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억 들인 대구시 여성폭력예방 메타버스 체험해보니···

2030 남녀 4명 직접 체험..."지루하고, 효능감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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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4 12:57
여성가족재단 해명 수정 보충

나를 대신하는 캐릭터가 여성 안전 플랫폼 메타버스 속 실내 공간을 이동한다. 다섯 개의 체험 중 첫 번째 체험을 위해 도시철도 의자 앞에 선다. 이미 의자에는 남녀 두 사람이 앉아 있다. 임산부 전용석에 앉은 여성 캐릭터는 다소곳이 다리를 모으고 있지만, 양복을 입은 남성 캐릭터는 찢어질 듯 두 다리를 벌리고 몸은 한껏 뒤로 젖힌 채 앉아 있다. 지시대로 화살표를 클릭하면 ‘다리를 벌려 앉는 행위는 다른 사람에게 불편함을 줄 수 있습니다. 바닥에도 좌석이 있습니다’라는 안내가 뜬다.

여성 안전 플랫폼이라는 소개를 읽고 접속했는데, 쩍벌남과 여성 안전의 연관성을 이해하지 못한 채 캐릭터를 맞은 편으로 이동시켰다. 맞은 편엔 ‘안전 정책에도 성인지 감수가 필요!’라는 제목의 포스터가 붙었다. 클릭해 내용을 확인해보니 ‘남성 당뇨환자 조기 발견이 어려운 이유’가 안내되어 있다. 이쯤 되면 여성 안전이란 소개는 기만에 가깝다는 생각이 슬그머니 올라온다.

대구시가 여성가족재단에 위탁해 제작한 여성 안전 플랫폼 ‘SISO’ 메타버스(이하 메타시소)를 직접 체험한 대학원생 전나경(28, 여성) 씨는 “애초에 여성의 불안을 이런 식으로 체험하는 게 가능하다고 보지 않는다. 장애 체험에 반대하는 것과 비슷하게 당사자 기만 같다고 느꼈다”고 말했다.

그는 캐릭터 선정에서부터 성차별적 요소가 있다고 평했다. 여성 캐릭터의 몸매가 과하게 드러난다거나, 여성 캐릭터의 헤어스타일 선택지에 짧은 머리인 숏컷트가 없는 등 성별 고정관념을 고착화하는 내용으로 설정돼 있다는 지적이다. 전 씨는 “캐릭터 설정 과정에 비장애인의 젊은 남성과 여성만을 선택할 수 있고, 다양한 가능성을 배제한 옷차림과 머리 스타일로 설정돼 있었다”고 말했다.

▲메타시소 플랫폼 내 5개의 체험 중 하나. 도시철도 역사 내 엘리베이터에 설치된 불법촬영 예방 안심거울을 소개한다.

메타버스 가상공간인 ‘메타시소’는 대구시가 지난해 소방안전교부세로 여성폭력예방 콘텐츠 개발비 1억 1,000만 원을 확보해 수탁기관인 대구여성가족재단에 제작 용역을 맡긴 콘텐츠다. 대구여성가족재단은 올해 3월부터 제작을 시작해 이달 16일 콘텐츠를 오픈했다.

대구시는 보도자료를 통해 메타시소에 대해 ‘최근 증가하고 있는 디지털 성범죄, 데이트폭력, 스토킹 등 신종 젠더폭력에 대응하여 예방교육 및 정보를 제공하며, 여성폭력 예방 장비 등을 나만의 아바타를 통해 현실과 동일하게 체험할 수 있다’고 홍보했다.

하지만 전 씨를 포함해 메타시소를 직접 체험한 2030 남녀 4명은 모두 “실효성이 떨어지고, 논쟁과는 거리가 먼 콘텐츠”라고 입을 모았다.

체험은 ‘도시철도 객차 내에서 매너다리 유지하기’, ‘불법촬영 감지 시스템이 설치된 초록화장실’, ‘도시철도 엘리베이터 내 불법촬영 예방 안심거울’, ‘골목길 이상음원 시스템’, ‘디지털 성범죄 관련 정보 제공 포스터 및 퀴즈풀이’로 나뉜다. 퀴즈 풀이를 제외하면 현재 시행 중인 시스템이나 성범죄 관련 정보를 새롭게 띄워지는 창을 통해 수동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정도의 난이도로 구성돼 있다. 이들을 확인할 때마다 왼쪽 상단에 펭귄 스티커가 제공된다.

