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뮤니티저널리즘스쿨] “나를 믿어주세요” 내 삶을 찾는 도전, 탈시설 장애인들의 이야기

자립생활주택, 탈시설 희망 장애인을 수용하기엔 부족해...
코디네이터를 비롯한 전문 인력 충원이 급선무
장애인 활동지원제도의 허점, 지자체의 각자도생
탈시설 지원을 위한 제도적 보완과 인프라 확충 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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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주=뉴스민은 전국언론노동조합 대구경북협의회, 성서공동체FM과 8월 12일부터 30일까지 ‘2023 커뮤니티 저널리즘 스쿨’을 진행했습니다. 17명의 청년들이 6팀을 꾸려 지역 문제를 탐색해 취재하고 대안을 제시하는 기사를 작성했습니다. 최우수상은 권규인, 심순경, 정진원의 <산안법 사각지대 아파트 청소노동자를 만나다>, 우수상은 박규선, 이윤호, 황민혜의 <“나를 믿어주세요” 내 삶을 찾는 도전, 탈시설 장애인들의 이야기>가 선정됐습니다. 아쉽게 수상작에는 선정되지 못했지만, 김지효, 이학선, 이현수의 <발달장애를 ‘얼마나’ 아시나요? 어머니들의 생생한 이야기>, 김민진, 김현영, 정휘의 <사각지대가 가린 사각지대; 미등록 이주노동자와 노숙인의 ‘정신건강’>, 박대성, 이동민의 <남은 사람 떠난 사람>, 김소윤, 서한희, 최미란의 <우리 교육은 건강한가요?>도 지역 문제를 고민하고 해법 모색을 위해 노력한 보도입니다. 뉴스민은 커뮤니티 저널리즘 스쿨을 통해 제작한 결과물을 제출본 그대로 독자들과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나를 믿어주세요” 내 삶을 찾는 도전, 탈시설 장애인들의 이야기

▶ 장애인 탈시설 논쟁은 한국 사회의 가장 첨예한 대립 중 하나로, 가장 정치적인 문제인 동시에 가장 감정적인 문제이기도 하다. 정치인들과 여러 분야의 시민단체는 서로 다른 통계자료를 이용하거나 유엔장애인권리협약(UN CRPD)을 서로 다르게 해석하며 상반된 주장을 펼치곤 한다. 이러한 대립과 갈등 속에서 당사자들의 이야기는 상대적으로 주목받지 못한다는 생각을 했다. 통계와 토론회에서는 볼 수 없는 진짜 삶을 확인하기 위해, 대구 탈시설 당사자들의 이야기를 들으러 갔다.

1. 임재원, 시설 생활 13년, 자립 13년 차

▲임재원씨는 영상 편집 프로젝트를 모니터에 띄워두고 있다. 그는 프리랜서 영장 편집자로, 장애인 자립 센터의 영상을 편집하는 일과 교회 영상 제작을 맡고 있다. [사진=이윤호]

임재원(33)씨의 자택에서 그의 생활공간을 엿볼 수 있었다. 더블 모니터 셋업에는 웹캠이 설치되어 있었고, 모니터 너머에는 링 조명이 배치되어 있었다. 생각하지도 못한 광경이었기에 놀랐다. 중증장애인이 할 수 있는 일에 대한 선입견에 사로잡혀 있었던 모양이다. 그는 영상 편집자로서 일을 하고 있으며, 유튜브 활동도 했었다고 밝혔다. 취재팀은 임씨의 생활공간이자 업무공간인 방에서 그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전해 들었다.

시설 입소와 교육 기회 박탈

임씨는 학교에 가고 싶었지만 받아주는 곳은 없었다. 그가 중증장애인이었기 때문이었다. 2007년 입법된 장애인 특수교육법 4조에 따르면 특수교육대상자가 학교에 입학하고자 하는 경우 장애를 이유로 입학지원을 거부해서는 안 된다. 하지만 이 규정은 오늘날에도 잘 지켜지지 않으며 장애인들은 정원이 남은 특수학급이 존재하는 학교를 찾아다니곤 한다. 중증장애인이 교문을 넘는 것은 지금도 어려운 일이나, 임씨가 9살이었던 90년도에는 더욱 가혹했었다. 임씨는 “시대적 상황 상 제 권리가 보호받을 여건이 안 되었죠”라고 했다.

