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병규 칼럼] 철저한 대비 없는 평화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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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북한의 도발이 심상치 않다. 그 어느 때보다 안보 상황이 엄중하다. 지난달 25일 이후 20일 동안 9차례에 걸쳐 중·단거리 탄도 미사일, 잠수함 발사 탄도미사일, 장거리 순항 미사일 등을 쐈다. 지난 14일 이어 18일에 또다시 동·서해 해상 완충구역으로 포격도발을 강행하며 9·19 군사합의를 대놓고 어기고 있다.

그간 북한의 행태를 보면 의도가 빤히 보인다. 강한 힘만이 평화를 보장한다. 만반의 능력과 태세를 갖추어야 할 것이다. 도발 땐, 망설임 없이 즉각 응징해야 한다. 이것이 평화를 지키는 길이기 때문이다.

50여 년 전 1973년 백골부대가 북한군의 총격도발에 적 GP를 포격으로 격파하며 응징한 작전이 떠오른다. 또 30년 전 1992년 백골부대가 무장공비 3명이 책임지역으로 침투해 도발하자, 은하계곡에서 일망타진한 완전작전이 오버랩된다.

필자는 1992년 백골부대의 민사심리전 교육장교로서 ‘은하계곡 완전작전’을 지원했다. 덕분에 이 작전을 대내외에 알리면서 전우들을 대신해 많은 격려를 받았다.

특히 1973년 휴전이래 최초로 적 도발에 포격으로 GP를 격파한 박정인 사단장(예비역 준장, 육사6기)께 은하계곡 작전경과를 보고 드리면서 뜨거운 격려를 받았다. 아울러 50여 년 전 북한군을 응징한 작전과 6.25전쟁에서 얻은 교훈도 받았다. 지금도 맘속에 생생하게 살아 있다.

1973년 3월 7일 상황이다. 백골부대의 황정복 대위와 김윤복 중사가 유엔사의 승인을 받고 ‘군사분계선’ 표지판 작업 중, 북한군의 기습총격에 전사하고 서휘수 병장이 중상을 입었다. 이에 사단장은 포병대대를 동원하여 적 559GP를 포격했다. 1975년 귀순한 ‘인민군 유대윤 소위’에 따르면 GP막사가 격파되어 전원 사망(30여 명 추정)했다고 한다.

▲백골공원에 있는 ‘백골상과 부대 마크’. 장병들은 이 마크를 보며 백골이 될지라도 조국을 지키겠다고 다짐하고, 이 곳을 방문하는 국민 누구나 백골정신을 배울 수 있다. [사진=전병규]

당시 사단장은 북한군의 기습도발에도 즉각 응징이 가능했던 것은 북한군의 의도를 간파하고 철저하게 대비한 결과임을 강조했다. “전 장병이 철모를 쓰고 총기를 휴대하라”고 사단장 지시 1호로 내렸고 실전처럼 훈련했다며 모든 공을 부하들에게 돌렸다. 정작 사단장은 이 작전의 여파로 우여곡절 끝에 예편했다.

사단장은 철저한 대비 관련 ‘뼈아픈 경험’을 토로했다. “6.25전쟁 발발 때 군 복무 3년 차 육군 대위였다. 군 수뇌부가 도발 징후를 무시했다. 그 결과, 제대로 싸우지도 못하고 대구까지 후퇴했다”라고 말하다가 잠시 멈추기도 했다.

총기도 버리고 후퇴할 정도로 긴박하고 처참한 상황에서 용사 1명이 의정부에서 대구까지 박격포 포판을 끝까지 메고 와서 지쳐 쓰러진 용사를 보고 전투의지가 불타올랐다고 했다. 낙동강 최후 방어선에서 그 용사의 포판이 반격의 발판이 되었으리라 확신한다.

전쟁 중 대비소홀로 수치스러운 일화도 고백했다. “50년 9월경 6사단 19연대 작전주임(과장)으로 소총만 들고 낙동강 방어선의 영천 신녕지역에 정찰갔다가 적 탱크를 보고 그 어떤 대응도 못하고 도망쳤다”라며 이후 어딜 가든 대비했음을 강조했다.

실제 며칠 후 신녕 북방에서 대전차 화기로 적 탱크 1대를 직접 제압하여 ‘한국의 패튼’으로 불렸다며 공을 미군에서 지원받은 ‘대전차 화기’에게 돌렸다. 풍전등화의 위기에서 도와준 미군에게 감사의 뜻으로 표현한 것이리라.

박정인 장군을 뵙고 받은 생생한 교훈은 “철저히 대비해야 즉각 응징할 수 있다”라는 것이다. 어쩌면 즉각 응징할 수 있어야 평화를 지킬 수 있다. 이미 50여 년 전과 30년 전에 백골부대 장병들이 이를 보여 주었다. 감히 적이 넘보지 못하도록 만반의 능력과 태세를 갖추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