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비053] ‘누구도 남겨두지 않는다’ & ‘홈’, 포항 지진 이후를 기록한 영화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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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_태풍 ‘힌남노’가 지나간 자리

슈퍼태풍 ‘힌남노’로 온 나라가 떠들썩했다. 과거에 심각한 피해를 안겼던 태풍 ‘매미’에 비교하며 우려가 컸지만, 다행히 태풍의 진로가 국토 대부분을 비켜나 소멸에 이르렀다. 많은 이들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을 테다. 강력한 사전경고에 비해 운 좋게 대다수 지역이 태풍의 사정권을 벗어난 덕분에 일부에선 사전경고가 과장되었다며 태풍을 조롱할 정도였다. 하지만 초강력 태풍의 위력은 결코 우습게 볼 수준이 아니었다. 전국 대부분의 지역이 그저 폭우가 쏟아지는 정도로 그치긴 했지만, 불행히도 태풍의 진로에 걸쳐 있던 동남부 해안지방의 피해는 절대 적지 않았다. 우리는 너무 쉽게 자신만의 좁은 영역에만 매몰되고 있다.

특히 경상북도 최대의 도시인 포항의 인명 피해와 복구 문제는 전국적으로 봐서도 심각한 수준이다. 이번 태풍으로 인한 대부분의 희생이 포항 아파트단지 지하주차장에서 발생했고, 이미 추산 1조 7천여억 원의 재산피해에 추가로 1조 이상이 더해질 것으로 예상된다. 포항뿐 아니라 한국 산업계의 동맥과도 같은 포항제철이 침수 피해로 49년 만에 전면 가동중단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앞으로 6개월간 복구 작업기간이 소요되어야 정상가동이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예전 천재지변에 비해서는 사전 예측과 경고, 대비책 마련 등에서 ‘힌남노’ 관련 대응은 그렇게 결정적인 하자는 터지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국가기간산업시설이 설립 이후 처음으로 가동중단에 이르고, 도시하천의 범람을 제어하지 못해 소중한 인명이 다수 희생된 것은 당연히 원인을 근절하고 재발 방지는 물론 근본적인 재난방지대책을 수립해야 할 사안이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친다’는 말이 있지만, 소를 계속 키워야 한다면 당연히 외양간은 제대로 고쳐놔야 한다.

이번 포항의 피해 사례를 논할 때 아파트단지 관리사무소 업무조건과, 이번에 범람한 ‘냉천’의 제어 문제를 지적하는 목소리가 크다. 전자는 인명보다 재산권에 더 매몰된 우리 사회 정서와 관리업무의 왜곡된 현실, 후자는 과거 4대강 정비사업 과정에서 천변을 미관과 레저 기능에 집중할 뿐 안전문제를 등한시했던 정책적 문제가 원인으로 지목된다. 결국 우리 사회와 정치의 문제가 미리 막거나 최소한으로 피해를 줄일 수 있었을지도 모를 재난을 방치해버리는 결과를 불러온 셈이다. 포항 시민들이라면 5년 전의 아픈 기억을 다시금 떠올리며, 전 시가지가 침수되다시피 한 상황을 그저 견디고 복구하는 것 외에 별 도리가 없을 지금, 근본적으로 우리 사회의 공공 시스템과 안전대책 한계점을 뼈저리게 실감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반면교사 역할을 온전히 해내지 못하고 숙제를 남겼던 5년 전, 2017년 포항에선 무슨 일이 일어났었는지 시간여행을 떠나보자.

2_<누구도 남겨두지 않는다>가 전하는 재난 사각지대 이야기

▲영화 ‘HOME’ 스틸 이미지

2017년 11월 15일, 포항 대지진이 터지던 그 순간을 지금도 기억한다. 당시 원룸 건물 3층에 살고 있었는데, 방에는 이것저것 세간이 제법 많았다. 오후 2시가 좀 지나 갑자기 지금껏 느껴보지 못했던 진동이 시작되었다. 잠자리 곁 책장 위까지 층층이 쌓여 있던 책들이 와르르 무너졌다. 형용사가 아니라 정말로 책에 깔려 죽을 수도 있겠다고 체감했던 순간이다. 떨어져 부딪힌 책 모서리가 꽤 아팠지만, 다행히 크게 다치진 않았다. 진도 5.4, 기상정보 서비스 시행 후 최대 규모의 강진이었다. 그러나 지진은 끝나지 않고 거듭 이어진다. 이후 그해 겨울 내내 80여 호나 여진이 반복된다. 다음해인 2018년 2월 11일 발생한 진도 4.6 지진도 뇌리에 남아 있다.