임씨에게는 선택지가 많지 않았다. 휠체어 없이는 거동이 불가능한 그를 할머니 혼자 돌보기는 무리였다. 결국 그는 학교와 시설이 함께 운영되는 선명요육원이라는 시설에 갔다. 우여곡절 끝에 2년 늦은 나이에 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지만, 그가 교육 기회를 보장 받은 것은 아니었다. 그가 다녔던 대구선명학교는 지적장애 학생을 위한 특수교육기관이고, 임씨는 지적 장애가 없다. 학교에는 그를 위한 교육이 마련되어 있지 않아 한 선생님이 그를 돕기 위해 별도의 수업을 진행했으나 한계는 명확했다. 선생님은 임씨가 다른 학교에 가서 다른 수업을 받을 수 있어야 함을 피력했으나 시설 측에서는 거절했다. 임씨 한 명만을 다른 학교로 등하교 시킬 수 없다는 이유였다. 개인의 상황이나 환경보다는 시설 운영의 효율성이 우선되었던 것이다.

“여기서 죽고 싶지는 않다. 이렇게 살기에는 내 인생이 아깝다”

임씨는 지루한 학교생활을 마치고 시설로 돌아온 후에는 다른 장애인들의 관리감독을 맡곤 했다. 시설에는 발달장애인, 뇌졸중 환자, 뇌전증 환자가 많았고 일손은 부족했기에 지적장애가 없는 임씨가 동원된 것이다. 그는 뇌전증 환자들이 언제 발작이 일어나는지 감시하기도 했고, 식욕을 억제하지 못하는 시설 이용자들이 다른 이들의 식사가 끝날 때까지 기다리도록 막는 문지기 역할을 하기도 했다.

임씨는 시설 내에서의 업무를 하던 과정에서 직원들 중 일부가 시설 거주 장애인들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것을 목격했고, 이를 시설장에게 고발했다. 문제를 일으킨 직원들이 시설에서 나가게 되었지만 그는 시설 내에서 더 고립되었다. 시설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확인하고, 부당한 일이 발생했을 때 문제제기를 할 수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다.

“그 때 이후로 저는 경계해야할 대상이 되었고, 어떤 미움의 대상이었어요. 물리적으로 때리지는 않았지만 일종의 언어폭력도 들어야 했고요.”

임씨는 쳇바퀴 같은 일상을 반복하는 고독한 시설 생활을 중단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가 시설에 들어온 지 13년만이었다. 아무 것도 선택할 수 없고 아무 것도 배울 수 없는 시설에서 죽고 싶지는 않았으며, 어떻게 시설에서 나갈지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했다고 한다. 그는 탈시설을 위해 대학을 선택했다. 대학이 지역 사회보다 장애인에 대한 지원 인프라도 더 잘 구축되어 있을 것이고, 자신에게 손을 내밀어줄 사람도 더 많을 것이라는 막연한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나를 찾는 것보다 값진 것은 없다”

정상적인 교육 과정을 밟지 못했던 임씨의 성적으로는 선택할 수 있는 학과가 많지 않았다. 그는 책상에 앉아서 컴퓨터는 할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으로 컴퓨터학과에 진학했다. 하지만, 시설에서의 삶은 다시금 그의 발목을 잡았다. 배경지식 부족으로 학과 수업을 따라가는 것이 벅찼고, 퇴소 후 느껴지는 심리적 불안은 그가 공부에 집중하기 어렵게 만들었다. 열등의식으로 괴로워하던 임씨는 내가 뭘 잘할 수 있을지, 그리고 진짜 무엇을 하고 싶은지 다시 고민해보는 시간을 가졌다.

