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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대재해처벌법이 시행된 2022년 1월 26일부터 한 달 동안 49명의 노동자가 사망했다. 일하다가 사고로 죽지 않도록 하라는 국가의 신호는 지난 2월 중대재해처벌법 시행 이틀 만에 삼표산업 산재 사망 사고로 깨졌다. 하루 2명 꼴로 산재 사망 사고가 발생하는 한국 사회는 정말 변화할 수 있을까.

“‘사고 사망 노동자’ A 씨, 우리 아버지 전수권입니다”
② 대구경북 지역 산재 사망 판결, 실형 선고는 단 3.5%
③ 중대재해처벌법 탄생 약사···반복된 참사의 기록
④ 퇴직까지 산재 숨긴 포스코 노동자의 후회
⑤ 잘나가던 불로반점 사장님, 가게 문 닫은 사연
⑥’ 살아남은 자의 슬픔’ 산재 부상, “통합 체계 필요”

중대재해처벌법이 시행된 지난 1월 즈음. 산업재해 사고가 자주 일어나는 업계에는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지역 한 대기업에서는 현장 관리자들이 야근과 주말 출근을 마다치 않고 현장 안전 점검에 나섰다. 첫 번째 중대재해처벌법 적용 기업이 될 수는 없다는 각오다. 이 기업의 한 관리자는 감산을 책임질 테니 안전을 먼저 생각하는 문화를 만들자는 전 직원 메일을 발송했다.

“50년 넘게 조업하면서 우리 머릿속에는 생산에 대한 DNA가 저장된 것 같습니다. 알게 모르게 안전보다 생산이 먼저라고 여겼습니다···아침에 출근하면 몇 돈 생산했고, 몇 Charge를 했냐고 묻지 않겠습니다. 대신 야간에 안전이슈는 어떤 것이 있었냐고 묻겠습니다.”

중대재해 사고 시 강화된 처벌에 더해 경영책임자까지 처벌 대상이 확대됐다. 특히 법 적용 이전에는 규모가 크고 중간관리자도 많은 대기업은 재해 시 중간관리자 처벌 선에서 그쳤던 터라, 본격적으로 대비에 나선 분위기다.

현장 분위기가 환기되는 동안 논쟁도 지속됐다. 한편에서는 중대재해처벌법이 법 적용 대상 기업 범위가 한정적이며 처벌 또한 강화해야 한다고 개정안을 냈고, 다른 한편에서는 기업 활동을 위축하는 법이라며 목소리를 높였다.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 후보 당선 직후 경제계와 경제지의 첫 마디는 기소 사례도 한 번 나오지 않은 중대재해처벌법을 완화하라는 요구였다. 제정 이전부터 논란이었던 중대재해처벌법을 두고 제정 이후에도 분분한 대립이 이어졌다.

그러는 동안 대구·경북에서도 중대재해가 이어졌다. 칠곡 금속 제조업체에서는 2021년 2월 용해로 폭발사고가 있었다. 빗물이 고여 있는 폐알루미늄 더미가 용해로에 투입돼 수증기 폭발을 일으켰고, 용해로에서 튀어나온 폐알루미늄 파편에 머리를 맞은 A(47) 씨는 현장에서 사망했고 고열의 알루미늄 용융물을 맞은 B(37) 씨는 얼굴에 2도 화상을 입었다.

2020년 9월 영천에서는 한국철도시설공단이 발주한 교량 공사 현장에서 노동자 A(60) 씨가 탈선방호벽 거푸집을 해체하기 위해 작업구간에 진입하려 탈선방호벽을 타고 넘어가다가 17m 아래 바닥으로 추락해 사망했다. 사고 장소는 위험구간이었으나 안전난간, 진입로 설치가 제대로 되지 않았다.

2020년 9월 대구 북구에서는 건설현장에서 사다리 위에서 철골 접합 작업을 하던 노동자 A(55) 씨가 사다리가 미끄러지면서 3.5m 깊이의 개구부(구멍)으로 떨어져 외상성 뇌출혈로 사망했다. 개구부에는 추락망 등 사고 방지 조치가 되어 있지 않았다.