특히나 코로나19 이후 하루에도 여전히 몇 번씩 울려대는 긴급안내문자의 출발점은 이때부터였던 걸로 기억한다. 이젠 일상이 되어버린 긴급문자 수신이지만 그 당시엔 정말 실시간으로 내용을 확인하곤 했다. 그리고 잊을 만하면 다시 몸으로 느끼는 진동 덕분에 옆 나라 일본의 문제로만 취급되던 지진이 일상에 파고들어 오랫동안 각인되었다. 물론 지금은 코로나19 이후 상시적인 위기상황에 익숙해진 상태이지만 말이다.

이제 예전에는 상상하지 못했던 다종다양한 유형의 천재지변은 언제든 닥칠 수 있는 문제가 되었다. 특히 안정되고 예측가능하다고 평가받던 뚜렷한 사계절 기후 대신 기후변화를 피부로 느끼게 된 건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다. 하지만 말은 이렇게 거창하게 하면서도 정작 스스로건 주변에서건 대도시 공간에서 지진 같은 재난에 대비하는 조치는 그다지 피부로 느껴지는 게 별로 없다. 얼마 전, 잠깐 병원에 입원해 있다 퇴원 며칠 전이 주말 밤에 잘못 작동된 화재경보 비상벨 때문에 잠자리에서 병동 환자 전체가 병원 바깥으로 비상대피할 일이 있었다. 실제 상황이라면 대형 참사가 터지는 게 순식간이겠다는 생각은 들었지만 내 한 몸은 빠져나올 수 있겠지 하는 안일함이 앞섰다. 나는 ‘다행히’ 비장애인이니까 정 안되면 후다닥 뛰어나가면 되겠지 하는 그런 생각이다.

20세기 후반 ‘뉴욕 지성계의 여왕’이라 불릴 만큼 행동하는 지식인의 대명사였던 수전 손택의 인상적인 저서 제목처럼, “타인의 고통”은 약간의 연민과 그 몇 배의 안도감으로 비장애인인 나에게 다가온다. 난 그래도 다행이라는 위선과 배덕감이 덩어리져 뇌리에 박혀 있는 것만 같다. 지속가능한 도시 모델에 대해 천착하는 예술가 콜렉티브 “리슨투더시티”의 단편 다큐멘터리 <누구도 남겨두지 않는다>는 그런 비장애인들의 무뎌질 대로 무뎌진 마음 한구석에 방치된 장애인들의 이야기에 제발 관심 좀 가지라는 의도로 제작되었다. 장애인 문제 + 비수도권 지방도시 이야기인지라 (인구 50만의 포항은 결코 작은 도시가 아님에도) 이 도시에 발생한 지진의 파장은 금방 휘발되어 버렸지만, 리슨투더시티는 10명의 인터뷰 대상자 목소리를 차곡차곡 정리해 사례 예시로 제시하고, 당시 상황을 복기하게 만드는 아카이브 영상들을 적재적소에 배치해 포항 지진의 기억과 교훈을 복기하게 만든다.

이 작품이 강조하는 핵심은 사회적 재난에 대한 바람직한 대응방법은 비용이 아니라 관점과 시각의 문제로 접근하는 방향성이라는 강조다. 국가와 사회가 오로지 행정과 효용의 관점으로 위에서 내려다보는 시각을 견지한다면 굳이 지진 문제가 아니라도 장애인 대책은 ‘상박하후’가 아니라 ‘상후하박’의 표본이 될 수밖에 없다. 이번 태풍 관련해서는 다행히 포항지역 장애인 희생이 발생하지 않았지만, 지난여름 수도권을 강타한 집중호우 당시 반지하 방에서 미처 대피하지 못하고 희생된 장애인 사례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영화 ‘HOME’ 스틸 이미지

무엇보다 비장애인을 포함한 사회적 약자를 불필요한 존재, 잉여집단으로 간주하고 시혜적으로만 바라보는 시선을 우리 사회가 유지한다면 고대 스파르타 시절의 야만에서 근본적인 변화는 없다고 해도 무방할 테다. 정반대로 사회적 약자에 대한 관심과 보편적 인권의식의 향상이 진보의 척도임을 인정한다면 현재 우리 사회의 장애인 대책은 (가능한 최대치 범위 내에서) 철저히 당사자 시각에 맞춰져야 한다. 비장애인, 즉 사회 주류적인 시선으로 이 정도면 옛날보다 많이 좋아졌다고 자족할 게 아니다. 실제로 필요한 게 무엇이고 장애인 당사자의 요구가 무엇인지 이해하고 접근하려는 노력이 여전히 경주되어야 한다. 본 작품이 만들어진 첫 번째 목적 또한 그것일 테다.