임씨는 자기 자신을 돌아보고, 인간 자체에 대해 더 잘 이해하고 싶다는 마음으로 심리학과 복수전공을 선택했다. 진짜 하고 싶은 것을 찾은 그는 다시 학습에 대한 열망이 불탔다. 그는 복수전공 시작 후 공부가 정말 재미있었고 성적도 괜찮게 받았다고 전했다. 그는 그렇게 조금씩 자신의 자리를 찾아갔다.

“제가 당시에 심리적으로 많이 불안했었다보니 그런 사람들(심리적으로 불안한 사람들)이 더 눈에 많이 들어오더라고요. 그러면 내가 할 수 있는 이야기가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임씨는 장애인 지원센터와 교회에서 상담가와 강연가로 활동한다고 했다. 영상 편집 기술을 독학해서 두 곳에서 사용하는 영상을 제작하기도 한다. 이렇게 자립 생활을 해내기까지 걱정과 불안이 많았으며, 앞으로의 삶을 생각해봤을 때 여전히 비슷한 두려움이 있다고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와서 부딪쳐 보면서 나를 알게 되는 과정이 진짜 삶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니 더 많은 장애인들이 자신의 가능성을 믿고 한 걸음 더 나왔으면 좋겠고, 시민들이 그런 장애인들을 믿고 자신의 자리를 조금 더 내어주는 사회가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그는 서로를 배려하고 함께 하는 사회에 대해 이런 말을 남겼다.

“한 사람이 존엄하게 대해질 때, 그 사람은 존엄해진다. 그리고 한 사람을 존엄하게 대할 때 비로소 자신도 존엄해질 수 있다”

2. 김진욱, 시설 생활 약 20년(추정), 자립 6년차

▲한 프랜차이즈 카페에서 김진욱씨를 만났다. 자립 후, 시설에서부터 가지고 싶어 했던 핸드폰도 가지게 되었고, 여자 친구에게 스마트 워치도 선물 받아 사용하고 있다. [사진=이윤호]

“혹시 제 말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면 편하게 다시 여쭤보세요”

김진욱(32)씨가 인터뷰 진행 중에 가장 많이 했던 말이었다. 대구 외곽 지역까지 오는 게 힘들지는 않았냐고 취재팀 걱정도 했다. 장애인은 우리 사회에서 항상 배려 받아야 하는 존재로 여겨지곤 했지만, 그는 최근 만났던 사람 중 가장 배려가 넘치는 사람이었다.

가족이 겪은 비극, 시설 입소

“저희 가족들이 다 생활이 좀 불편하셔가지고 제가 어렸을 때 시설에 입소를 하게 되었어요… 저희 가족들이 여동생을 제외하고는 다 불편한데…”

시설에 어떻게 입소하게 되었냐는 취재팀의 질문에 그는 가정사를 들려주었다. 김씨네 가족은 여동생 1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장애를 가지고 있다고 했다. 목수인 아버지는 일을 하다 왼쪽 팔을 잃었고, 어머니는 뇌를 다친 적이 있으며, 남동생은 선천적으로 말을 하지 못한다고 했다. 생계유지를 위한 노동과 가사일 전반을 아버지 혼자 해내야 하는 어려운 가정환경 속에서 김씨네 가족은 그를 시설로 보내기로 결정했다.

그는 시설 입소 전의 기억이 거의 없고, 시설에 들어온 나이도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는다고 했다. 그는 자신이 시설에 들어간 나이를 7~8살 정도로 추정하고 있었다. 시설에 살면서 그는 자신이 가족이 없다고 생각했다. 다른 시설 이용자들은 가끔 찾아오는 가족들과 만나기도 했지만 그는 그렇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탈시설 후 자립을 하면서 가족을 찾을 수 있었다. 왜 자신을 보러 오지 않았냐고 아버지에게 물었지만, 아버지는 시설 측에서 면회를 말렸다고 했다. 가족들이 시설을 방문하면 김씨가 자주 울고 밥도 먹지 않으니 오지 말라고 했다는 것이다. 김씨는 시설 측에 이 상황을 따져 물었으나 시설은 그런 적이 없다고 주장했다. 그는 그 기억이 여전히 트라우마로 남아있다고 했다.

