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듯, 같은 역사] 4월, 그 잔인함에 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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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1년, T.S. 엘리엇(Eliot)은 <황무지>라는 시를 시작하면서, “4월은 가장 잔인한 달”이라고 읊었다. 올해가 2021년이니, 이 시가 탄생한 지 꼭 100년 되었다. 그런데 올해 4월 역시 이 시가 발표될 당시와 크게 다르지 않은 ‘잔인한 4월’인 듯하다. 코로나 19가 가져다준 충격은 엘리엇이 겪었던 1차 세계대전만큼이나 컸고, 이로 인한 상실감 역시 그와 비견될 만하다. 2021년 4월 역시 끝없는 추락과 새로운 희망, 그 사이 어디에서 여전히 ‘가장 잔인한 달’이다.

그런데 옛 기록을 보다보면, 이 시가 나오기 100여 년 전, 혹은 200여 년 전으로 돌아가 본들, 잔인한 4월이라는 정의가 뭐 그리 다를까 싶다. 심지어 공간까지 옮겨 조선의 옛날로 돌아간다고 해도 말이다. 물론 조선의 4월은 엘리엇이 읊은 그 4월은 아니다. 음력으로 4월이니, 대부분 조선의 4월은 만물이 피어오르는 5월의 어느 날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4월이라는 이름 탓인지, 조선 사람들에게도 4월의 잔인함은 별로 다르지 않았다.

1617년 음력 4월 22일, 김광계는 해가 저물 무렵 재종숙모의 부고를 들었다. 특별히 아픈 곳 없어 단순하게 지나가는 두통이라고 생각했던 병이다. 그런데 채 열흘도 되지 않아 부고가 날아들었다. 망연자실한 맘을 부여잡고 상황을 확인해 보니, 당홍역이었다. 1613부터 처음 발생한 당홍역은 그 잔인함이 오죽했으면, 중국을 지칭하는 ‘당唐’에 ‘독毒’이라는 글자를 붙여서 당독역이라고도 불렀을까? 1614년 9월, 사랑하는 누이를 당홍역으로 잃었던 김광계는 재종숙모의 부고 앞에서 떨리는 마음을 가눌 길이 없었다. 전염병의 특성상 가까운 이를 떠나보내면서 조문도 하지 못하는 상황이니, 예를 중시했던 조선시대 선비에게 이는 죽음보다 더 큰 아픔이었다.

그러고 보면 4월 전염병은 유난히 잔인했다. 1742년 음력 4월 10일, 대구에 사는 최흥원은 율리에 사는 문중 어르신의 부고를 들었다. 얼마 전 천연두에 걸렸다는 소식을 듣고 병문안도 못하고 발만 동동 굴렀는데, 결국 일어나지 못했다. 장성한 아들을 먼저 보낸 연세 많은 노친들의 곡소리는 천연두를 피해 피우소 생활을 하고 있는 최흥원에게까지 들리는 듯했다. 그나마 병을 떨치고 일어나도 ‘곰보’로 불리는 상흔을 남기는 병인지라 그 절망을 말해 무엇하겠는가만, 곰보가 되는 경우보다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는 경우가 더 많았다. 조선시대 사람들에게 호랑이만큼(호환) 무서운 게 마마(천연두)였던 것이다.

최흥원이 겪은 4월의 전염병은 이게 전부가 아니었다. 1754년 윤4월을 살아가는 최흥에게 있어서 한 달 가까이 지낸 피우소 생활은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져 있었다. 근 한 달 이상을 피해 있었지만, 천연두는 가라앉을 기미가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최대한 사람들을 피해 있어야 하는 상황마저 제법 익숙해 질만도 한데, 전염병의 공포는 늘상 새롭기만 했다. 그 이듬해인 1755년 음력 4월 16일 기록에도, 최흥원은 여전히 피우소 생활을 하고 있었다. 봄부터 전염병이 돌아 집안 계집종들과 조카까지 앓아눕자, 급하게 모친부터 피신시키면서 또다시 피우소 생활을 시작했던 것이다.

