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듯 같은 역사] 1616년, 예안현감 이계지의 세금 운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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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난히 인물, 특히 지방관들에 대한 평가가 박했던 김령金坽(1577~1641)에게도 1616년 예안현감 이계지李繼祉는 특별했다. 그가 평생에 걸쳐 쓴 계암일록에서 지방관들에 대한 평가는 유난히 혹독한데, 이계지에 대해서만큼은 “청렴하고 근실하며 노력과 올곧음이 처음부터 끝까지 한결같다”라고 평가했다. 아마 그가 살았던 예안과 경상감영 지방관들을 통틀어도 그 인생에서 얼마 되지 않은 어진 수령이었던 듯하다. 이와 같은 평가는 평생 유학자로 살면서 유학적인 수사修辭로 표현된 것이지만, 실제 김령은 인물 됨됨이를 넘어 그것이 백성들의 삶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지 함께 평가했다.

이계지에 대한 이 같은 김령의 평가는 당시 안동부사였던 박동선朴東善과 판관 임희지任羲之에 대한 혹평에서 시작되었다. 둘의 성정은 탐욕과 포악함을 다스리지 못했고, 이로 인해 안동의 관고官庫가 텅텅 비어 날이 갈수록 형편없어졌다. 염치가 모자란 것도 문제였지만, 더 중요한 것은 지방을 다스리는 기본 재주도 갖추지 못한 게 문제였다. 안동부의 관고가 비는 것은 두 사람의 탐욕과 포악 때문인데, 이를 통해 백성들이 직접적으로 피해를 입고 있는 상황을 그렸다. 다스리는 자가 관고를 비게 만들면, 그것을 채워야 하는 것은 결국 백성들이기 때문이다. 탐욕과 포악이 단순한 개개인의 인물 됨됨이의 문제가 아니라, 수령으로서의 능력으로 직접 연결된다는 말이다.

이 때문에 김령의 이계지에 대한 평가에서 그가 눈여겨 본 것은 풍족한 예안현 관고였다. 김령에 따르면, 예안현의 관고는 물품이 가득하여 쓰고도 남을 정도였다고 한다. 특히 세금 운영에 대한 상황을 잘 보여주는 물품이 바로 벌꿀이었다. 벌꿀은 그것을 채취할 수 있는 특수성으로 인해 이를 생산할 수 있는 정역호定役戶(특정 공물 전문 생산자들로, 이들의 경우 자기 생산품만을 세금으로 내고 나머지 세금은 면제를 받는다)에서만 거둘 수 있었다. 그런데 벌꿀은 환금성이 좋아 사적으로 활용하면 당연히 모자랄 수밖에 없고, 계획 없이 사용해도 생산 가능한 시기적 한계 때문에 모자라게 된다. 이 때문에 그 이전 수령들은 항상 벌꿀이 부족했다. 사적 편취와 무계획적 세금 운영의 전형이었다는 의미이다.

벌꿀이 모자라면 사용하지 않으면 되는데, 한 번 맛들인 벌꿀의 달콤함은 맛을 넘어 개인 치부의 수단이 되어 멈추는 것도 불가능했다. 벌꿀이 부족하면 다음 해 공납을 미리 거둔다는 명목으로 정역호들을 닦달했고, 정역호는 울며 겨자 먹기로 자신이 사용할 벌꿀마저 바쳐야 했다. 그렇다고 그다음 해가 되면 벌꿀이 넘쳐날 일도 없으니, 정역호 입장에서는 매년 얼마나 많은 벌꿀을 공물로 바쳐야 할지 가늠하기도 힘들었을 것이다. 게다가 관아에서는 정역호만 닦달할 수 없으니, 이를 빌미로 민간에 포나 곡물을 세금으로 부과하기도 했다. 모자란 벌꿀로 예안현 전체가 세금부담에 시달려야 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문제는 벌꿀만이 아니었다. 소금이나 장 역시 그랬다. 장은 지역 사찰들에서 승려들이 부역을 통해 납부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 유교 중심 국가에서 승려들의 신분은 천민과 다를 게 없는 상황이니, 소금과 장의 경우 형식은 세금인데 실제로는 필요할 때마다 꺼내 가는 창고였을 정도였다. 겨울만 되면 한겨울 개울물에 손을 담그고 종이를 만들어 바쳐야 하는 것도 모자라, 소금과 장까지 납부해야 하니 사찰인들 남아 날 리 없었다. 이들 입장에서는 관이 도적떼보다 더 끔찍했을 것이다. 게다가 고을에서 부리는 아전들의 급여가 모자라면 창고에 곡식을 채운다는 명목으로 백성들에게 다시 곡식을 거두어들이니, 예측 가능한 수준에서 세금을 납부한다는 것은 ‘명분’에 불과했다.