선택이 없는 삶, “내가 왜 태어났지?”

시설에 살던 시절 그는 보호 작업장에서 일을 했다고 했다. 휠체어가 없으면 몸을 가누기 어려운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고, 비닐하우스 부품 조립 및 검수 업무 외에는 선택지가 없었다고 했다. 업무에 대한 급여가 많지도 않았지만 그마저도 마음대로 쓸 수는 없었다. 그가 가장 가지고 싶었던 것은 휴대폰이었다. 외출이 자유롭지 않았던 그에게 핸드폰은 외부와 연결될 수 있는 통로였다. 하지만 시설 측에서는 그가 핸드폰이 필요하지 않고 핸드폰을 제대로 사용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고 지적하며 구매를 할 수 없게 했다.

“제가 사고 싶은 물건들이 하나 둘 씩 늘어나는데, 그걸 누리지 못했어요. 시설 입장도 있겠지만 저의 최소한의 결정권도 존중받지 못하는 게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교육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는 원래 초등학교에 다니지 못했다. 어느 날 학교에 다니던 학생 중 한 명이 아파서 학교를 다니지 못하게 되었고, 김씨는 그 학생을 대신해 학교에 다닐 수 있게 되었다.

삶의 과정 중 어떤 것도 김씨의 선택이 아니었다. 그는 원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가 내어주는 것들만을 얻을 수 있었다. 과거의 일을 이야기하면서 그는 억울함을 호소했다. 그는 장애인에 대한 차별을 겪을 때마다 무기력증을 겪었고 “내가 왜 태어났지?” 하는 의문을 가지게 되었다고 했다. 인터뷰 중 그의 여자 친구에게 전화가 왔다. 인터뷰 때문에 나중에 연락하겠다는 내용의 통화를 하는 그에게서는 어떤 슬픔의 흔적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는 이제 자신이 원하는 것들을 가질 수 있었고, 자신을 최우선적으로 생각해주는 사람들도 곁에 있었다.

“많은 것을 부딪쳐 보고, 실패해봐라”

대구사람장애인자립지원센터 자립캠프에 참여하면서 김씨는 시설 밖의 삶이 있음을 인지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때부터 자유를 꿈꾸기 시작했다. 밖으로 나가는 것이 두렵고 걱정되었던 그였지만 동료 상담 제도를 통해서 두려움을 떨쳐낼 수 있었다고 했다.

“저를 통해서, 저의 경험을 통해서 시설 안 장애인을 도와주고 싶어요.”

동료 상담 제도를 통해 자유를 꿈꿀 수 있었던 그는 이제 탈시설을 꿈꾸는 장애인들을 위한 동료 상담가로 일하고 있다고 했다. 상담가로서 탈시설을 꿈꾸는 장애인들에게 가장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이냐고 취재 팀이 질문하자 그는 이렇게 답했다.

“무섭겠지만 많은 일들에 부딪쳐 보고, 또 실패해봤으면 좋겠어요. 그런 것들을 다 경험하면서 자립까지 이어나갔으면 좋겠어요.”

그는 정보 부족과 장애인을 돕는 시스템의 문제로 인해 탈시설이 어려울 뿐, 중증장애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탈시설의 장애물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본인 역시 중증장애를 가지고 있지만 자신이 원하는 것들을 다 이뤄나가며 살고 있으니 실패를 너무 두려워하지 말고 도전해보라고 조언했다.