감지될 기회도 없이 이어지는 노동자 사망 사고. 세 이야기 모두 중대재해처벌법 발의 이후 논란을 거듭하는 도중 일어난 지역 산업재해 사고로, 언론에 나오지 않은 소식이다. 이 짤막한 소식으로는 이들의 이야기를 제대로 전할 수 없다. 죽은 노동자 ‘A’ 씨는 어떤 사람인가. 노동자 A 씨가 죽고 난 후,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 사고로 망자를 보내고 남은 자들의 현실은 어떤 것일까. 또는 일하기 어려울 정도로 심하게 다친 사람의 고통은 어떤 것일까.

“‘사고 사망 노동자’ A 씨, 우리 아버지 전수권입니다”

“(알 수 없음) 님이 나갔습니다.”

가족 단톡방에 뜬 시스템 메시지에 전지훈(36) 씨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단톡방 구성원 수도 4명에서 3명으로 줄었다. 사망신고 후 아버지 업무용 자산은 모두 처분하고서도 휴대전화만큼은 해지하지 못했다. 요금만 내길 꼬박 1년, 아버지의 통신사 회원자격은 강제로 상실됐다.

어머니 얼굴이 먼저 스쳤다. 어머니는 또다시 그날을 떠올릴 터였다. 아버지가 사고로 돌아가시고 나서 어머니는 수면제에 의존하고 있다. 그날, 지훈 씨가 근무하는 학교에서 막 배식을 받았을 때, 전화기 너머로 어머니의 울음소리를 들었다. 울음에 섞인 몇 마디. “아빠”, “머리가”, “끼었다”. 아버지는 퇴직을 하루 앞두고 사고로 돌아가셨다.

▲아버지가 살던 아파트에서 전지훈 씨가 아버지 영정사진을 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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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아버지는 지역 알짜배기 제조업체에 다녔다. 풍족했던 그 시절 지훈 씨 가족은 주말마다 갈비를 먹고 노래방에 갔다. 고등학생이 됐을 때 사정은 달라졌다. IMF를 앞두고 회사가 부도나면서 아버지는 어머니와 함께 프렌차이즈 치킨집을 시작했다. 지훈 씨도 야간자율 학습을 마치고 가게로 가 일을 돕곤 했지만, 가족끼리 보내는 시간은 현격히 줄었다. 아버지 얼굴에는 이전에 보이지 않던 피로가 묻었고, 몸에는 파스가 덕지덕지 붙었다.

다른 사업을 고민하던 아버지는 상사 운영에 도전했다. 1999년 상사 설립 이후 1년 동안은 폐지나 재활용품을 모아 납품하는 고물상으로 운영했다. 그러던 중 친한 지인 소개로 종이박스와 관련 장비를 만드는 W 제조업체와 거래를 시작했다. W 업체에서 나오는 폐지를 매일 제때 처리하면 됐다. 업무량이 많아, 아버지는 W 업체 계약 외에 다른 거래처 일은 모두 정리했다. 형식적으로는 아버지가 파지를 수거해 대금을 W 업체에 지급하는 방식의 거래 관계였지만, W 업체의 생산 체계와 일정에 맞춰 파지를 제때 처리해야 했기 때문에 사실상 하도급 업체나 마찬가지였다. 일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고부터는 업체에서 연장, 휴일 근무를 하면 아버지도 같이 일했고, 퇴근 후에도 호출이 오면 급하게 다시 출근하기 일쑤였다.

W 업체 공장 마당에 설치된 파지 압축기가 말썽이었다. 초기에는 큰 문제가 없었다. 고장도 잘 안 났고, W 업체에서 지게차로 파지를 모아줘 업무량 부담도 크지 않았다. 가끔 압축기가 고장 나면 지게차 운전사가 조치를 거들어주기도 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그리고 업체 사장도 바뀌면서 문제가 시작됐다. 지게차 운전사가 일을 그만뒀고, W 업체는 새로 운전사를 뽑지 않은 채 아버지에게 지게차 운전까지 맡겼다. W 업체에서 배출되는 파지를 어머니와 단둘이서 처리하면서 신체적 부담도 가중됐다.

