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듯, 같은 역사] 투장偸葬이라는 그릇된 욕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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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의 선비 조원열趙元烈은 1803년부터 시작된 임천서당 중건을 담당한 회원이었다. 김성일金誠一(호는 鶴峯, 1538~1593)선생을 배향했던 임천서원의 기능이 오래 정지되자, 이를 안타깝게 생각했던 영남 유림들에 의해 서당 기능만이라도 살리기로 했다. 조원열 역시 의무감을 가지고 이 일에 참여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그에게는 임천서당 복설보다 더 심각한 문제가 발생했다. 조원열의 조상을 모신 산에 누군가 몰래 장사를 지냈던 것이다. 최근 묘뿐만 아니라, 그 이전 것까지 합하면, 총 3기의 무덤이 몰래 만들어져 있었다. ‘장지葬地를 훔치는[偸] 투장偸葬’이었다.

1806년 음력 5월 4일, 임천서당 중건 현장에 몇몇 회원들이 모여 단오를 앞두고 간단한 음식과 술을 나누고 있었다. 그런데 두건까지 벗어젖힌 장정이 급하게 하회 서방님을 찾았다. 하회(경상북도 안동시 풍천면 소재)에 사는 김명운金明運을 찾는 듯했는데, 이날 김명운은 자리를 함께하지 못했다. 그곳에 모인 회원들 가운데 성격 급한 이들이 무슨 일인지를 추궁해 묻자, 임천서당 회원인 조원열에 대한 안타까운 사연이 알려 주었다.

당시 조원열은 투장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었다. 투장 사건이 나면 지역 현감이나 도의 수장인 감사에게 소장을 내고 소송을 통해 판결을 받아야 했다. 아무리 자신의 산에 묘를 쓴 것이라고 해도, 관아의 허가 없이 임의로 묘를 파낼 수는 없었다. 사사롭게 묘를 훼손하면 벌도 엄했다. 소장을 내고, 그 산이 자기 문중 산임을 증명하기 위한 증명서를 모으고 주위 사람들 증언도 확보해야 했다. 지금도 소송은 여간 번다한 일이 아닌 것처럼, 조선시대 역시 그랬다.

투장을 해결하려는 그의 의지는 한시라도 빨리 부모님의 음택을 평안하게 해 드리려는 마음과 연결되어 있다. 그런데 성급한 마음은 사고를 부르기 마련이다. 기록이 있기 하루 전 음력 5월 3일, 조원열은 바쁜 걸음을 재촉하다가 그만 물에 빠져 사망하는 사고를 당했다. 실족사였다. 투장문제로 동분서주하다가, 결국 사고까지 당했던 것이다. 죽은 이는 죽은 이대로 그 억울함에 어찌 눈을 감을까 싶고, 살아 있는 가족들에는 마른하늘에서 떨어진 날벼락과 다를 바 없는 일이다. 투장한 이들은 조원열의 가족들에게 용서받을 수 없는 불구대천不俱戴天의 원수가 되었다.

조원열에게는 하회에서 시집 온 며느리가 있었다. 결혼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이른 나이에 아들이 죽은 탓에, 그녀는 청상으로 집안을 지키고 있었다. 5월 3일, 그녀는 하루 종일 물에 빠진 시아버지 시신을 수습해야 했다. 그리고 이 기록이 있던 5월 4일, 마음을 독하게 먹고 투장한 무덤을 찾았다. 억울함과 분노를 담아 최근에 투장한 무덤을 시작으로, 오래된 무덤 2기까지 모두 파헤쳤다. 아마 원수의 가슴을 찌르는 심정이었을 터였다. 그리고 관아를 찾아 자신을 고발했다. 조원열의 집 종이 임천서당 공사 현장에서 그녀의 사촌 오빠 김명운을 바삐 찾았던 이유이다.

조선시대 투장은 매우 흔한 일이다. 조선시대 소송의 약 70%정도는 산을 두고 이루어지는 산송山訟이었고, 산송의 대부분은 투장으로 인한 것이었다. 화장이 일반화되고, 산의 소유가 확실한 현대의 관점에서는 쉽게 이해되지 않는 대목이다. 그러나 조선시대 일기를 보면 대부분의 기록에서 투장은 흔하게 찾을 수 있을 정도였다. 남의 산이나 묫자리에 묘를 쓰는 일이 비일비재했고, 그만큼 심각한 사회문제였다는 말이기도 하다.

