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듯 같은 역사] 1772년, 어느 양반의 재산분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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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72년 음력 6월 29일, 선산(현 경상북도 구미시)에 사는 노철盧은 자신의 죽음을 예감했다. 노환으로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한 지 오래되었는데, 아무래도 이제는 더 버티지 못할 것 같았다. 힘든 몸을 억지로 일으켜 세우고, 머리를 단정하게 빗은 후 의관을 정제했다. 아들 노상추를 불렀다. 이른 아침이지만 식구들을 모으고 먼 친척인 노윤도 부르게 했다. 노상추는 차오르는 눈물을 감출 수 없었다. 아버지의 의중을 분명하게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은 자신마저 침착하지 않으면 누구도 감당할 수 없는 일이었다. 아버지 스스로 의사를 전하실 수 있을 때 가능한 빨리 가족들을 불러 모아야 했다.

식구들 역시 노철의 의중을 알았다. 노철은 자신이 살아 있을 때 반드시 자신의 손으로 마무리해야 할 일들이 있었다. 평생을 좀 더 노력해서 많은 유업을 물려주면 좋겠지만, 지금 이 소망은 더 이상 노철의 것이 아니었다. 이젠 가장으로서 마지막 책임이라도 다해야 했다. 우선 선산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 자녀들이 직접 관리하기 힘든 김산金山(지금의 김천시 지역)·개령開寧(지금의 김천시 개령면 지역)의 논은 그곳에서 가까운 친척 형제와 조카들에게 맡겨, 그곳에서 나오는 곡식으로 선조의 제사 비용을 대게 했다. 그리고 늦게 본 어린 아들 노완복에게는 더 많은 땅을 물려주지 못하는 아쉬움을 담아 도개의 면화밭과 공수포에 있는 밭 30마지기를 배분했다. 아직 어린지라 걱정도 컸지만, 전체 안배를 생각하면 이게 최선이었다.

시집간 딸은 노철에게 아픈 손가락이었다. 청상이 되어 어린 손자를 키우고 있는 딸을 보고 있으면, 쉬 눈을 감을 수도 없었다. 신기에 있는 입석전 30마지기와 일선이 짓고 있는 논 7마지기, 부귀가 짓고 있는 논 5마지기, 그리고 만선이 짓고 있는 면화밭을 딸 앞으로 배분했다. 충분하지는 않겠지만, 마음을 놓을 정도는 되었다. 그리고 일만이 짓고 있는 땅에서 나오는 세는 서모(아버지의 첩)의 생활비로 쓰게 했다. 노상추의 성정으로 보아 서모도 잘 모시겠지만, 이렇게라도 해야 불안해하지 않을 터였다. 아침 댓바람부터 노윤을 부른 이유도 있었다. 비록 서자로 먼 친척뻘이었지만, 늘 집안일을 챙기고 도운 사실을 잊을 수 없었다. 노윤 앞으로는 손바닥만한 밭도 없는데다, 노모를 모시니 늘 생계가 힘들었다. 노윤에게는 논 1마지기 반을 그 모친이 살아계실 동안 경작하도록 하고, 그 이후에는 완복에게 소유권을 넘기게 했다.

남은 재산은 집안의 대를 이어가야 하는 큰 손자 노술증의 몫이었다. 첫째와 둘째가 없는 상황에서 셋째로 태어난 노상추가 장자 역할을 하고 있지만, 노철의 입장에서 집안의 대를 이어가야 하는 것은 큰 손자 몫이었다. 그런 탓에 노상추를 바라보는 노철의 눈에는 미안함과 아쉬움이 가득했다. 양반가에서 잘 나서지 않는 무과武科를 통해서 집안을 일으켜 보겠다는 아들이 기특하기도 했고, 또 그 뒷바라지를 해 줄 수 없는 상황이 미안하기도 했다. 도개의 집과 터전이라도 노상추에게 있으니, 지금은 최선을 다해 무과에 준비하라는 유언밖에는 남길 게 없었다. 부귀가 현재 짓고 있는 면화밭이라도 남긴 게 작은 위안이라면 위안이었다.