▲메타시소 플랫폼의 기획 취지인 ‘젠더폭력 예방교육 및 정보 제공’과 무관한 콘텐츠 내용들.

대학생 임은경(22, 여성) 씨는 “내가 피해를 맞닥뜨렸을 때 행동할 수 있는 적극적인 방법이 제시되기보다 ‘이런 시스템을 만들어 놨으니, 안심하고 조심해라’ 정도의 메시지를 얻었다”며 “불법촬영 감지 시스템이 설치된 화장실과 이상음원 시스템이 설치된 골목길만 찾아서 다닐 순 없지 않은가. 대구시 정책 홍보용이라면 모를까, 전체 과정을 체험한 뒤에 새로운 정보를 얻거나 안심이 되는 마음이 들지 않았다”고 전했다.

남성 입장에서도 실효성을 느끼기 어렵다는 의견이 나왔다. 익명을 요청한 게임업계 종사자 A(30, 남성) 씨는 “메타버스의 정의는 또 다른 나로서의 주체적인 경험, 가상세계에서 현실과 다른 인프라를 쌓는 경험인데 이건 그냥 아바타를 만들고 내가 이동을 조정할 수 있는 정도였다. 왜 메타버스라는 이름을 붙였는지 모르겠다”며 “이용자가 매력을 느낄만한 요소가 없어 금방 흥미가 떨어졌다. 퀘스트 참여 방식이 아닌 정책 홍보 및 안내에 그쳐서 아쉬웠다. 펭귄 5마리를 모아도 아무런 보상이 없어 끝까지 완료하기 지루했다”고 지적했다.

콘텐츠의 실효성에 대한 이야기도 나왔다. A 씨는 “다섯 개의 체험을 완료했을 때 별다른 생각이 들지 않았다. 대립점이 있는, 예민한 부분은 모두 배제하고 안전하게 만든 느낌”이라고 말했다. 대학생 김현성(24, 남성) 씨도 “인식 개선이 목적인지, 정책 홍보가 목적인지 불분명하다. 학내에서나 친구들 사이에서 젠더 이슈가 늘 논쟁이 되는데, 차라리 토론장을 조성해 다양한 의견이 건강하게 이야기될 수 있도록 하는 게 나았을 것 같다”는 의견을 냈다.

남은주 대구여성회 대표는 “젠더기반 폭력 문제를 안전 문제로 보려는 보수적인 지역 정치나 흐름이 일부 반영된 것 같다. 대구는 젠더기반 폭력 발생률이 높은 지역은 아니지만 극악한 사건이 많아 불안도는 매우 높은 편”이라고 말했다.

메타시소 플랫폼에 대해선 “메타시소는 오프라인 공간을 그대로 옮겨 놨지만, 완성도가 떨어져서 실효성이 있을까 의문이다. 디지털 성폭력 등 예방 효과가 있다는 대구시 홍보 자료는 과한 분석“이라며 “도시철도 엘리베이터 내 불법촬영 예방 안심거울이나 CCTV 같은 경우 사건 발생 후에나 의미가 있지, 그 상황에서 피해자 혹은 목격자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에 대한 정보는 빠져 있어 아쉽다. 시스템보단 인식 전환이 더 근본적인 해결책”이라고 평가했다.

박영주 대구여성가족재단 여성미래전략팀 팀장은 “여성의 불안을 그대로 재현해 체험하는 방식이 아닌, 다양한 안전 정책을 시민들이 인지할 수 있도록 체험을 구성하기 위해 노력했다”며 “안전 정책은 넓게는 재난과 재해, 좁게는 질병이나 사고로부터의 정책 등 다양하게 볼 수 있다. 안전 정책을 양성평등 관점에서 접근할 수 있도록 콘텐츠를 제시했는데, 이렇게 광의의 안전정책에서 여성폭력에 대한 안전정책으로 접근하는 게 기만으로 인식될 수 있는지 인지하지 못했다”고 설명했다.

박 팀장은 “피해를 맞닥뜨렸을 때의 행동 요령은 불법촬영 예방 안심거울 체험 시 벽면에 제공되지만, 추후 보다 잘 인지할 수 있도록 화면을 보정하겠다”며 “전국에서 처음 시도되는 메타시소는 안전 문화 확산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보니 아바타에 소요되는 부수적 비용과 게임과 같은 흥미 요소 보다는 교육적 콘텐츠 구성에 좀 더 집중했다”고 덧붙였다.

김보현 기자
bh@newsmi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