둘째로 영화는 관련 활동가들의 인터뷰를 통해 사회복지 정책에서 공공기관과 예산의 문제로만 환원되어온 쟁점을 지역사회 공동체의 상호부조 차원으로 확장해야 한다는 정책 대안을 제시한다. 물론 중앙/지방정부에 대한 정당한 요구와 비판은 더욱 활발히 제기되어야 마땅하다. 하지만 사회의 일원인 무수한 ‘나’는 무얼 할 수 있고 일상에서 어떤 실천을 하고 있는가에 대한 조명도 중요하다. 영화 속 당사자들의 주장은 간략하지만 꽤 깊숙이 와 닿는다.

장애인 당사자들은 실제 예상치 못한 재난 이전에도 상시적 위기에 처해 있던 자신들의 사정을 토로하고, 2017년 지진 당시 본인들이 처했던 방치를 증언한다. 활동지원사가 상시 지원되지 않고, 지원되더라도 유사시에 응급구조와 대피를 책임지기엔 중장년 여성이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상황은 유연한 대처를 가로막는다. (이는 노인층을 대상으로 한 요양보호사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비단 장애인 뿐 아니라 돌봄이 필요한 이들 태반에 해당되는 문제다. 119를 눌러도 직접적인 부상 외엔 지원이 안 된다는 생생한 체험은 다른 영상들에선 쉽게 접하기 어려운 생생한 정보들이다.

▲’누구도 남겨두지 않는다’ 스틸 이미지

<누구도 남겨두지 않는다>는 제목부터 역설적인 동시에, 영화를 만든 이들의 염원이 담겨 있기도 하다. 제작 의도부터 영화적 재미보다는 사회적 환기와 토론을 위한 의도로 기획되었고, 그런 차원에서 다양하게 활용되길 꿈꾸는 작업이다. (현재 유튜브에 공개되어 있다)

3_<홈>, 재난을 겪은 뒤 가족이 함께 생각하는 ‘집’의 의미

전윤진 감독의 단편 다큐멘터리 <홈>은 2017년 포항 지진 이후 감독과 감독의 가족들에게 닥친 변화의 기록이다. 고향을 떠나 타지에서 영화-영상 관련 전공공부 중 호주 여행을 장기간 떠났던 감독이 포항 지진 소식에 일정을 단축해 고향으로 돌아오면서 이야기가 진행된다. 앞서 소개한 <누구도 남겨두지 않는다>가 포항이라는 지역을 배경으로 타지의 예술가 그룹이 사회적 재난에 취약한 장애인 문제를 주제로 삼아 집중한 반면, <홈>은 지역 출신 감독이 오랜만에 돌아온 고향에서 ‘집’과 ‘가족’의 의미를 성찰하는 에세이 영화 형식을 띈다.

▲영화 ‘HOME’ 스틸 이미지

요즘 들어 지역을 떠나지 않고 공동 작업을 통해 유의미한 성과를 내는 젊은 창작자들이 늘어나고 있지만, 여전히 다수의 인재가 대학 진학 전후로 지역을 떠나는 게 현실이다. 그런 실정에서 2017년 포항 지진을 지역 창작자가 본격적으로 다룬 시도는 본 작품이 거의 유일하게 존재한다. ‘지역’ 의 역사와 동시대의 풍경을 기록하는 역할이 ‘로컬영화‘에 존재한다고 긍정하는 이들에게는 제작된 사실 자체로 의미가 있는 작업인 셈이다.

하지만 <홈>은 사회적 재난 자체의 기록영화와는 다소 거리가 있다. 이 영화는 2017년 당시 지진의 발생원인 중 하나로 지목되었던 포항 인근의 지열발전소로 인한 촉발지진인지 여부나, 한국이 이제는 지진 안전지대가 아니라는 사회적 인식의 계기를 강조하는 것 같은 시사적 측면에는 큰 관심이 없다. (그해 지자체 선거 현수막이 강조되는 장면은 있지만, 감독의 정치적 의도가 뚜렷이 드러나지는 않는다) 대신에 미증유의 재난을 겪으며 한동안 제법 거리감이 있었던 (감독 자신의) 가족이 재회하고 지금껏 이 가족이 살아온 ‘집’에 대해 나누는 회고가 빈자리를 채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가족 개개인에게 일어난 변화와 재난을 전화위복 삼은 치유의 과정을 보여주는 데에 주력한다.