3. 이수나, 시설 생활 약 30년(추정), 자립 11년차

▲이수나씨가 한 카페에서 환하게 웃고 있다. 탈시설 자조 모임의 장을 맡고 있던 시기에 모임 장소로 자주 왔던 카페라고 한다. [사진=이윤호]

이수나(43)씨와는 대구 남구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그는 해당 카페에 장애인용 화장실이 있어서 여기를 선택했으며, 이전에 해당 카페에서 탈시설 자조 모임도 자주 진행했다고 했다. 근처에 맛집이 많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건물 구조 탓에 입장이 어려워 가본 적은 없다고도 했다.

“탈시설 관련된 이야기를 많이 담아주세요. 사람들의 알권리가 중요한 거니까요”

이씨는 장애인 자립과 관련된 이야기가 더 많은 사람들에게 전해질 필요성이 있다며 탈시설 관련된 질문을 많이 해달라고 요청했다.

“시설에서만 살았으니까, 여기서 평생 이렇게 살다가 죽는 거구나 싶었어요.”

이씨는 어렸을 때부터 시설에서 살았으며, 몇 살 때 시설에 입소했는지는 정확하게 알지 못한다고 했다. 그는 시설 생활 기간이 약 30년 정도 될 거라고 밝혔다. 그 당시 시설 이용자 중 지적 능력이 있고 어느 정도 교육이 가능한 이들은 시설 내 그룹홈이라는 곳에서 지냈다고 설명했다. 그룹홈에서는 일상 훈련이 이루어졌는데, 간단한 가사 노동 등을 배울 수 있었을 뿐, 진정한 의미의 교육을 받지는 못했다고 한다. 이씨는 끊임없이 교육의 필요성을 호소했지만, 시설 측에서는 거절했다고 했다.

“기본적인 교육을 좀 받아야 되지 않겠냐고 얘기한 적은 있는데, 특혜라고 생각하시더라고요. 시설 내에 중증장애인들도 있는데, 발달장애인들도 많아서 교육을 받을 수 있는 분들이 많지는 않았거든요.”
그룹홈의 가장 큰 문제는 사생활 보호였다. 당시 그룹홈은 남성 이용자 7인, 여성 이용자 7인으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하나의 거실과 하나의 화장실을 공유했다고 했다. 다른 이의 도움 없이는 몸을 가눌 수 없는 이씨는 화장실을 이용할 때, 빈번히 자신의 몸이 남성 이용자들에게 노출되었다고 했다. 그는 시설에서 사는 기간 동안 앞으로의 삶도 평생 이럴 것이라는 좌절감을 느꼈다고 전했다.

자립 홈 경험이 인생을 바꿨다

시설에서 생활하던 중 우연히 한 사회복지사가 이씨에게 자립 경험 서비스 홍보 전단지를 전해주었다. 처음에 그는 자립홈과 그룹홈이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2주간의 체험 기간이 그의 삶을 완전히 뒤바꿔 놓았다.

“사고 싶은 것을 살 수 있었고, 먹고 싶은 것도 먹을 수 있다는 게 확실히 달랐어요… 먼저 나온 다른 사람들을 보면서 자립할 수 있겠다는 확신도 들었고요.”

하지만 이씨가 바로 자립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탈시설과 자립을 할 수 있는 기회들은 한정되어 있었고, 그는 오랜 기간 동안 시설에서 기다려야 했다. 2주 체험 후 6개월을 기다린 끝에 1달 체험의 기회를 얻을 수 있었고, 다시 1년을 기다린 끝에야 시설에서 완전히 나올 수 있었다. 그는 자립을 위한 주택 지원과 지원 인력 부족 탓에 나오고 싶은 사람들도 나올 수 없는 상황이 안타깝고 또 답답하다고 했다.

함께 사는 삶의 중요성

자립을 시작하고 나서 이씨는 보다 많은 이들과 교류하고 있다. 자립 생활을 시작하면서 이씨는 강아지와 함께 살고 있는데, 처음으로 가족이 생긴 것 같아 기쁘고 또 행복하다고 했다. 이씨는 오랜 기간 동안 탈시설 자조모임의 리더로도 활동했다. 그는 탈시설 자조모임이 자립 과정에서 일어나는 여러 일들에 대한 정보를 교환하고 외부활동도 같이하는 모임이라고 설명했다. 그 외에도 자립한 탈시설 장애인들이 겪는 어려움들에 대해 듣고 조언하는 동료 상담가 일과 장애인 인권 강사 일도 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수나라는 이름을 가진 한 명의 사람으로 살아가고 싶어요.”