W 업체에서 일하길 20년. 단톡방에는 압축기가 고장 났다는 아버지의 메시지가 시시콜콜하게 올라왔다. 압축기가 파지를 철사로 조여야 하는데 제대로 되지 않았다. 압축기 수리를 꾸준히 요청했지만 제대로 조치되지 않았고, 철사 두 줄로 묶여 나와야 하는데 한 줄이 꼭 끊어져서 나왔다. 끊어져서 나오는 철사를 손으로 조치하다 보니 손가락 관절염도 생겼다. 매번 임기응변식으로 기계를 손보고, 수작업으로 조치하는 일이 반복됐다.

▲전지훈 씨 가족 단톡방 (사진=전지훈)

“지훈아, 아빠가 요즘 많이 힘들다.”

2020년 들어 아버지가 지훈 씨에게 털어놨다. 힘들다는 이야기는 도통한 적 없었던 아버지라, 지훈 씨는 덜컥 걱정됐다. 아버지는 나이 먹고 아들들에게 손을 벌리고 싶지 않았다면서도, 조만간 일을 정리해야겠다고 말했다. 지훈 씨는 쉬어도 괜찮다고, 은퇴 후에는 당연히 아들 용돈으로 살아야 하는 거라고 했다.

아버지는 지훈 씨에게 서류 파일 하나를 펼쳤다. 거기에는 각종 보험과 증권이 정리돼 있고, 유고 시 지훈 씨가 해야 할 일에 대해 적힌 글도 있었다. 과거 급성심근경색 증상을 겪고 나서 만일에 대비해 정리해 둔 자료라고 했다. 그 서류 파일을 쓸 일이 있을 거라고 진지하게 생각하지는 않았다.

▲전지훈 씨가 아버지 전수권 씨가 남긴 서류파일을 펼쳐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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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7월, 어머니의 전화를 받고 병원으로 향했을 때 코로나 탓에 안으로 들어가지 못한 채 밖에서 울고 있던 어머니를 부축했다. 사고 현장을 확인하고, 수습 절차를 밟다 보니 어느새 상복을 입고 문상객을 맞고 있었다. 두 줄짜리 완장을 찼다. 유족의 통곡과 한 살배기 조카의 울음소리가 뒤섞여 들리는데 영정사진 속 아버지는 말이 없었다.

코로나19 탓에 아버지는 손자를 한번 안아보지도 못했다. 그해 추석에는 가족들이 모여 성묘를 다녀오려 했는데, 아버지는 선산 묘지에 먼저 몸을 뉘었다.

장례식 이틀째, 문상객이 없는 이른 오후 W 업체 사장과 임원들이 장례식장에 찾아왔다. 유가족과 함께 사장과 마주 앉은 자리, 지훈 씨가 말했다.

“아버지 손 다 부서져 가면서. 알고는 계십니까. 알고는 계시냐고요. 철사가, 밴딩이 제대로 안 돼서. 결국에는 아버지가 다 고쳐서 했지 않습니까. 그 철사를 당겨 가면서. 파지를 가져가기로 계약을 한 사람한테 철사 밴딩하고, 기계를 고치게 만들고. 밴딩이 제대로 안 되니까, 박스에 걸려서 안 되니까 직접 그걸 빼려고 통 안에 들어가시고. 거기에 맨날 들어가신다고요. 맨날! 그럴 동안 뭐하셨습니까. 우리 계약이 그 계약이 아니었잖아요. 요청도 많이 했고, 안 된다고도 그렇게 얘기했는데, 그때 뭐하셨습니까!”

사장의 답은 짧았다. “저희들이 사고를 방관하고, 기계를 방치한 것은 아닙니다.”

▲W 업체 사고 현장 CCTV. 전수권 씨 아내가 보이지 않는 전수권 씨를 찾고 있다. (사진=전지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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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사후 경찰 조사도 진척이 있었다. 아버지는 파지 압축기를 정비하다가 압축기에 머리가 끼여 돌아가셨다. 현장 CCTV에는 아버지 모습이 잡히지 않았지만, 사고 한 달 뒤 국과수는 이번 사고에서 아버지 본인의 질병이나 중독에 의한 사고의 가능성은 없는 것으로 판단했다.

1. 두개골 골절 및 뇌파열, 상악 및 하악골 골절, 치명적인 머리 및 얼굴 손상을 확인.
2. 이 건에서 질병이나 중독에 의한 사망의 가능성은 배제할 수 있음.
사인: 머리 및 얼굴 손상으로 판단.

