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선우] 여성 할례 철폐 투쟁사 ‘데저트 플라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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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인 소녀가 아프리카 소말리아의 초원을 뛰어간다. 사막과 바위산을 건너면서 발톱이 빠지고 발바닥에 심한 상처가 났다. 하지만 걸음을 멈추지 않는다. 소녀는 길가에 있는 나뭇잎을 뜯어 먹고 낙타의 젖을 훔쳐 마시며 허기를 달랜다. 차를 얻어 탔다가는 성폭행을 당할 뻔했다.

천신만고 끝에 소말리아의 수도 모가디슈에 도착한 소녀는 영국 런던에 소말리아 대사로 부임해 있던 친척 집 가정부로 들어간다. 수년간 식모살이를 하던 소녀는 어느덧 성인이 된다. 하지만 소말리아에 내전이 벌어지고 친척 내외는 여성만 남기고 소말리아로 돌아가 버린다. 그는 불법체류자 신세가 되어버린다. 길거리에 나 앉게 된 여성이 가진 거라곤 작은 비닐 봉투 하나가 전부다. 그는 쓰레기통을 뒤져 배를 채우고 더러운 골목에서 웅크린 채 잠이 든다.

이 여성의 이름은 와리스 디리(Waris Dirie). 모델이자 여성 인권 신장 사회운동가다. 1990년대 프랑스 샤넬의 얼굴로 유명하다. 미국 유명 화장품 레브론이 선택한 첫 흑인 독점 모델이며, 세계적인 패션쇼 무대를 누비며 최고의 주가를 올렸다. 모델 신디 크로퍼드, 클라우디아 시퍼와 어깨를 나란히 했다. <007 리빙 데이라이트(1987년)>에 본드걸로 출연하기도 했다. 보랏빛이 감도는 검은 피부에 짧게 자른 머리를 금발로 물들이고 나와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디리는 소말리아 유목민의 딸이다. 3살에 할례를 받고 13살에는 낙타 5마리를 준 64세 노인의 네 번째 아내가 될 처지에 놓인다. 눈물을 흘리는 디리에게 어머니는 도망가라고 조언한다. 영어 한마디 못 하던 디리는 우연한 기회에 버킹엄 궁전의 사진작가 테렌스 도노반의 눈에 띄어 모델로 발탁됐고, 이후 미국으로 건너가 모델이자 배우로 성장한다.

1997년엔 할례 경험을 고백하면서 인권운동가라는 또 다른 인생을 살기 시작한다. 국제사회에 할례 철폐를 전면에 부각시킨 디리는 유엔 인권 특별대사로까지 임명됐다. 2002년에는 ‘사막의 꽃’ 재단을 만들어 아프리카 여성 구호에 힘쓰고, 파리·베를린·암스테르담·스톡홀름 등에 ‘사막의 꽃’ 센터를 설립해 할례 여성을 치료해왔다. 2004년엔 ‘여성 세계상’, 2005년엔 가톨릭 인권운동본부의 ‘오스카 로메로 주교상’, 2007년엔 프랑스 레지옹 도뇌르 훈장도 받았다.

<데저트 플라워(2009년)>는 디리의 자서전 <사막의 꽃>이 원작이다. 감동적인 실화를 토대로 한 영화는 디리의 인생역전을 나열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디리가 어린 시절 당한 할례를 고백하며 일부 국가의 구습에 맞서는 활동가의 모습을 비춘다. 영화는 소말리아의 여성 성폭력이 등장하고, 상처를 다루지만 어둡지는 않다. 당돌하고 때로 엉뚱한 디리를 보노라면 웃음이 나오기도 한다. 영화의 마무리 대목에선 유엔 특별인권대사로 변신한 디리의 얼굴이 스크린 중앙에 비친다. 당당한 그의 얼굴이 미소 짓게 만든다.

디리의 고백 이후 대개의 나라가 여성 할례를 공식적으로 금지했다. 하지만 관습은 고쳐지지 않고 있다. 1억 3,000만 명의 여성이 할례 관습의 영향 아래 있으며 아프리카, 아시아뿐 아니라 유럽, 미국의 이민자들 역시 이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 디리도 3살이던 어느 날 엄마 손에 이끌여 어느 집시 여인의 더러운 면도칼에 할례를 당했다. 그는 상처가 아물도록 한 달 동안 다리를 묶어 뒀다고 했다. 할례 이후엔 소변 보는 것이 고역이고 다달이 오는 월경이면 극심한 통증에 시달렸다. 그의 언니는 할례 이후 사망하기도 했다.

영화는 여성 인권 향상을 위해 노력하는 와리스의 투쟁 기록이다. 남녀의 시각을 떠나 인간의 존엄성 문제를 다뤘다. 아프리카 속담에 ‘꼴찌 낙타라도 걷는 속도는 일등과 같다’는 말이 있다. 소수한테 일어나는 일이라도 영향은 모두에게 미친다는 뜻이다. 실화에 뿌리를 둔 영화가 주는 진솔한 감동에 머물지 않고 행동하라는 말처럼도 들린다. 영화의 연출은 독일계 미국인 셰리 호먼 감독이 맡았다. 주연 와리스 디리는 에티오피아 출신 유명 모델 리야 키비디가 연기했다. 영화는 2009년 스페인 산세바스티안 국제영화제에서 관객상을 받았다.

손선우 전 영남일보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