이씨는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함께 어울려 사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장애인이 활동할 수 있는 영역과 그렇지 않는 영역이 분리되어 있는 사회가 문제라는 것이다.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함께하지 못한다면 서로를 이해할 수 없고, 결국 장애인과 관련된 사회적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장애인을 단순한 보호 대상으로만 바라보지 않고 한 명의 인간으로 대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다 같이 나와 살면 좋겠어요.”…
대구시 장애인 자립 지원대상 확대 필요

대구 지역사회통합돌봄 사업(이하 통합돌봄사업)에 대한 탈시설 장애인 당사자들의 만족도는 높게 나타났지만, 제반 여건은 여전히 부족해 많은 장애인들이 이용하지는 못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에 더 많은 장애인들이 자립 지원 사업의 대상이 될 수 있도록 제도적 보완과 인프라 확충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제기된다.

◆ 자립생활주택, 탈시설 희망 장애인을 수용하기엔 부족해…

장애인 자립생활주택 사업은 통합돌봄사업 중 하나로 장애인의 탈시설 및 주거 독립을 위한 주거 지원 사업을 말한다. 이는 탈시설을 선택한 장애인들이 지역사회에 완전히 정착할 수 있도록 거주 공간을 제공하는 사업이기에 탈시설 지원 정책의 토대가 된다. 하지만 자립생활주택의 수가 너무 적어 장애인들의 탈시설을 돕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2021년 9월 기준 대구시 자립생활주택은 44개소이며, 장애인 자립생활주택 이용자는 총 84명이다. 하지만 작년 기준 대구 지적장애인 시설 거주자는 572명, 중증 장애인 시설 거주자는 573명에 달한다. 노숙인 시설 등 기타 거주 시설에서 지내고 있는 장애인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고려해본다면 시설 거주 장애인의 수와 자립생활주택 이용 가능 인원의 수는 더 벌어진다. 또한 대구시는 2024년까지 자립생활주택 100개소를 운영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는데, 해당 목표를 달성한다고 하더라도 탈시설 가능 인원은 200여 명에 불과하다.

자립생활주택의 지원 적용대상도 제한적이다. 각 지자체의 자립생활주택 사업 적용 대상은 해당 지역 시설에서 탈시설한 장애인들로 한정되어 있다. 지자체 별로 자립지원 사업 규모와 지원 대상이 다르기 때문에, 장애인 자립 지원 내용에서 지역별로 차등이 발생하게 된다. 자립지원 사업이 활성화되어 있지 않은 지역의 장애인의 경우 탈시설이 훨씬 불리해지는 것이다.

자립생활주택 구조와 형태에 대한 개선이 필요하다는 의견도 제기되었다. 대구 남구는 장애인 특화시설을 설치하여 장애인들의 일상생활을 돕는 ‘무장애 주택’을 전국 최초로 건립했다. 하지만 이러한 무장애 주택은 단 1곳에 불가하며, 이를 제외한 모든 자립생활주택은 일반 주택의 형태를 띠고 있다. 이에 대해 대구광역시 행복진흥사회서비스원(이하 행복진흥원) 관계자는 최초 설계 단계부터 문턱을 없애거나 장애인 보조 핸드 레일을 설치하는 등의 조치 정도만 취해지더라도 더 많은 장애인들이 자립에 큰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 코디네이터를 비롯한 전문 인력 충원이 급선무

행복진흥원은 개개인의 특성과 요구를 반영한 개인별 장애인 자립 지원 계획을 설계하고 이를 운영하고 있다. 모든 탈시설 장애인들에게 일괄적인 교육을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개개인이 자신에게 필요한 경험을 쌓을 수 있도록 지원하는 것이다.