지훈 씨는 사고 원인을 W 업체의 압축기 수리 방기 때문으로 생각됐다. 아버지 일을 자주 도왔던 지훈 씨는 여러 번 수리를 요구했는데도 제대로 조치되지 않아, 결국 아버지가 어쩔 수 없이 기계에 끼인 파지 잔해물을 제거하거나 기계를 정비하는 일까지 도맡아야 했던 상황을 알았다.

기계는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야 바뀌었다. 그해 9월, W 업체는 기존 압축기를 철거하고 새로운 방식의 압축기를 들였다. 파지 통에 레일을 연결해 파지가 자동으로 모였고, 이를 집게차가 수거하면 되는 간편한 방식이다.

왜 진작 바꿔주지 않았을까. 지훈 씨는 생각할수록 분노가 치밀었다. 그렇게 요청해도 바꿔주지 않은 압축기. 이렇게 손쉽게 할 수 있는 일이었나. 적어도 아버지가 끼인 압축기 실린더 부분에 간단한 안전장비라도 설치돼 있었다면 어땠을까. 사고 시 비상 조치할 방법이라도 있었다면. 아니 하루만 더 일찍 일을 정리했다면. 생각이 끝없이 제자리에서 맴돈다.

▲파지 압축기에 전수권 씨가 사고 당시 입고 있었던 옷이 끼어 있다.

후회를 거듭하는 동안 분명해지는 것은 분노였다. 대가를 치러야 한다. 그리고 두 번 다시 같은 일이 반복되면 안 된다. 그 길은 제도 안에서 제대로 된 처벌을 받는 길 외에는 없다. 지훈 씨는 경찰, 검찰, 재판부에 엄벌을 구하는 탄원서를 냈고, 참고인이 아닌 사건 당사자로 참가하기 위해 경찰 인지 사건으로 진행되는 기존 수사와 별도로 W 업체 사장을 고소했다.

자료를 모으고 유사 사건을 조사하면서 자주 보이는 이름들이 있었다. 김용균, 김미숙. 김용균법, 산업안전보건법, 산업안전보건법 양형 기준 개정, 중대재해처벌법. 산업재해 사고에서 사업주와 책임자에 대한 처벌을 강화하는 흐름이 있었고, 지훈 씨는 이에 절실히 동감했다.

W 업체 사장은 수사와 재판 과정에서 아버지와는 형식상 고용 관계나 하도급 계약 관계가 없었다는 점을 활용했다. 압축기는 W 업체가 아버지의 편의를 위해 선의로 설치해준 시설이기 때문에 관리 책임이 없다고 주장했다. 재판장에서도 사장은 자신에게 압축기의 보수나 관리, 안전사고를 방지하기 위한 업무상 주의의무가 없다고 강조했다.

2021년 12월 원심 재판부는 사장에게 징역 10개월과 W 업체에 벌금 200만 원을 선고했다. 하지만 집행을 2년간 유예했다.

집행유예는 받아들일 수 없었다. 사장의 파지 압축 과정을 감독할 업무상 주의 의무가 인정됐고, W 업체 생산 시스템을 볼 때 파지 배출 과정이 생산 작업과 연동된 점에서 압축기가 아버지뿐만 아니라 W 업체의 이익을 위한 장비인 점도 인정됐지만, 이는 당연한 사실을 확인한 것에 불과했다.

2021년 5월, W 업체 재판에 앞서 전라남도에서 아버지 사건과 유사한 재판이 있었고, 여기서 해당 업체 대표는 실형 1년을 선고받고 법정구속 된 사례가 있다. 아버지와 비슷한 시기 유사하게 발생한 사고라 눈여겨본 터였다. 이 업체 소속 노동자 A 씨는 2020년 5월 수지 파쇄기 작동에 문제가 생기자 파쇄기를 끄지 않고 파쇄기 위에서 점검하다가 넘어져 파쇄기에 몸이 끼어 다발성 분쇄손상으로 사망했다.

재판부는 이 업체 대표가 과실을 인정하고 반성하며, 보험 가입, 위로금 공탁에 나선 점을 참작하고도 산재 예방 조치를 하지 않은 점, 결과가 참혹한 점, 과거 산재 사망 사례가 한 건 있었던 점을 고려해 실형을 선고했다. 이 업체 대표는 적어도 잘못을 인정했다는 점이 지훈 씨의 마음을 쓰리게 했다.