4월의 역병이 유난히 잔인한 데는 이유가 있다. 1755년 최흥원은 그나마 급하게 어머니를 모시고 피우소 생활을 시작했지만, 그 아들과 딸은 피우소로 오지도 못했다. 피우소에서 지낼 양식을 구하지 못한 탓이었다. 매년 4월은 최대의 춘궁기였다. 지역 사족인 최흥원의 아들과 딸도 피우소에서 필요한 양식을 마련하기 힘들 정도였으니, 일반 양민들이 어떨지는 굳이 말할 필요가 없을 듯하다. 일반 백성들의 현실은 전염병이 아니라, 기근이 더 큰 문제였다. 전염병의 현장에서조차 먹고 사는 문제부터 강구해야 했던 것이다. 그러고 보면 양민들에게는 피우소마저 일종의 사치였다.

그 처참함은 1621년 음력 4월 14일 기록이 잘 보여준다. 예안현에 있는 역동서원 문 앞은 시장바닥을 방불케 했다. 보리가 나올 때까지 한두 달 남았지만, 지난해 가을걷이 한 식량이 떨어져 굶고 있는 백성들이 지천에 깔렸다. 이를 보다 못한 역동서원에서 예안현 백성들 몇몇이라도 구제하려 서원 곳간을 열었더니, 굶주린 백성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서원 운영을 위해 일부 남겨 두었던 곡식을 모두 풀어도 늘어나는 백성들을 감당하기 힘들었다. 서원 살림살이가 일반 백성들의 살림살이보다야 낫겠지만, 그 역시 금세 동이 나리라는 사실을 백성들인들 모를 리 없을 터였다. 그러나 쌀 한 톨에라도 희망을 걸어야 하는 백성들의 입장은 서원 문 앞을 쉬 떠나지 못했다.

그 몇 해 전인 1616년 음력 4월 12일, 김택룡의 노비인 애남과 춘금이 환곡을 빌리러 갔지만, 정오가 안 되어 빈손으로 돌아왔다. 이틀 뒤인 4월 14일에는 참봉 김효선과 진사 박회무까지 나서서 안동부사 박동선을 만나 환곡을 부탁해 보았지만, 신통치 않았다. 양민들만 문제가 아니었던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지역 사족이었던 김택룡 역시 집안 식솔들을 생각하면 환곡을 받아야만 했다. 집안을 건사해야 하는 큰 어른으로서 체면도 뒤로 한 채 안동부사를 만나기 위한 발걸음을 서둘러야 했다. 김택룡이 환곡을 받아오지 못하면, 노비들을 비롯한 많은 식솔들도 보리 수확기까지 굶어야 했다. 보리 수확을 앞둔 4월은 그야말로 ‘잔인한 달’이었다.

굳이 T.S. 엘리엇의 말을 빌지 않더라도, 조선의 4월은 백성들 편이 아니었다. 4월은 매년 최악의 춘궁기였다. 없는 이들에게는 무사히 넘는 것조차 힘든 고개가 바로 보릿고개였다. 여기에 전염병이 더해지면, 4월의 잔인함은 말로 하기 힘들 정도이다. 매년 4월은 그렇게 잔인한 달로 기록되었다. 2021년 음력 4월, 객관적으로만 보면 조선시대보다야 경제 사정은 낫고, 전염병을 이길 백신도 개발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없는 이들은 전염병의 현장에서조차 먹고 사는 문제를 걱정해야 하고, 언제 지원될지 알 수 없는 나라 곳간만 바라보고 있다. 정치는 여전히 없는 이들의 편이 아니고, 나라 곳간은 종종 엉뚱한 데로 열리고 있다. 매년 4월은 늘 그렇게 잔인하기만 하다.

이상호 한국국학진흥원 책임연구위원

<다른 듯, 같은 역사>는 달라진 시대를 전제하고, 한꺼풀 그들의 삶 속으로 더 들어가서 만나는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사람의 삶은 참 예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네”라는 생각을 기록을 통해 확인하는 시간으로 기획된 것이다. 이 원문은 일기류 기록자료를 가공하여 창작 소재로 제공하는 한국국학진흥원의 ‘스토리 테파마크(http://story.ugyo.net)’에서 제공하는 소재들을 재해석한 것으로, 예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은 우리의 현실들을 확인해 보려 한다. 특히 날짜가 명시적으로 제시된 일기류를 활용하는 만큼, 음력으로 칼럼이 나가는 시기의 기록을 통해 역사의 현장 속으로 들어가 보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