투장의 이유는 주로 풍수지리 때문이다. 조선시대 사람들은 사후에 묻히게 되는 묘를 음택陰宅이라고 불렀다. 살아서 자신이 거처하는 곳을 양택陽宅으로 부르면서, 죽음과 삶을 음양으로 이해했다. 풍수지리에 따라 살기 좋은 양택이 중요한 것처럼, 죽은 이후에 묻히게 되는 음택 역시 매우 중요하게 받아들여졌다. 특히 음택은 후손 문제와 관계되어 있었다. 음택을 잘 선택하면 후손들이 잘되고 복을 받는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러한 생각을 거꾸로 보면, 출세한 집안은 조상의 음택을 잘 선택했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생각은 가문의 번영을 위해 현재 성공한 집안의 묫자리에 장사지내고 싶은 욕망으로 이어졌다. 2018년 개봉한 영화 <명당>에서는 왕의 묫자리까지 투장하는데, 그만큼 명당을 차지하기 위한 경쟁이 치열했음을 알 수 있다. 이 때문에 지역 유력 사족가는 풍수가 좋은 묫자리를 강제로 빼앗기도 했고, 힘없는 양인들은 성공한 집안의 묫자리에 몰래 묘를 쓰기도 했다. 풍수가 좋은 산이나 출세한 집안의 묫자리는 투장하는 사람들로 인해 산을 지키는 사람을 따로 두어야 했을 정도였다. 묫자리를 통해 집안을 일으켜 보고 싶은 그릇된 욕망이 투장으로 드러났던 것이다.

여론은 며느리 편이었다. 조원열의 억울한 죽음도 있었고, 시아버지의 죽음을 보다 못해 투장한 묘를 파헤친 것은 효도와 정열貞烈로 인정받았다. 한 집안의 며느리로서 시아버지의 억울함을 드러내기 위한 행동으로 이해되어, 효부라는 칭송도 받았다. 그러나 관아 입장은 그렇지 않았다. 조원열이 소장을 접수하고 소송이 진행되려다가 발생한 사고였지만, 며느리의 행동에 대해서는 사사로이 남의 무덤을 파헤치는 일반 사건과 동일하게 규정했다. 남의 묘를 사사롭게 훼손하는 행동을 문화적으로 용인하지 않았던 관례가 적용되었던 것이다.

각 시대는 그 시대만이 가진 욕망들이 존재하기 마련이고, 그 욕망을 이루기 위한 방법 역시 다양하다. 조선이라는 강력한 신분제 사회를 살았던 사람들은 투장을 통해 신분을 바꾸고 출세하고 싶은 욕망을 투영시켰다. 어쩌면 투장을 하는 이나 투장을 막는 이 모두 동일한 욕망에 근거했던 것이다. 시대는 변했고, 더 이상 우리 시대는 투장을 통해 자신의 욕망을 이룰 수 있는 사회는 아니다. 그러나 투장까지 행하게 했던 욕망은 예나 지금이나 동일하고, 그래서 ‘투장’의 자리에는 새로운 형태의 다양한 경쟁들이 현대인의 욕망을 투영시키는 기저로 작용하고 있다.

이상호 한국국학진흥원 책임연구위원

<다른 듯, 같은 역사>는 달라진 시대를 전제하고, 한꺼풀 그들의 삶 속으로 더 들어가서 만나는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사람의 삶은 참 예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네”라는 생각을 기록을 통해 확인하는 시간으로 기획된 것이다. 이 원문은 일기류 기록자료를 가공하여 창작 소재로 제공하는 한국국학진흥원의 ‘스토리 테파마크(http://story.ugyo.net)’에서 제공하는 소재들을 재해석한 것으로, 예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은 우리의 현실들을 확인해 보려 한다. 특히 날짜가 명시적으로 제시된 일기류를 활용하는 만큼, 음력으로 칼럼이 나가는 시기의 기록을 통해 역사의 현장 속으로 들어가 보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