이계지는 바로 이러한 상황을 뒤집어 놓았다. 예안현 관고에는 갈무리해 놓은 벌꿀이 넉넉해서, 매년 남은 꿀을 묵힐 정도였다. 항상 오래된 벌꿀을 먼저 사용했고, 그해 생산한 것은 저장해 두고 열지도 않았다. 소금과 장을 보관하고 있는 장독도 스무 개가 넘었는데, 그 속에는 장과 소금이 늘 풍족했다. 예안현 내 어떤 사찰도 이계지가 온 이후 장과 소금 때문에 속앓이하는 일은 없었다. 심지어 관아 곡식 창고마저 넉넉해서 아전들 급료도 걱정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어떤 명목으로도 백성들에게 두 번, 세 번 세를 거두는 경우는 없었다. 오죽하면 사람 평가에 박한 김령 마저 “수 십 년 이래 최고의 수령이다”라고 평가했을까!

이러한 세금 부과 방식이 현대인들 입장에서는 참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장면이리라 생각된다. 그러나 모두 예상할 수 있듯이, 조선시대는 국가가 직접 개인에게 세금을 거둘 수 있을 정도의 시스템을 가지지 못했다. 따라서 국가가 필요로 하는 재정의 양이 정해지면, 국가는 이를 도 팔도에 나누어 부과했다. 그러면 각 도의 관찰사는 부과된 세금에다 감영에서 필요한 비용을 포함해서 다시 각 군현에 나누어 부과했고, 각 군현 역시 거기에 관아 운영비용을 포함해 개인에게 나누어 부과했다. 그러다보니, 감영이나 군현의 관아에서 사용할 비용은 지역 수령의 재량에 따를 수밖에 없었고, 여기에서 수령의 사람 됨됨이는 그대로 백성들의 생활고로 이어졌다. 관아에 필요한 비용이라는 명목으로 사적 편취할 수 있는 길이 그대로 열려 있었기 때문이다.

기록에 따르면 어떤 탐관오리는 돈으로 바꾸기 좋은 종이와 쇠만 지속적으로 거두어 사적으로 편취했고, 또 다른 관리는 관아 창고를 개인 창고처럼 운영하다가 임기가 끝날 때쯤 수많은 수레와 인부까지 동원하는 바람에 구설수에 올랐다. 지방관 입장에서는 세금에 자기 욕심을 조금만 추가하면 누구나 한몫 잡는 게 가능했으니, 이계지처럼 사적 편취만 없어도 관아의 창고는 넘치고 백성들의 부담은 줄었다. 늘 그렇듯, 국가 재정 문제는 대부분 절대 양보다 잘못된 운영에서 발생한다. 물론 현대 사회는 세금 운영자들의 직접적인 사적 편취는 불가능하지만, 여전히 다양한 이유로 옳지 않게 새는 국고의 양이 적지 않다. 한 사람의 지방관이 지역 세금만 잘 운영해도 지역 백성들의 주머니가 든든해지는 법인데, 국가 재정을 잘 운영하면 어떠한 결과가 나올지 굳이 말할 필요가 없는 이유이다.

이상호 한국국학진흥원 책임연구위원

<다른 듯, 같은 역사>는 달라진 시대를 전제하고, 한꺼풀 그들의 삶 속으로 더 들어가서 만나는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사람의 삶은 참 예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네”라는 생각을 기록을 통해 확인하는 시간으로 기획된 것이다. 이 원문은 일기류 기록자료를 가공하여 창작 소재로 제공하는 한국국학진흥원의 ‘스토리 테파마크(http://story.ugyo.net)’에서 제공하는 소재들을 재해석한 것으로, 예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은 우리의 현실들을 확인해 보려 한다. 특히 날짜가 명시적으로 제시된 일기류를 활용하는 만큼, 음력으로 칼럼이 나가는 시기의 기록을 통해 역사의 현장 속으로 들어가 보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