노철이 살았던 시대는 영남남인들에게 기회가 박탈된 시기였다. 아무리 노력해도 중앙정계로 나아갈 수 없었던 시기가 길어지면서, 노철은 선대의 유업들을 경영해서 이렇게 물려줄 수 있는 게 최선이었다. 좀 더 나은 환경과 많은 재산을 물려주지 못한 아쉬움은 컸지만, 그래도 하나하나 일일이 챙겨 최소한의 안배는 했다. 집안만을 생각하면 아들과 손자의 비중 가장 커야겠지만, 시집간 딸과 서모, 그리고 먼 친척 노윤도 그에게는 아픈 손가락이었다. 조선 초‧중기와 달리 이 시기가 되면 장자 중심의 상속이 일반화되고, 딸들은 상속 대상에 제외되었다. 그러나 노철의 상속 원칙은 이러한 시류에 있지 않았다. 청상이 된 딸, 자신이 직접 보살펴야 하는 서모, 그리고 평생 감사를 마음에만 묻어 두었던 노윤에게도 일정 정도 분배했던 이유이다. 3일 뒤 노철은 평생의 아쉬움을 뒤로 하고, 그렇게 눈을 감았다.

예나 지금이나 사람 간 분쟁 원인은 대부분 재산이다. 형제나 가족 간 분쟁의 가장 큰 이유 역시 유산 배분 과정에서 발생한다. 재산을 상속할 게 없는 부모가 오히려 형제의 우애를 지킨다는 말도 있을 정도이니, 그 갈등의 정도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이 때문에 유산을 상속해야 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자기 죽음을 준비할 때, 미리 재산 분배에 대한 유언을 작성해서 분란을 방지하려 한다. 그렇게 정리해서 분쟁이 없도록 하는 것까지가 자신의 책임이기도 하다. 이는 조선시대라고 특별히 다르지도 않았고, 다를 이유도 없다. 이 때문에 조선시대 고문서 가운데에는 ‘분깃문기’와 ‘화회문기’로 분류되는 문서들이 많이 전해진다.

분깃문기는 지금 상황처럼 상속하는 사람이 사망하기 전에 미리 재산을 분배하고, 이를 문서화 한 것이다. 상속하려는 사람의 의지대로 작성된 것으로, 상속받는 사람들이 지금의 서명에 해당하는 수결을 해서 상속하는 사람의 의지를 존중하고 따르겠다는 의미를 담았다. 이에 비해 화회문기는 여러 이유로 인해 상속하려는 사람이 미리 재산 분배하지 못하고 사망한 경우, 상속을 받을 사람들이 논의해서 그 결과를 문서로 작성한 것이다. 이 문서에는 비록 상속자가 자기 의중을 표현하지는 못했지만, 상속 받는 사람들 입장에서 상속하려는 사람의 의지를 받들어 합의를 통해 분배하겠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더불어 이를 문서화함으로써, 아무리 가족이라고 해도 재산 상속의 문제만큼은 확실한 정리가 필요하다는 사실도 보여주었다.

재산에 대한 욕망은 제어할 수 없는 인간의 근본 욕망이다. 욕망대로만 놓아두면, 형제나 부모도 알아보지 못하는 게 재산에 대한 욕망이다. 게다가 이 욕망은 한계도 없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이 때문에 욕망을 누르고 합의와 동의를 통해 분쟁을 막는 것이 최선이고, 조선시대 유학자들 역시 이를 모르지 않았다. 우리 시대에도 합의를 이루지 못해 형제나 부모 관계가 원수보다 못해지는 경우를 종종 접하게 된다. 조선시대 역시 항상 이러한 결론만 만든 것은 아니겠지만, 왜 이러한 문서를 만들면서 동의와 합의를 끌어내려 했는지를 다시 새겨보아야 하는 이유이다.

이상호 한국국학진흥원 책임연구위원

<다른 듯, 같은 역사>는 달라진 시대를 전제하고, 한꺼풀 그들의 삶 속으로 더 들어가서 만나는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사람의 삶은 참 예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네”라는 생각을 기록을 통해 확인하는 시간으로 기획된 것이다. 이 원문은 일기류 기록자료를 가공하여 창작 소재로 제공하는 한국국학진흥원의 ‘스토리 테파마크(http://story.ugyo.net)’에서 제공하는 소재들을 재해석한 것으로, 예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은 우리의 현실들을 확인해 보려 한다. 특히 날짜가 명시적으로 제시된 일기류를 활용하는 만큼, 음력으로 칼럼이 나가는 시기의 기록을 통해 역사의 현장 속으로 들어가 보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