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선우] 샤를리즈 테론의 진명목 ‘아토믹 블론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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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배역을 맡아도 배역 앞에 자신만의 색을 입히는 배우가 있는가 하면, 다른 역할을 맡아도 배역에 녹아드는 배우도 있다. 배우 샤를리즈 테론은 전자다. 그는 연기의 스펙트럼이 넓은 배우다. 어떤 배역을 맡아도 자신만의 강렬한 이미지를 덧씌운다. 어떤 영화로든 테론을 만나본 이들은 그의 연기를 폄훼하지 않는다. 이유는 기복 없이 다양한 인물을 매력적으로 연기해내는 그의 노력이다. 조연인데 주연보다 강한 존재감을 드러낸다.

테론은 <몬스터(2003년)>에서 연쇄살인범이나 퇴물 매춘부 아일린 워노스를 완벽하게 표현했다. <스노우 화이트 앤 더 헌츠맨(2012년)과 <헌츠맨: 윈터스 워(2016년)>에서는 이블 퀸을 카리스마 넘치는 모습으로 연기해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주인공 스노우 화이트를 연기한 크리스틴 스튜어트보다 팬이 더 많았다. <매드 맥스: 분노의 도로(2015년)>에서는 퓨리오사를 매력적으로 연기해 극찬을 받았다. 주인공 맥스를 연기한 연기파 배우 톰 하디보다 더 주목받았다.

테론은 <밀리언 웨이즈(2014년)>와 <롱 샷(2019년)> 등 코미디물에서도 안정적인 연기를 선보였다. 그가 흥행을 노린 상업영화보다는 사회적 메시지가 짙은 영화를 많이 찍었는데도, 배역을 자신만의 색으로 표현해 호평을 얻었다. 영화는 망했을지라도 그의 연기를 지적하는 이는 없었다.

물론 관중의 시선을 끄는 요인은 테론의 빼어난 미모와 늘씬한 몸매지만, 가장 큰 요인은 테론만의 짙은 카리스마다. 이 카리스마는 연기에 최선을 다하는 노력의 산물이다. 인물이 처한 상황을 자신의 말투와 몸짓으로 번역하니까 표정연기의 색깔이 선명한 것이다.

<아토믹 블론드>는 테론의 매력으로 가득 찬 영화다. 줄거리는 익숙하고 개연성은 다소 떨어지는 편이다. 아군과 적군이 명확히 드러나 있지 않고, 반전을 거듭하는 이야기는 실타래처럼 꼬여있지만, 다음 장면의 전개가 어떻게 흘러갈지 예상할 수 있는 수준이다. 하지만 <아토믹 블론드>는 매력적이다. 온전히 테론의 압도적인 존재감 때문이다.

영화 배경은 냉전이 끝나가던 1989년 독일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기 바로 전날이다. 영국 MI6 첩보원 로레인 브로튼(샤를리즈 테론)은 전 세계 비밀요원 명단이 담긴 마이크로필름을 타국 정보요원보다 먼저 회수해 오라는 명령을 받고 베를린에 잠입한다.

앞서 이 마이크로필름은 MI6 첩보원이 손에 넣었지만, 이중스파이에게 살해당한다. 로레인은 이중스파이도 색출해야 한다. 로레인은 낯선 베를린에서 MI6 베를린 지부장 퍼시벌(제임스 맥어보이)의 도움으로 임무 수행에 나선다. 하지만 퍼시벌은 수상쩍은 행동을 벌인다.

로레인은 적과 아군이 구분되지 않는 베를린에서 자신의 판단을 신뢰하지 않는 상부의 냉대를 받으며 임무를 수행한다. 이 과정에서 몇 번의 배신, 좌절을 겪는다. 그는 끝내 임무를 완수하지만 그게 상부가 원한 그림은 아니다. 이 때문에 영국으로 돌아와 불신이 깊은 상부로부터 추궁을 당한다. 스파이물에서 클리셰처럼 반복돼 온 이야기다.

뻔한 전개의 영화가 호평을 얻을 수 있는 건 테론의 액션이 큰몫을 차지한다. 테론은 상처투성이 몸을 화려한 옷으로 감춘 채 남성들과 처절한 격투를 벌인다. 총을 쏘고 칼을 휘두르다가 피범벅이 돼 맨손 격투를 벌이기도 한다. 덩치 큰 남성 여럿을 혼자 상대하면서도 억지는 느껴지지 않는다.

<아토믹 블론드>의 백미는 건물계단에서 자신보다 덩치 큰 두 명의 무장 괴한과 격투를 벌이는 장면이다. 롱테이크로 촬영됐는데 <존 윅>을 잇는 액션 명장면으로 꼽힌다. 액션 장르에 특화된 데이빗 리치 감독이 연출을 맡았다고 하지만, 각종 격투술은 물론 총격신, 자동차 추격신 등 강도 높은 액션을 직접 소화해낸 테론의 공도 크다.

<아토믹 블론드>가 전 세계 액션영화 역사에서 한 획을 그은 <존 윅>에 비견되는 까닭은 테론이 여성이라서가 아니다. 호평을 얻은 건 테론이 역량을 키우고 실력을 갖췄기 때문이다. 페미니스트 샤를리즈 테론은 ‘섹시하다’는 말은 고맙게 받아들여도, ‘여성스럽다’는 말은 좋아하지 않는다고 한다. 여성에게 심어진 ‘사회적 편견’을 싫어하기 때문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아버지로부터 학대를 당했다. 테론의 엄마는 테론이 15살이 되던 해에 남편을 살해했다. 여성이 억압된 세상에서 해방되기를 바란다는 테론의 소망은 가정의 폭력에서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테론은 어릴 적 트라우마를 견뎌내고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미국으로 건너와 홀로 배우생활을 시작했다. 한동안 단역을 전전했다. 기회의 땅이라고 불리는 낯선 땅에서 아는 사람도 없고 경제적으로 넉넉하지 않았다. 하지만 좌절하지 않고 오디션장을 찾았다. 배역의 비중은 높아졌지만, 늘 누군가의 여자친구나 조력자에 그쳤다.

그런 그가 전 세계적 명성을 얻은 건 <몬스터(2003년)>에 출연하면서다. 미국의 최초 여성 연쇄살인범을 연기한 테론은 살을 찌우고 틀니를 꼈다. 분장으로 피부를 망가트렸다. 배역을 연기하기 위해 실존인물과 수백 통의 편지를 주고받았다. 연기를 잘하기 위해 끊임없이 담금질한 끝에 호평을 얻을 수 있었다. 그런 노력이 없었다면 ‘외적으로 예쁜 여배우’로 남았을 것이다. 때문에 “여성도 남성만큼 복잡하고 흥미로운 존재라는 걸 이해하고 보여줬다”는 그의 말에 공감이 간다. 세상이 불공평하다는 불평이 아니라 자신의 능력을 노력으로 입증하기 때문이다. 테론 같은, 다양한 여성의 모습을 보고 싶다.

손선우 전 영남일보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