선고 결과를 현장에서 들은 지훈 씨는 참혹한 심정으로 피해자 유가족 의견서를 재판부에 제출했다. 스스로 알고 있고, 아버지도 알고 있고, 어머니도 알고 있고, 사장도 알고 있을 그 내용을 확인하는 것에 그쳐서는 안 된다.

피해자 유가족 의견서

■ 사건번호: 2021고단00000
■ 기소된 이유 : 업무상 과실치사, 산업안전보건법 위반
■ 탄원인 성 명 : 전지훈 (망인 故전수권의 장남)

■ 피해자 유가족 의견

· · ·피해자 유가족 입장에서 이번 판결은 아쉬움이 정말 많이 남습니다. 피해자가 사망에 이르렀고 피고인은 안전관리자 지정 및 안전관리를 전혀 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피해자에게 피고인 회사의 소유물인 파지압축기계를 수리, 정비 및 관리의 일체를 떠넘겼는데 집행유예라니 참담한 심정을 이루 말할 수가 없습니다.

광주지방법원에서 저희 아버지와 유사한 안전사고 사망 사건의 인한 판결이 있었는데 1심에서 징역 1년 실형 선고, 2심에서 징역 8개월 실형 선고가 되었습니다. 2심에서 다소 감경이 된 이유는 유가족과 합의를 하여 유가족의 처벌불원 의사를 밝혔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저희 유가족은 합의는 고사하고 반성하는 모습이나 사과의 말 한마디 듣지 못했습니다.

이에 검사님께 항소를 부탁드리고자 합니다. 검사님께서 더 정확히 판단하시고 결정하시겠지만, 유가족 입장에서의 이번 판결은 중대재해처벌법 시행 직전임에도 불구하고 솜방망이 처벌로 사업주의 재해 사고 예방을 위한 안전관리의무의 책임을 회피하게 만드는 판결이라고 생각합니다.

저희 아버지의 죽음이 억울하지 않도록, 앞으로 모든 사업주의 안전관리책임의무를 강화할 수 있도록, 일하다가 사망하여 집에 돌아오지 못하는 분들이 생기지 않도록 하기 위해 한 번만 더 사건을 검토해주시어 항소를 결정해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

2022년 2월, 부모님이 살던 집을 정리하고 홀로 남은 어머니를 지훈 씨가 모시고 왔다. 어머니는 시간이 흘러도 밤잠을 이루기 어렵다. 손주들을 그윽하게 바라보는 어머니 얼굴에 때때로 그늘이 비친다. 일을 그만둔 어머니는 일부러 운동과 산책에 관심을 붙인 듯 했다. 입 짧은 아버지가 맛있다며 두 그릇이나 비운 된장 샤브샤브집이 가깝지만, 그쪽으로는 가고싶지 않다. 산책하다가도 멈춰 벤치에 앉으면 어김없이 남편 생각에 잠긴다. 기억과 추억, 아버지 얼굴과 손주 얼굴도 희미하게, 까마득하게 점멸한다.

이사하는 날, 부모님 결혼식 사진, 지훈 씨와 동생의 어릴 적 사진, 가족과 공유한 오랜 시간이 액자에 담겨 걸려 있다. 액자를 내리며 바라본 아버지 얼굴은 한결같이 편안한 미소를 머금고 있다.

일가족이 함께 다니던 교회에 가, 아버지가 항상 앉던 자리를 바라본다. 목사 단상 앞 두 번째 줄 중앙이 아버지 자리다. 교회는 용서를 가르치지만, 아직은 차마 용서할 수 없다.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다. 상처에 딱지는커녕, 아직 날카로운 것이 뽑히지도 않았다.

‘아버지, 왜 그토록 그 회사를 위해 일하셨습니까? 아버지 돌아가시고 지금 사장이 아버지에게 어떻게 하고 있는지 보고 계십니까? 말로 표현 못할 만큼 아프게 돌아가셨는데 얼마나 억울하십니까? 가족들과 인사 한번 못하시고 이제 막 태어난 손자, 손녀 얼굴도 못 보시고 황망히 가셨으니 이보다 더 억울할 수는 없습니다!’···

▲젊은 시절 전수권 씨의 모습

박중엽 기자
nahollow@newsmi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