▲영화 ‘HOME’ 스틸 이미지

감독은 귀국해 돌아오자마자 어릴 적 바쁜 부모 대신에 자신을 돌봐줬던, 그리고 지진 당시 홀로 집에 있었다는 할머니를 만나고, 어렵게 나간 해외일정에 차질은 없는지 염려하는 부모형제와 상봉한다. 그리고 가족은 지진 피해로 폭삭 부서지고 버려진 상태가 되어서야 비로소 그들이 함께 돌아보게 된 가족의 옛 터전을 다시 찾아 추억과 회상에 잠긴다. 오랫동안 살아왔던 집이 무너진 지경이지만 시련을 이겨내기 위한 과정에서 이 가족은 오히려 꾸준한 대화로 서로의 기억을 확인하고 생각을 공유하게 된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은 포항 지진의 흔적은 영화 곳곳에 아로새겨져 있다. 체육관 실내에는 이재민들의 천막이, 임시주거단지에는 컨테이너 가건물이 들어서 있고 사람뿐 아니라 반려동물 등 어떻게든 일상의 삶을 이전해 유지하려는 시민들의 노력이 곳곳에서 감지된다. 그런 집단적 의지는 옆 나라 일본에서 3.11 동일본 대지진 이후 등장해온 적지 않은 포스트 재난 일상물의 정서와 궤를 같이 한다. 누군가는 좀 더 작품 속에서 지역상황과 재난 대처에 관한 논쟁이 부각되길 기대했겠지만 <홈>은 근래 독립영화에서 핵심방향이라 할 ‘사적 경향’ 에 충실한 에세이 영화다.

4_더 지역화되고 다양한 결을 다루는 ‘로컬영화’를 기다리며

이번에 소개한 2편의 단편 다큐멘터리는 상당히 다른 결로 2017년 포항 지진의 기억을 소환한다. <누구도 남겨두지 않는다>는 대안언론 성격과 담론 형성을 위한 기본 자료로 실용성이 돋보이는 작업인 반면, <홈>은 작가 개인이 지진이란 대사건을 전환점 삼아 ‘집’과 ‘고향’에 대한 사유를 시작하고 가족과의 대화를 통해 성찰에 이르는 개인적인 도전에 가깝다. 단 2편 존재하지만, 매우 상이한 작업 스타일이 눈길을 끈다.

지역에 뿌리를 내리고 자신이 살아가는 지역의 사연을 기록하는 작업은 다큐멘터리 작가들에겐 일종의 역할 혹은 임무로 기능해 왔다. 하지만 경북 제일의 인구를 가진 도시이지만 본격적인 지역기록자나 집단은 공식 방송국 정도를 제외하면 찾아보기 힘든 상황이다. 지나간 과거의 재난을 다양한 시선으로 기록해 기억을 환기하는 작업은 미래의 재난을 방어하기 위해서라도 의미가 적지 않은 실천일 테다. 2022년 ‘힌남노’의 상처가 되풀이되지 않도록, 그리고 재난에 취약할 수밖에 없는 사회적 약자들부터 안전해질 수 있게 하기 위해선 더 많은 기록과 발언이 필요하다.

<작품정보>

홈 Home
2020 | 한국 | 다큐멘터리 | 20’03”
각본/연출/PD/촬영/편집 전윤진
배급 호우주의보

2020 21회 대구단편영화제 개막작, 애플시네마 우수상
2020 22회 대전독립영화제 경쟁부문
2021 9회 디아스포라영화제 디아스포라 단편
2020 대구독립영화협회 연말정산 – 대구단편영화제 수상작 기념 상영
2022 한국영상자료원 특별기획전 로컬시네마: 대구경북

누구도 남겨두지 않는다 No one left behind
2018 | 한국 | 다큐멘터리 | 31‘48“
기획/구성/연출리슨투더시티
촬영/편집 김청승(서울영상집단)
포항 코디네이터 장도일
수어 통역 장진석(수어통역협동조합)

2020 24회 서울인권영화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