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정일의 플라톤 추방] ‘안돼요’라고 말할 줄 아는 섹스 로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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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주제는 공들여 써봤자 본전 찾기 힘들다. 다름 아닌 섹스 로봇과 리얼돌(섹스 인형)이야기다. 섹스 로봇과 리얼돌은 똑같지는 않지만, 인간의 섹스를 해결해 주는 무생물이라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이 글에서는 섹스 로봇과 리얼돌을 차별 없이 혼용한다). 섹스 로봇은 인간의 존엄성, 특히 여성의 존엄성을 헤친다는 비판을 받으며 페미니스트로부터 지탄을 받아왔다. 이런 비판과 지탄은 섹스 로봇이나 리얼돌을 필요로 하는 표준 소비자를 젊고, 성욕 왕성한 남성일 것이라고만 가정한다. 그러나 신체장애인과 외국인 노동자는 물론 고령사회의 노인들도 섹스를 필요로 하며, 여성 일반도 그렇다. 리얼보틱스사가 제작한 여성 전용 섹스 로봇 헨리(Henry)의 음경은 생체공학적으로 설계되어 자연적으로 팽창된 남성의 그것보다 더 낫다고 하며, 여성을 즐겁게 하는 말도 할 줄 안다(이 회사는 트랜스젠더용 섹스 로봇도 개발했다).

범죄학자들은 실물과 똑같은 섹스 로봇이 ‘노’라고 할 줄 모르고 신체를 훼손하거나 학대해도 아무런 처벌을 받지 않기 때문에, 일부 남성 사용자에게 여성의 ‘노’를 진심으로 받아들이지 않게 할 것이라고 우려한다. 이럴 때 섹스 로봇은 남성의 ‘강간 연습용’ 상대다. 범죄학자들의 이런 연구 결과가 옳다면, 지난 세기의 결혼제도 역시 강간 연습용으로 기능했다고 주장해야 할 것이다. 최근 들어 한국을 비롯한 여러 나라에서 ‘부부 강간죄’가 법적으로 인정되고 있지만, 오랜 세기 동안 결혼은 여성에게 성적 의무를 부담시켰다. 아내는 남편의 성행위 요구에 응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다시 말해 지난 세기의 결혼제도 안에서 아내는 ‘리얼돌’과 같은 존재였다. 그렇다고 해서, 아내를 상대로 ‘강간을 연습’한 남편들 가운데 얼마나 많은 남편들이 실제 강간에 나섰다는 말인가?

노리나 허츠의『고립의 시대』(웅진씽크빅,2021)에 소개된 섹스 인형 ‘냉랭한 파라(Frigid Farrah)’는 성행위에 저항하는 반응을 보이도록 설계되었다. 그런데 이 섹스 인형은 ‘노’라고 말할 수 있게 제작된 탓으로 오히려 성폭력을 조장한다는 반발을 낳았다. 소비자인 일부 남성은 ‘예스, 예스, 예스’라는 반응밖에 보이지 않는 섹스 인형보다 ‘노’라고 말할 줄 아는 냉랭한 파라를 더 좋아한 것이다.

이 글이 목적한 애초의 주제와는 거리가 있지만, ‘냉랭한 파라’는 인간 주체성이 ‘부정성’에 달려 있다고 말하는 듯하다. 부정성이 인간을 결정한다. 그러나 권력과 자본주의는 ‘노’라고 말할 수 있는 인간의 부정성을 빼앗아 ‘착한 학생’, ‘착한 노동자’, ‘착한 소비자’를 만든다. 그런 끝에 현대인은 한병철이 말한 것처럼 ‘예스’만 할 줄 아는 ‘긍정성 과잉’의 인간, 자기 착취형 인간이 된다. 냉랭한 파라가 흥미로운 것은 자본주의가 인간에게서 빼앗은 부정성을 로봇에 이식한 것이다.

리얼돌과 섹스 로봇의 초기 모델은 ‘예스’ 밖에 말할 줄 모르도록 제작되었기에, 페미니스트의 우려를 낳았다. 하지만 진전된 모델들은 인간이 인간에게 하는 것과 같은 강도의 배려와 감정을 쏟지 않으면 성기가 작동하지 않도록 설계된다. 이럴 때 섹스 로봇은 더 이상 ‘강간 연습용’이 아니라, 인간과 인간이 더 좋은 관계를 맺을 수 있도록 해주는 ‘감정 연습용’ 파트너이다.

언젠가 섹스 로봇은 인간을 대체할 수 있을 정도로 발달할 것이다. 진짜 문제는 그때 가서 생긴다. 부자는 슈퍼카를 타고, 중산층은 국산차를 탄다. 그리고 차를 살 수 없을 정도로 가난한 나라에서는 사람이 끄는 인력거를 탄다. 마찬가지로 미래의 부자는 인간보다 더 뛰어난 섹스 로봇과 살고, 중산층은 중저가 섹스 로봇과 살게 된다. 돈이 없어서 섹스 로봇과 살지 못하는 극빈층만이 인간과 섹스하게 될 것이다. 아직은 이런 지경이 아니지만, 인간은 점점 더 기계에게 정서적 친밀감을 느끼고, 기계에게 인간의 돌봄을 맡긴다. 우는 아이에게 스마트폰을 안겨주는 부모라면 결코 섹스 로봇을 비난할 수 없을 것이다. 참고로, ‘냉랭한 파라’의 진짜 문제는 12세 아동의 외모와 말투를 흉내 내도록 설계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