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비053] ‘교환학생’, 블랙코미디로 그려낸 한국대학가의 현주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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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_가진 자의 욕심은 끝이 없어라

근사한 중형차가 대학본부 앞에 멈춘다. 한눈에 딱 봐도 졸부 형색이 역력한 중년남이 대학생 딸과 함께 차에서 내린다. 부녀는 본부 안으로 기세등등하게 들어간다. 본부건물 입구에선 기숙사 신축에 반대하는 인근 건물주들이 머리띠와 조끼를 착용하고 아이들까지 동반한 채 피켓을 들고 시위 중이다.

▲영화 ‘교환학생’ 중에서

본부 사무실에서 남자는 딸이 기숙사에 탈락했다고 언성을 높인다. 담당직원은 사정을 설명하며 규정을 이야기하지만 남자는 막무가내다. 직원은 말 그대로 대략난감한 지경이다. 남자의 딸은 성적이 형편없는데다 기숙사 신축이 주민들 반대로 난항을 겪으며 TO 자체가 절대적으로 모자라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직원의 상사는 남자를 알아보자 직원을 따로 불러 타박한다. 아마 남자는 학교에 어지간히 영향력이 있거나 후원하는 큰 손일 테다. 잔뜩 질책받는 직원, 장면이 전환되고 문자 하나가 등굣길 버스 안 수민에게 날아든다.

수민은 대경실색해 학교에 도착하자마자 본부를 찾는다. 그 역시 시위대를 지나친다. 하지만 수민은 지금 그 시위대에 눈길 한번 줄 틈이 없다. 기숙사 합격이 번복된 것이다. (관객은 대충 상황을 유추해 짐작할 테다) 문자로 통보된 내용에 수민은 거세게 항의하면서 자신의 절박한 사정을 쏟아낸다. 하지만 아까 전 그 직원은 그저 곤혹스러울 따름이다. 머리를 싸매던 직원에게 묘수가 하나 떠오른다. 기숙사 건은 어찌할 수 없으니 그 대신에 하와이 대학과 교류하는 교환학생 신청이 딱 하나 남았다며 수민에게 성적 등 조건이 좋으니 얼른 지원해보라고 말한다. 신청은 오늘까지다.

▲영화 ‘교환학생’ 중에서

문제는 수민의 기숙사 자리를 빼앗은 남자의 딸, 한별도 하와이 교환학생을 노린다는 것이다. 한별의 아빠가 억지를 부린 것은 놀기 좋아하는 한별이 자취를 못하게 하려는 목적에서다. 한별은 아빠의 간섭이 미치지 못할 하와이 교환학생이란 꿈에 부푼다. 그는 룸메이트인 후배 희주의 협력으로 신청을 준비한다. 이제 수민은 기숙사 자리에 이어 교환학생까지 빼앗길 판이다. 과연 그의 운명은 어떻게 될까?

2_갈등을 촉발하는 근본원인은 무엇인가

<교환학생>은 대학 공간을 무대로 벌어지는 부조리극이다. 10여 분 남짓한 짧은 단편 속에는 몇 겹의 레이어로 우리가 체험하거나 언론에서 전해 듣곤 하는 여러 형태의 부조리가 가득하다. 그저 개별적으로 나열되는 게 아니라 그런 부조리들이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순환을 일으켜 연쇄 작동하는 전개가 펼쳐진다. 꼬리에 꼬리를 문다는 표현이 딱 들어맞는 이야기 구성이다.

첫 번째 부조리는 대학 기숙사의 태부족이다. 한국교육의 고질병인 대학 서열화는 ‘SKY’, ‘중경외시’, ‘지잡대’ 등의 온갖 신조어를 탄생시키며 하나의 신분제로 등극한 지 오래다. 역대 모든 정권이 과도한 대학입시 폐단을 개선하겠다고 공약했지만, 그 결과는 오히려 학벌 카스트라 할 만큼 공고히 확립된 서열화다. 지방거점국립대 안이나 서울대 해체 등의 아이디어가 나온 지 한 세대가 얼추 지났음에도 제대로 구현된 게 없다.

이 때문에 대학 진학이 향후 인생을 결정할 학력자본 획득의 결정적 요소가 된지라 자신이 어디에 살건 형편 되고 능력 있는 한 입시성적에 맞춰 유학을 감행해야 하는 상황에 학생과 가족은 처하게 된다. 하지만 대부분이 사립대인 한국 대학은 재단이 적극적으로 투자하기보단 등록금과 교부금에 의지하는 운영으로 일관했고 그 결과 대학가엔 대규모 원룸과 하숙촌이 형성되었다. 특히 제조업 등 핵심 산업기반이 부재한 지방 소도시의 경우 대학이 이전하거나 폐교하면 지역경제가 붕괴할 지경에 처한다.