▲남구 무장애 주택 앞에서 신명균 씨가 행복한 미소를 짓고 있다. [사진=이윤호]

남구 무장애 주택에 거주하고 있는 신명균(62)씨는 취재 당일인 23일에 대형 할인 마트에 가서 쇼핑을 하는 스케줄이 준비되어 있었다.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을 좋아하는 신씨는 마트에 가서 사람들을 구경하고, 물건을 사는 일을 즐긴다고 했다. 시설에서부터 신씨를 봐왔던 직원들은 신씨의 인상이 많이 밝아졌으며, 자기결정권도 높아졌다고 했다. 시설에서는 ‘네’, ‘아니요’와 같은 단순한 응답을 주로 했으나, 인터뷰 과정에서 신씨는 친구들과 포항에 여행을 다녀온 일을 설명하는 등 본인이 얼마나 행복한 일상을 보내고 있는지를 구체적인 표현으로 취재 팀에게 자랑했다.

▲최상열씨가 자신이 쓴 글을 보여주고 있다. 그는 시설에 있을 때부터 글을 배우는 게 꿈이었다고 한다. [사진=이윤호]

최상열(67)씨는 남구 장애인 자립생활주택에 온 이후부터 한글 교육 프로그램에 참여하고 있다고 했다. 한글을 배워서 대중교통을 잘 이용하고 싶다고 했던 최씨는 며칠 전까지 대구시 지하철 노선도를 벽면에 붙여놓고 공부했으며 지금은 은행 업무 과정을 공부하는 중이라고 했다. 최씨는 한글을 다 배워서 자신만의 이야기를 담은 글도 쓰고 싶고, 후보자에 대해 명확하게 알아본 후 투표를 하고 싶다고 포부를 밝혔다. 또한 최씨는 지금의 생활에 너무 만족하고 있으며 같은 시설 출신의 장애인들도 모두 나와서 함께 살 수 있으면 좋겠다고 했다.

이렇듯 장애인 개인별 자립 지원 계획은 장애인들의 지역사회 자립에 크게 기여하고 있다. 하지만 모든 장애인이 신씨와 최씨처럼 개개인의 특성을 인정받으며 자립생활을 이어나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개인별 자립 계획을 운영할 수 있는 전문 인력의 수가 부족하여 자립을 원하는 장애인이 있다고 할지라도 모두 도울 수는 없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행복진흥원 관계자는 코디네이터를 비롯한 전문 인력 충원이 가장 시급한 문제라고 지적했다.

자립생활주택 운영기관 중 하나인 한사랑발달장애인자립지원센터(이하 한사랑센터)의 김국향 사무국장 역시 비슷한 의견을 밝혔다. 김국장은 현재 장애인 자립 지원 보조금의 수가 적지는 않지만 정작 그 보조금을 운영할 인력이 부족함을 호소했다. 한사랑센터의 경우 장애인 자립 지원 보조금 중 인건비 부문이 4인으로 한정되어 있어 인력을 충원하기 어렵다고 밝혔다.

◆ 장애인 활동지원제도의 허점, 지자체의 각자도생

탈시설은 장애인을 거주 시설 밖으로 내보내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탈시설 정책은 장애인이 자기결정권과 선택권을 가지고 지역사회에 정착할 수 있도록 돕는 것까지 포함한다. 이를 위한 핵심적인 제도 중 하나가 장애인활동지원제도다. 장애인활동지원제도는 장애인들의 일상생활을 돕는 일을 하는 활동지원사의 급여를 대신 제공해주는 제도를 말한다. 하지만 탈시설 과정에서 본 제도에는 크게 두 가지 공백이 발생하며, 지자체가 개별적인 지원을 통해 이 공백을 메꾸고 있다.

