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선우] ‘킹메이커’, 유권자가 짊어져야 하는 또 다른 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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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부자들(2015년)>의 대사가 국민적 공분을 일으킨 적 있다. 영화 개봉 이듬해 교육부 정책기획관이 “민중은 개돼지로 취급하면 된다. 먹고살게만 해주면 된다”고 말한 게 언론에 보도되면서다. 결국 그는 파면됐고 법적 소송을 벌였다. 끝내 복직됐지만 강등됐다.

2017년에는 지역에 수해가 났는데도 외유성 유럽 여행에서 돌아오지 않은 도의원이 비난 여론이 들끓자 국민을 레밍(집단 익사하는 설치류)에 비유해 자유한국당(옛 국민의힘)에서 제명됐다. 그는 한동안 정치활동을 하지 않았으나, 지난해 말 국민의힘에 복당했다. 둘의 공통점은 국민을 우습게 본 게 밝혀져 지탄을 받았다는 것이다. 이들은 해고당하거나 정치생명이 끝난 것처럼 보였으나, 국민 관심이 사그라들자 지위를 회복했다.

대중은 쉽게 분노하고 그 분노는 쉽게 꺼진다. 분노는 횃불처럼 활활 타오르고 들불처럼 빨리 번진다. 거친 비바람에도 꺼지지 않을 것처럼 보이지만, 굳이 진화에 나서지 않아도 어느 순간 잊힌 듯 사그라든다. 분노를 꺼트리는 소화기는 분노를 부르는 또 다른 발화요인이다. 논란이 또 다른 논란으로 잊히는 방식은 오랫동안 봐왔다. 귀신에 홀리기라도 한 듯 관심은 옮겨가고, 분노도 다른 곳을 향한다.

대중의 분노와 망각의 최대 수혜자는 정치인이다. <내부자들>에서 조국일보 주필 이강희(백윤식)는 말한다. “적당히 짖어대다가 알아서 조용해질 겁니다.” 현실도 그렇다. 고(故) 김영삼 전 대통령은 이렇게 말했다. “정치인은 신문 부고란 빼고는 어떤 기사든 나가는 게 좋다.”

<킹메이커>에서 실존인물 엄창록을 모티브로 삼은 서창대(이선균)는 기상천외한 방법으로 상대편을 깎아내리고, 매번 낙선하던 신민당 김운범(설경구) 후보를 당선시킨다. 그의 전술은 정당하지 않고 수단은 옳지 않다. 하지만 운범은 여전히 창대를 참모로 둔다. 자본과 권력으로 대통령직을 유지하는 박 대통령(김종수)에 맞서려면 창대의 비겁한 전술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운범이 대선 후보가 된 뒤 둘은 마찰을 빚고 갈라선다. 1971년 제7대 대통령 선거에서 박 대통령이 당선된 데 지대한 영향을 끼친 ‘지역감정’이 생겨난 대목이다.

영화는 실화를 고증하면서도 고(故) 김대중 전 대통령과 엄창록 사이 갈등은 상상을 가미했다. 엄창록에 대해 알려진 게 적어서다. 배경은 1960년대로 꾸몄지만, 인물의 면면은 현대적이다. 배우들의 말투, 억양이 세련된 탓이다.

대선을 앞두고 <킹메이커>에 관심이 쏠린다. 소재가 선거판인데다 실존 정치인을 다뤘기 때문이다. 영화는 특정 정치인을 영웅화하거나, 개인의 정치적 신념을 내세우지도 않는다. 정치인의 이데올로기, 욕망, 갈등을 직접 파고들기 보다는 목적과 수단의 정당성에 대해 관객에게 질문을 던지는 모양새다.

선거철이 되면 늘 ‘투표는 민주주의의 꽃’이라는 캐치 프레이즈가 나돈다. 맞는 말이지만 투표가 국민이 해야 할 역할의 전부는 아니다. “국민을 위해~”, “봉사할 수 있는 기회로 알고~”, “현 정권을 심판하기 위해~” 정치인들의 변(辯)을 곧이곧대로 믿는 국민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저 당선을 위한, 진심이 아닌, 교묘하게 표심을 얻기 위한 언사라는 걸 우리는 잘 안다. 선거철에만 소통하고 섬기겠다고 떠들다가 막상 당선되면 선거철의 외침을 잊는 정치인들을 많이 봐왔다.

깨끗한 정치인은 없다. 순수한 목적을 품고 선거판에 뛰어들었어도 승자독식의 선거 구도에서 정치인은 점차 변해간다. 아무리 잘나도 혼자선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선거를 치르기 위해선 많은 돈이 든다. 진정성을 담은 공약보다 표심을 얻을 수 있는 선심성 공약에 끌린다. 당선되면 자신을 도운 이들에게 보은해야 한다. 처음에는 인사치레에 가까운 청탁과 대가가 오가지만 어느 순간 유착의 늪에 빠지게 된다. 순수한 정의감과 사명감을 안고 정치에 입문한 이가 정치꾼으로 변해가는 과정이다. 이를 거치지 않는 정치인은 단 한 명도 없을 것이다.

대선이 한 달도 채 남지 않았다. 이번에도 정책 경쟁은 사라지고 후보자의 신변과 실언만 부각된다. 누가 당선되느냐보다 당선된 이가 정치의 본질을 제대로 행하는 지 살피는 게 중요하다. 그건 유권자가 짊어져야 하는 또 다른 무거운 짐이다.

손선우 전 영남일보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