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듯 같은 역사] 피혐, 부끄러움을 자기 몫으로 아는 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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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30년 봄은 유난히 재이災異가 많았던 모양이다. 당시 인조는 모든 관료에게 재이의 원인에 대해 듣겠다면서, 구언求言을 요청했다. 재이는 재난을 비롯한 기상‧기후 등의 이상 현상을 지칭하는 말로, 조선은 이를 하늘이 왕에게 내리는 경고로 받아들였다. 재이가 발생하면 조선 조정은 이를 타개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는데, 구언은 그러한 노력의 일환이었다. 하늘의 경고가 잘못된 정사政事로 인한 것이라면, 그 원인을 찾아보겠다는 의도였다. 당연히 잘못된 정사의 원인이 왕 자신일지라도, 그에 대한 비판이라면 달게 받겠다는 의지 역시 함께 담았다. 따라서 구언에 의해 올라오는 상소는 어떠한 내용에도 벌도 내리지 않았으며, 그러한 원칙을 구언하는 왕 역시 확약했다.

그러나 구언에 대한 답일지라도, 금도는 필요했다. 당시 감찰부서인 사헌부 수장이었던 대사헌 정온鄭蘊(호는 桐溪, 1569~1641)은 2년 전에 역모에 연루되어 사사된 인성군을 언급했다. 그의 관작을 회복시키고 절도에 유배된 자녀들을 혼인시켜 대를 잇도록 해야 한다는 내용을 상소에 담았다. 정온이 보기에 재이는 역모에 연루되어 죽은 인성군의 억울함이 하늘에 사무쳐 일어난 결과였다. 상소를 통해 인성군의 죽음은 억울한 죽음이었다는 사실을 밝힌 것으로, 이를 통해 정온은 인성군을 역모에 연루시켜 사사하도록 만든 사람들에 대한 책임도 함께 묻고 있었다. 당연히 조정은 발칵 뒤집혔다. 당시 병조판서 이귀는 당장 정온을 참수해야 한다고 으르렁거렸고, 언관 조위한을 비롯한 몇몇 신하들도 여기에 가세했다.

이 상황에서 입장이 곤혹해진 이들은 대간臺諫들었다. 대간이란 관료에 대한 탄핵과 비판을 맡았던 사간원 관원들과 감찰 업무를 담당했던 사헌부 관원들을 통칭해서 부르는 말이다. 이들은 어떤 문제를 제기할 때 관서 내에서 그 내용을 조율한 이후 한목소리로 해당 문제에 대해 언로를 펴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탄핵과 감찰이라는 권한을 개인이 함부로 남용할 수 없도록 하려는 이유이기도 했고, 탄핵으로부터 감찰로 이어지는 업무를 효율적으로 조절하기 위함이기도 했다. 그런데 당시 대간들의 수장인 대사헌이 개별적으로 역모에 연루된 인성군을 두둔했으니, 대간들 입장에서는 여간 곤혹스러운 상황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구언에 대한 답까지 탄핵하고 처벌한다면, 구언에 대한 왕의 신뢰 추락은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특히 대간들 입장에서는 그들에게 주어진 핵심 무기는 언로의 보장이었다. 그들 역시 정온의 상소가 괴이하고 망측하다면서 이귀 등이 제기한 문제의식은 공유하면서도, 처벌에 대해 주저했던 이유였다. 특히 임금이 관료들의 생각을 먼저 물어 온 상황이었으니, 그에 대한 내용을 가지고 추궁하는 것은 도리가 아니었다. 비록 죄가 크다는 것에 동의해도, 어떠한 이야기라도 죄를 묻지 않겠다고 확언한 상소까지 처벌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사안이 사안인지라, 상소에 대한 책임을 전혀 물지 않을 수도 없었다. 결국 대간들은 정온을 파직시키는 정도로 의견을 조율해서 간언했고, 일은 이렇게 일단락되는 듯했다.

그런데 사간원과 사헌부 관원 모두는 의견을 제시한 이후, 단체로 피혐避嫌을 위해 사직을 청했다. 어중간한 타협과 미봉책으로 자기 책임을 면하기 위한 게 아니라는 점을 보여주기 위함이었지만, 이는 도덕률에 따른다고 자부하는 조선 관료들의 중요 전통이기도 했다. 피혐은 말 그대로 “혐의를 피한다”라는 의미이다. 보통은 공적으로 진행되는 일에 개인이 관계되면, 스스로 거기에서 물러나는 행위를 지칭한다. 예컨대 이조판서는 인사 총괄 책임자인데, 만약 언관들 가운데 누군가 인사가 잘못되었다고 왕에게 보고하면, 이조판서는 그 스스로 이조판서 업무를 중지하고 왕에게 사직을 청했다. 여기에는 두 가지 중요한 의미가 있다. 하나는 탄핵이라는 공적 업무가 공정하게 이루어질 수 있도록 관련자가 그 관련 직위를 내려놓겠다는 의미이며, 동시에 그러한 혐의만으로도 이미 자신의 도덕성을 의심받았으니 그에 대해 반성하겠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또한 현대적 개념인 이해충돌 상황에서도 피혐이 원칙이었다. 예컨대 이황李滉이 단양군수로 재직할 때, 그의 형 이해李瀣가 상급자인 충청도 관찰사가 되자 그는 피혐하여 경상도인 풍기군수가 되었다. 형이기 때문에 동생의 인사고과를 잘 주었다는 오해를 미리 피했다. 이러한 풍조는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18세기 중엽 권상일權相一이 남긴 청대일기靑臺日記에는 아버지가 갑자기 시험관이 되자, 오랫동안 준비한 과거 시험을 치지 못하는 아들의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다. 조금이라도 오해가 발생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면 피하는 관행, 그것이 바로 피혐이었다.

탄핵 및 감찰을 주로 하는 대간들의 경우 역시 조금 다른 방식이기는 해도 엄격하게 피혐하는 전통이 있었다. 앞에서 말했던 것처럼 사간원과 사헌부에서 어떠한 문제에 대해 탄핵과 감찰을 하기 위해서는 관서 내에서 먼저 의견을 조율했다. 그런데 관서 수장인 정온이 그들 전체의 의사와 다른 개인의 주장을 하면 우선 정온은 탄핵과 감찰의 대상이 된다. 따라서 이들은 그 문제에 대해서는 강하게 탄핵해야 했다. 그러나 그들 역시 정온의 지휘를 받았던 사람들로, 정온과의 관계에 대한 의심을 피할 수는 없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들의 탄핵이나 권고는 공정성을 얻기 힘들었다. 따라서 탄핵만큼이나 중요한 게 피혐이었다.

물론 당시 사간원과 사헌부 관원들의 피혐은 정치적 의도가 다분했다. 인성군 문제에 대해 조정의 견해가 옳지 않다고 생각했던 정온의 입장은 결코 논의의 대상조차 되지 못했다. 그러나 비록 타협과 미봉으로 이루어진 간언일지라도 거기에 자신들의 ‘직을 거는’ 피혐은 그 사회가 얼마나 도덕적 잣대에 민감한지를 보여주는 바로미터이다. 이 같은 피혐이 당연시되는 문화가 좀 더 원론적이고 도덕적인 사람을 만났을 때 부끄러움을 자기 몫으로 아는 정치로 이행되고, 이는 도덕에 기반한 수준 높은 정치가 된다. 법적으로 문제가 없다면 도덕적 부끄러움마저 자신의 몫이 아닌 현대의 많은 관료에게는 결코 볼 수 없는 행동이기는 하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