 끝나고 말았다.

▲1952년 초대 대구시의회 개원 기념사진. (사진=대구시의회)

2.
91년 지방자치 부활을 떠올릴 때 흔히들 88년 김대중 총재가 목숨을 건 단식 끝에 쟁취해 낸 것이라고 한다. 그의 공로가 큰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한국 지방자치의 뿌리는 해방 직후 일제가 물러난 자리에서 인민의 자치로 독립적 민주국가를 꿈꾸었던 인민위원회였으며, 이를 무력화시킨 것은 이승만과 미군정이었고, 파괴한 것은 박정희 군사독재였다. 이를 부활시킨 것 역시 6월항쟁으로 군사독재를 종식시키고, 대통령과 국회의원만이 아니라 지방의 권력도 주민이 뽑고 통제하겠다는 민중의 힘을 거스를 수 없었기 때문임은 분명했다.

그럼에도 5.16쿠데타 이후 잃어버린 31년 동안 중앙집권적 통치질서에 익숙해진 국민들은 지방자치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이 떨어졌던 것은 사실이며, 같은 흐름에서 중앙권력 교체에 집중하며 거리의 반독재 민주화 투쟁에 주력했던 민주화 운동 세력 역시 지방자치제 부활의 정치적 의미를 간과한 한계도 인정해야 한다. 물론 시작부터 지방자치를 반대하고 때마다 변화를 가로막았던 보수집권세력은 물론이고, 지방자치를 중앙정치의 종속물, 지역패권의 희생양으로 삼으며 기회주의적으로 분열했던 중도개혁세력의 문제는 더할 나위가 없다.

우둔했던 필자도 뒤늦게 87년 이후 급격하게 변한 국내 정치정세 변동의 의미, 사회주의 붕괴의 원인, 국제 냉전질서의 해체가 갖는 함의를 살펴보기 시작했다. 91년 투쟁의 좌절과 맞물려 상당한 혼란 속에서 운동의 전환을 모색하고, 새로운 학생운동을 실험하며 다양한 논쟁과 갈등을 겪었는데 지금 생각해봐도 매우 괴로운 시기였다. 그러나 그런 중에도 지방자치 부활이 지닌 시대적 의미에 대해서는 별로 고민하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91년 정국을 통과한 세대들은 90년대 초·중반 사회에 진출하면서 91년 투쟁의 좌절을 딛고, 오히려 깊이 성찰하고 다짐하며 변화된 시대에 발맞추는 새로운 운동을 모색하였다. 봉기전에서 진지전, 대중투쟁과 합법정치의 병행, 정치 민주화와 사회경제 개혁의 병행, 환경·젠더·인권 등 의제의 다변화를 모색했고, 특히 94년 전국동시 지방선거의 의미를 분석하며 중앙권력의 교체만이 아니라 지방권력의 민주화와 풀뿌리 자치를 내걸고 다양한 청년운동, 시민운동을 개척하였다. 물론 지방자치 시대를 더 앞서간 단체들도 있었지만 지금 창립 20~30년이 되는 지역단체들이 이와 유사한 경로를 밟았을 것이다.

▲1991년 재개원한 대구시의회. (사진=대구시의회)

3.
91년 기초, 광역의원 선거, 94년 단체장까지 뽑는 제1회 전국동시 지방선거 이후 2018년 제7회 전국동시 지방선거까지 8번의 지방선거가 실시된 지난 30년, 그 긴 세월과 국민의 높아진 주권의식, 지방분권 요구에 비해 지방자치의 발전은 너무나 더뎠다. 그러나 그동안 많은 변화가 있었던 것 또한 사실이다. 지방자치법, 지방재정법, 공직선거법 등이 여러 차례 개정되면서 지방자치단체의 권한과 역할이 높아졌고, 지방분권과 균형발전 정책이 다양하게 시도되었다. 지방선거의 정치적 위상과 영향도 높아졌으며, 작년 말에는 32년만에 지방자치법이 전부개정되어 지방자치의 위상과 권한, 역할이 더욱 높아졌다.

물론 자치입법권 부재 등 제도적 한계로 인해 국회 입법의 틀에 갇히고, 정부 정책을 따라가기 바쁜 형국이지만 때로 중앙권력이 보수화되거나 정쟁으로 인해 개혁이 지체될 때 지방이 선도한 정보공개, 부패방지, 무상급식, 청년수당, 사회적 경제와 마을 자치, 기본소득 등 개혁정책들이 전국화되고 중앙정치의 변화를 이끈 사례들도 적지 않다. 지방정치에서 검증받고 두각을 나타낸 사람이 국회의원이나 장관, 대통령 등 중앙정치의 리더가 되는 과정도 중요한 정치모델이 되었다.

지역운동 단체의 활동도 왕성해지고 영향력도 높아졌다. 지역운동 단체는 각종 비판 성명과 규탄 기자회견, 정보공개청구 및 감사청구, 공익 고발 등을 통해 정당권력을 중심으로 한 지방권력의 부패방지, 감시 활동을 일상적으로 전개하였다. 선거 시기에는 투표참여운동, 후보자 정보공개와 부적격후보 낙천낙선촉구활동, 정책공약 평가, 제안, 채택 활동을 비롯해 기초의회 4인선거구 확대, 연동형비례대표제 도입 등 선거제도 개혁운동 등을 전개했으며, 때때로 후보자 양성교육과 기초의회, 교육감 선거를 중심으로 후보출마 당선 운동을 하기도 하였다. 전국을 뒤흔든 중요한 시국사건 때마다 대규모의 대중집회와 촛불운동을 주도하는 등 중앙정치의 개혁과 정권교체를 위한 시민정치 활동 또한 왕성하게 전개하였다.

이런 활동들을 통해 비리공무원 징계와 부패정치인 퇴출, 예산낭비 방지와 참여의 제도화, 공직사회의 투명성과 윤리의식 제고, 시민의 주권의식 제고와 민주주의 직접행동을 확산시켰다. 다양한 이슈, 의제의 실현을 위해 조례, 정책, 예산을 제도화하고, 읍면동 단위부터 광역시까지 아우르는 다양한 시민운동 주체의 육성과 활동도 확산시켰다. 이뿐 아니라 시민정치를 통해 성장한 이들이 제도정치에 참여하여 변화를 이끌기도 하였고, 주요 시국이슈의 전국적 전개를 통해 중앙정치 개혁에 큰 영향을 미치기도 하였다. (계속)

강금수 대구참여연대 사무처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