▲영화 ‘교환학생’ 중에서

영화의 시작부터 끝까지 내내 등장하지만 등장인물 누구도 신경을 쓸 여유도 관심도 없는 본부 앞 주민들의 시위는 사실상 <교환학생>의 사건들이 일어나게 만든 핵심배경인 셈이다. 원인은 따로 있지만 정작 주요 등장인물들의 갈등은 이 문제를 건드리지 못한다. 구조적 문제에 대해 집단의 의지를 모아 개혁하는 경험과 상상력을 상실한 세대에겐 그저 부족하기 짝이 없는 자원을 서로 차지하기 위한 투쟁만이 남은 것이다.

대학 인근 주민들은 오랜 기간 학생들의 주거 수요를 통해 안정적 수입을 얻어 왔다. 이미 해당지역 경제의 주요 동력은 대학생(과 그 가족) 입장에선 자신들의 고혈인 셈이다. 그러나 주민들 입장에선 수십 년 세대를 넘어 이어온 수입원이 흔들리는 건 포기할 수 없는 생존권 문제로 간주하기 마련이다. 적지 않은 이들이 자가 주택을 은행대출로 원룸 개조하는 등 빚을 지고 투자해둔 상태다. 타인의 사정을 고려할 여력이 없는 것이다.

하지만 학생들의 부담이 갈수록 늘어나니 자연히 사회문제가 되고 원성은 커질 수밖에 없다. 학생들의 강력한 요구가 거듭되자 대학 당국은 마지못해 신축증설을 추진하게 된다. 그러나 이런 움직임은 임대수요를 예상해 이미 과잉중복 투자 중인 주민들에겐 생존권 위협으로 다가올 뿐이다. 뉴스에서 심심찮게 등장하는 것처럼 격렬한 반대시위가 이어졌다. 주민 대책위원회가 기숙사 공사현장에 드러눕는 사태가 속출한다. 새가슴이 된 대학본부는 미적지근하게 대처하며 공사는 한없이 지연되곤 한다. 이제 확충되지 못하고 제한된 자원을 분배하며 어떻게든 버텨내야 한다. <교환학생>의 영화 속 등장인물들이 감당해야 할 소우주는 이런 지형인 것이다.

3_대학사회의 어두운 자화상을 블랙유머로 소화하다

하지만 영화 속 대학사회의 현실은 자원을 공정하게 분배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정작 기숙사가 별로 필요해 보이지도 않는 한별은 다 큰 딸 자취는 못 시키겠다는 아버지 때문에 기숙사 자리를 편법으로 꿰찬다. 한별의 가족에게 수민의 절박한 사정 따위는 안중에 없다. 그러니 별 죄의식 없이 자리를 빼앗을 수 있는 것이다. 양심의 가책 같은 건 느끼지 않으니 그저 자신의 소망, 아버지의 간섭에서 벗어나 하와이로 탈출하기 위해 이제 한별은 수민에게 마지막 남은 기회인 교환학생 자리마저 노린다. 부조리가 부조리로 이어지는 악순환의 연속이다.

여기에 대학본부의 불공정한 행정 처리가 한몫 거든다. 자원이 제한되어 있다면 최대한 꼭 필요한 이들로부터 분배가 이뤄져야 한다. ‘공정’담론은 해당 사회 구성원들이 공동체 의식을 유지하기 위한 이데올로기로 작동한다. 그러나 <교환학생> 속 대학본부의 작동원리는 그와는 거리가 아득히 멀다. 더 가진 자, 배경이 있는 자에게 우선권이 주어진다. 누가 봐도 자격이 안 되는 한별은 투덜거리며 들어가기 싫어하는 기숙사 침대 한 칸이 수민에겐 학교를 계속 다니기 위한 동아줄인데도 그런 사정을 굳이 알려고 하는 이는 드물다.

물론 <교환학생>은 그런 대학의 어두운 이면을 고발하는 르포르타주나 고발 다큐멘터리 형태를 취하지는 않는다. 영화는 암담한 부조리극이 담은 현실의 중력을 완화하기 위해 블랙코미디와 스릴러, 여기에 퀴어 코드까지 이것저것 많이도 버무려낸다. 10분 조금 넘는 단편에 그렇게 다양한 시도가 투입되다 보니 재료가 과밀화된 경향이 좀 있다. 아주 세련되고 정교한 배합은 아닌데 이는 본 작품이 학생영화 형태로 한정된 기간과 예산에 맞춰 제작된 측면에서 상당 부분 기인할 것이다.