첫 번째는 장애인 활동지원제도 신청 가능 연령이 만 6세 이상 65세 미만으로 제한된다는 것
이다. 대구 남구 자립생활주택에서 지내고 있는 최씨의 경우 해당 연령을 넘었기 때문에 원래
라면 활동지원제도의 혜택을 받지 못한다. 현재 대구 남구청은 별도의 예산안을 편성해 자립주택을 이용하는 65세 이상의 탈시설 장애인들도 활동지원제도의 도움을 받을 수 있도록 해 서비스 사각지대를 해소하고 있다.

두 번째는 자립 체험 중인 장애인들은 활동지원제도 신청이 불가하다는 것이다. 이는 자립 체험 기간에도 그들이 시설 거주 장애인으로 등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대구시는 단기체험 장애인 활동지원서비스를 통해 활동지원 시간을 제공하는 것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고 있다.

◆ 탈시설 지원을 위한 제도적 보완과 인프라 확충 필요

한국장애인개발원의 『거주시설 장애인의 자립생활 지원체계 강화 방안 연구』에서는 탈시설 지원 정책이 지역별로 각기 다른 대상과 지원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어 지역별 편차가 심하다고 지적하고 있다. 또한 지자체의 예산 상황에 의존하는 문제 탓에 장기적인 시스템으로 정착하기 어려운 상황이라고 보고 있다. 다수의 전문가들은 지자체 단위의 지원 정책 탓에 장애인 자립을 돕기 위한 인프라 확충에 어려움이 있으며, 탈시설 지원 사업의 운영 주체가 지자체일지라도 사업 운영에 중앙정부가 개입해서 주택 확보와 인력 충원을 도와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장애인 자립 지원 코디네이터 인력을 적극적으로 양성하고, 업무 여건을 개선해야한다는 비판도 제기되었다. 행복진흥원의 『장애인 자립생활주택 운영매뉴얼 연구』에서는 코디네이터에 대한 업무 요구 수준과 난이도가 높은데 반해 임금이 낮고 고용이 불안정해서 업무 능률이 저하되고 있으며 이직율이 높다고 지적하고 있다. 전담인력 역량 강화 및 처우 개선이 시급한 상황이라는 것이다.

현장 일선에서는 탈시설을 먼저 경험한 장애인들이 새롭게 탈시설하는 장애인들을 직접 돕는 동료상담가(동료지원가) 제도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것도 하나의 대안이 될 수 있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탈시설 경험 장애인들과 행복진흥원 관계자, 한사랑센터 관계자 모두 동료상담가 제도가 탈시설 장애인의 정서적 안정과 실질적 자립 환경 구성에 큰 힘이 되었다고 입을 모았다.

장애인 자립생활주택 관계자들은 탈시설 지원 정책의 지역적 격차가 해소되고 적용 대상 제한도 완화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제도 적용 간의 지역적 격차가 존재한다면 장애인들의 본질적인 거주지 선택의 자유가 제한되는 것은 물론 자립 지원 정책이 부족한 지역 장애인들의 자립 가능성이 크게 줄어든다는 것이다. 한사랑센터 자립생활주택 담당자는 현재 경산 지역 탈시설 당사자를 돕는 중인데, 일부 지원제도의 도움을 받지 못해 어렵다는 소식을 전했다. 행복진흥원 관계자는 대구시에서 적용하고 있는 자립생활주택 활동지원제도 규정이 전국적으로 확대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행복진흥원 관계자들은 활동지원제도의 개선도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행복진흥원은 탈시설을 준비 중인 단기체험 이용 장애인은 연령과 무관하게 활동지원제도를 이용할 수 있어야 한다는 입장이다. 탈시설 장애인들의 경우 사회에 적응하는 기간이 필요하고 이를 위해서는 활동지원제도가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이다. 현재 지자체의 별도 예산으로 집행되고는 있으나, 그 탓에 적용 대상 확대에 본질적인 어려움이 뒤따르고 있다.

‘2023 대구경북 커뮤니티 저널리즘 스쿨’ 참가자 박규선, 이윤호, 황민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