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듯 같은 역사] 노비는 한 명인데, 주인은 둘이라

11:15
Voiced by Amazon Polly

1767년 음력 3월 2일, 한동네 사는 끝만이가 아뢸 것이 있다면서 아침부터 노상추를 찾았다. 어제 저녁의 일이었다고 했다.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이 어젯밤 끝만이 집에서 하룻밤 묵었는데, 그가 노상추의 집 노비 계단(癸丹)을 샀다고 떠벌렸다는 것이다. 노상추의 집안 사정을 잘 아는 끝만이는 근래 노상추가 노비를 판 적이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는데, 갑자기 그 사람이 노상추의 집안에서 노비를 샀다고 하니 이상하다 싶어 확인차 들렸던 터였다. 혹시 싶어 그 사람이 가지고 있던 노비 매매문기까지 챙겨왔다고 했다. 확인해 보니, 관아에서 보증해준 진짜 매매 문기였다.

어디에서 잘못된 건지 확인해 봐야 할 문제였지만, 관아의 보증이 붙은 문건까지 있다니 사안은 작지 않았다. 노상추 생각에도, 이 정도 문건을 만들 정도라면 그 사람은 필경 송사訟事를 통해 이득을 얻기 좋아하는 전문적인 ‘꾼’이었다. 어디에서부터 문제를 풀어야 할지 알 수 없어, 다음날 행여 도움이 될까 싶어 노상추는 법과 송사에 밝은 전광규(全光奎)를 찾았다. 전날 있었던 일로 상담하려 했지만, 전광규는 송사에 얽히기 싫었는지, 대답하기 난처하다면서 답을 피했다. 소송에 엮이는 일 자체를 꺼렸던 조선 시대 문화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뻔히 눈을 뜬 채 계단을 남의 소유로 넘길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정면으로 대처하는 것 외에는 달리 방법이 없었다. 숭암崇巖으로 가서 여러 친척 어른들을 만나 관아에 정식으로 올릴 문기를 작성하기로 했다. 계단의 소유자였던 아버지 노철까지 숭암으로 와서 문서 작성에 참여했다. 사람 그 자체가 매매 대상이 될 수 없는 현대와 달리, 조선시대 노비는 주인에게 속한 경제적 재화 가운데 하나였다. 물론 다른 재화들에 비해 가치가 높았으며, 스스로 판단하고 행동하기 때문에 생명까지 함부로 처분해서는 안 되지만 말이다. 이 때문에 이들의 소장(訴狀)은 원소유자 동의나 매매 계약 없이 매매 문기를 작성한 사람들이 임의로 소유권을 가져간 것을 바로 잡아 달라는 쪽으로 방향이 잡혔다.

소송이 제기되자, 계단을 샀다고 하는 사람도 밝혀졌다. 그들은 안동 풍산에 사는 김수우(金壽佑)와 덕형(金德亨)이었다. 감수우와 김덕형은 최정린(崔廷獜)이라는 사람에게서 계단을 샀고, 그 매매를 증명하기 위해 확인서에 해당하는 매매 문건까지 발급받았던 터였다. 계단은 한 명에 불과한데, 원 소유주인 노상추와 계단을 샀다고 주장하는 김수우·김덕형이 계단의 주인을 자처하고 나선 상황이었다. 노철과 노상추 집안 입장에서는 황당하기도 하고 억울하기도 했지만, 소송을 통해 관아로부터 사안 자체에 대한 정확한 판결을 받아야 했다.

최정린이 소송에 나오지 않아서, 노상추와 김수우·김덕형 사이의 소송은 싱겁게 끝났다. 계단의 소유주인 노상추와 그의 아버지 노철은 계단을 판 적이 없었다. 당연히 최정린을 만난 적도 없었고, 그러다보니 매매를 증명할 문건이나 돈이 오간 영수증 등도 나오지 않았다. 김수우와 김덕형이 가진 매매 문건은 최정린과 김수우·김덕형 사이의 문건에 불과했지만, 이 매매 문건이 효력을 발휘하려면 노상추나 노철이 계단을 먼저 팔아야 했다. 돈 거래 역시 최정린과 김수우·김덕형 사이에서 발생했고, 그 돈은 단 한 푼도 노상추 선생 집안으로 흘러들지 않았다. 관아에서는 최정린이 계단을 김수우·김덕형에 판 것이 잘못이라고 판결했고, 계단의 소유주는 노철과 노상추임을 다시 확인해 주었다. 더 이상 김수우와 김덕형은 이 문제를 노상추 집안과 다툴 사안이 아니었다. 팔지 못하는 대상을 판 최정린과이 문제였다.

노상추 입장에서는 당연한 결과였고, 관아 입장에서도 노상추 집안과 김수우·김덕형 사이의 소송 역시 복잡할 게 없었다. 문제는 김수우·김덕형이었다. 당시 노비 한 명의 매매 대금은 대체로 5냥에서 20냥 사이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가장 높은 가격으로 거래되는 노비는 아이를 생산할 수 있는 젊은 여성 노비였다. 이러한 점에서 보면 계단의 가치 역시 결코 낮지 않았을 것으로 판단되며, 따라서 이들이 아무리 낮은 가격에 샀다고 해도 10냥 이상 주었을 터였다. 10냥이면 시골 군관들의 4~5달치 급여(1760년 경 김천의 기찰 군관 1명의 급여가 대략 2냥 정도)에 해당할 정도였으니, 이만 저만 큰 금액이 아니었다. 이제 김수우와 김덕형 입장에서는 최정린을 잡아 자신들이 준 돈을 돌려받는 방법 밖에 없는데, 행방이 요원한 최정린을 찾기란 쉽지 않았다. 전형적인 사기였다.

사실 김수우와 김덕형 입장에서 보면 관아의 처결에도 불만은 있었다. 그들은 매매 문기에 관아의 확인까지 받았으며, 이를 통해 관아 역시 이들을 계단의 실소유주로 인정했던 터였다. 관아에서 이를 확인해 주면서도, 최정린의 말만 믿고 실소유주에 대한 확인 과정을 거치지 않았다는 의미이다. 관아 역시 최정린의 말에 속은 것일 수도 있겠지만, 그에 대한 책임까지 김수우와 김덕형이 오롯이 져야 했다. 억울한 만도 했다. 원래 사기란 게 눈뜨고 코베어 가는 일이니, 당한 후에도 한동안 그들은 제정신을 차리기 힘들었을 터였다. 모든 사기 피해자가 그러한 것처럼 말이다.

사기는 살인만큼이나 인류의 오랜 범죄 가운데 하나이다. 사람 생명을 빼앗는 범죄는 아니지만, 사람들의 미래와 희망을 죽이는 범죄라는 점에서 생명을 빼앗는 범죄와 크게 다르지 않다. 물론 사람을 거래 대상으로 삼는 조선시대 노비제 자체가 현대 관점에서 보면 가장 비윤리적이지만, 그 당시 피해자들은 노비를 활용하여 경제적으로 더 나은 미래를 꿈꾸었다는 점에서 현대 사기 사건과 궤를 같이 한다. 또한 사기 사건은 예나 지금이나 가장 약한 사람을 겨냥한다는 점 역시 다르지 않다. 김수우와 김덕형 입장이 그랬다. 게다가 이러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관아는 피해자에게 무관심하고, 심지어 관아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태도 역시 예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다. 사기는 그렇게 아픈 사람들의 상처를 골라 공격하고, 피해자만 미래 없는 현실로 던져 버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