또한 영화의 러닝타임이 (요즘엔 영화제 출품되는 단편영화도 기본 20분은 대부분 넘어가는 상황에서) 꽤 짧은 편이기 때문에 충분한 호흡 안에서 이질적인 톤과 장르를 정교하게 조립하기보다는 해당 장르들의 전형성을 관객이 연상하는 것에 의지하는 방식으로 개별 장르 스타일이 차용되는 편이다. 그래서 아기자기한 조합이긴 하지만 독창적 해석까지 확장되지는 않는 게 대부분이다. 그럼에도 간결한 연출과 단편에 어울리는 깜짝 반전 덕분에 이야기 전개는 늘어지거나 지루할 틈이 없다.

4_영화를 만든 이와 등장한 이들에 주목하다

<교환학생>을 연출한 조현준 감독은 현재 계명대 언론영상학과 교수로 재직하며 틈틈이 영화작업을 이어가는 중이다. 방학 기간에 학생들과 함께 작업을 진행하는 듯 그의 영화는 의도적으로 선택한 투박함이 튀는 편이다. 전업 독립영화감독들이 다양한 제도지원에 의지해 작업하는 것에 비해 영화작업에 온전히 집중하기 힘든 조건에서 제한적인 자원을 활용하는 연출 방식을 택한 듯하다. 1편의 작품 연출에 모든 것을 갈아 넣는 작업방식과는 대비되는, 일종의 ‘계획적 구식화’ 스타일인 셈이다.

대학 강단에서 활동하면서 시간을 쪼개 작업하는 경우는 드물게 존재하지만, 특히 지역에선 찾기 힘든 유형이다. 게다가 대학교수가 자신이 속한 대학 캠퍼스를 배경으로, 학내 부조리를 소재로 삼은 건 꽤 의외의 선택이다. 영화가 풍자적 블랙코미디 형태를 취한 건 상당히 현실적인 고민의 연장선일 수도 있겠다. 직설적 묘사로 암울한 리얼리티를 끌어올리는 대신, (그래서 혹시나 심기가 불편할 수 있는 이들을 고려해) 은유와 조크로 경계선을 긋는 풍자의 방법론으로 영화는 달린다. 미스터리 스릴러 풍 반전이 작품의 결정적 요소가 되어 나름의 해피엔딩 결말을 맞지만, 엔딩까지 이어지는 건물주들의 본부 앞 시위 풍경은 블랙코미디의 진한 풍자를 유지한다.

▲영화 ‘교환학생’ 중에서

수민 역을 맡은 안소요 배우는 근래 독립영화에서 자주 보이는 얼굴이 되었다. 유독 이 영화에서처럼 부조리한 세상의 피해자 캐릭터로 자주 등장하는 그는 <인 허 플레이스> (2015)부터 인상적인 경력을 쌓아가는 중이다. 올해 상반기 개봉했던 <축복의 집> (2019)에서는 본 작품에선 다소 코믹하게 묘사된 ‘흙수저’ 캐릭터를 드라이하게 연기해 주목받았다. 역시 다수의 독립영화에서 얼굴이 익은 김철윤 배우는 난처한 상황에 끼인 본부 직원으로 이 영화에선 드물게 순박한 책상물림 면모를 선보인다. <대자보>와 <안부> 등에서 접했던 이민영 배우의 희주 역은 반정의 실마리를 쥔 씬 스틸러 역할을 도맡는다.

<교환학생> 속에 담긴 방대한 배경과 다양한 장르 요소들은 훨씬 여유로운 분량으로 톤을 바꾸는 데 따라 다채로운 색깔로 변형될 수 있다. 좀 더 본격적으로 시간과 자원을 투입해 작업한다면 어떤 결과물이 나왔을까 궁금해지는 작업이긴 하지만, 한국의 대학 현실과 연동되는 <교환학생>은 킬링타임 용도의 캠퍼스 코미디와는 판이한 소우주를 우리 앞에 펼친다.

<작품정보>

교환학생 Exchange Student
2019|한국|드라마|13분|12세 관람가
감독 조현준
주연 안소요(수민) 김다은(한별) 이민영(희주) 김철윤(직원)
출연 이양희(아버지) 최한별(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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