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뮤니티저널리즘스쿨] 발달장애를 ‘얼마나’ 아시나요? 어머니들의 생생한 이야기

그렇게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가 아닌
1. 내 자식의 장애를 발견하다
2. 발달장애를 배우다
3. 발달장애의 특수성
4. 일상 속에서의 어려움
5. 발달장애에 관한 오해
6. 발달장애인과 그 부모에게 필요한 지원

09:48
Voiced by Amazon Polly

[편집자 주=뉴스민은 전국언론노동조합 대구경북협의회, 성서공동체FM과 8월 12일부터 30일까지 ‘2023 커뮤니티 저널리즘 스쿨’을 진행했습니다. 17명의 청년들이 6팀을 꾸려 지역 문제를 탐색해 취재하고 대안을 제시하는 기사를 작성했습니다. 최우수작은 권규인, 심순경, 정진원의 <산안법 사각지대 아파트 청소노동자를 만나다>, 우수작은 박규선, 이윤호, 황민혜의 <“나를 믿어주세요” 내 삶을 찾는 도전, 탈시설 장애인들의 이야기>가 선정됐습니다. 아쉽게 수상작에는 선정되지 못했지만, 김지효, 이학선, 이현수의 <발달장애를 ‘얼마나’ 아시나요? 어머니들의 생생한 이야기>, 김민진, 김현영, 정휘의 <사각지대가 가린 사각지대; 미등록 이주노동자와 노숙인의 ‘정신건강’>, 박대성, 이동민의 <남은 사람 떠난 사람>, 김소윤, 서한희, 최미란의 <우리 교육은 건강한가요?>도 지역 문제를 고민하고 해법 모색을 위해 노력한 보도입니다. 뉴스민은 커뮤니티 저널리즘 스쿨을 통해 제작한 결과물을 제출본 그대로 독자들과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유명 웹툰 작가가 발달장애인 아들의 특수교사를 아동학대 혐의로 고소했다는 소식이 화제다. 한 초등학교 교사의 죽음을 계기로 이들의 고소가 ‘갑질’이라는 여론이 팽배하다. 발달장애 아이를 키우는 부모는 이 사건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까. 이 사건의 이면에는 무엇이 있을까. 발달장애 아이를 키워온 두 엄마를 만나 생생한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세 자녀 중 두 아이가 발달장애 진단을 받은 ‘도현숙’ 씨
▲아이가 자라면서 자폐 진단을 받은 ‘박정선’ 씨

[그렇게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가 아닌]

박정선 씨의 이야기

시작은 미팅 대타였다. 박정선(55) 씨가 다니는 회사에서 세무서 남직원들과 미팅 자리가 주선됐다. 정선 씨는 회사에서 연말정산 조사를 받을 때 마주한 세무서의 남자 직원을 기억하고 있었다. 영수증 내역이 맞냐기에 그렇다고 답한 것 외에는 특별히 대화를 나누지 않은 그. 정선 씨는 큰 기대 없이 대리님이 시켜서 다른 직원 ‘땜빵’으로 미팅에 나갔다. 거기서 그를 다시 마주할 줄은 몰랐다. 미팅 자리는 유치했다. 여자 쪽 참석자들에게 나이, 이름, 종교 같은 인적사항을 종이에 적으라 했다. 그걸 남자들이 뽑아서 짝을 정했다. 정선 씨는 운명처럼 그와 짝이 됐다. 경상도 남자라 자상하다고 하긴 어려웠지만, 정직하고 듬직한 울타리 같은 모습이 마음에 들었다. 그렇게 스물다섯, 그와 연애를 시작했다. 3년의 연애 끝에 그와 부부가 되었다.

정선 씨는 몰랐다. 사실 자신이 미팅에 나가 종이에 신상을 적을 때, 남편이 자기 글씨체를 눈여겨보고 있었다는 사실을. 그 글씨체를 기억해뒀다가 정선 씨를 꼭 찍었다는 사실을 결혼할 때가 다 돼서야 알았다. 남편은 미팅 주선을 자기가 한 건 아니라고 극구 부인했지만, 정선 씨는 그렇게 생각했다. 운명적인 만남인 줄 알았는데, 계획적인 만남이었다고.

정선 씨는 원래 출산과 육아 때문에 직장을 그만둘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결혼 후 1년이 지나고 나서도 아이가 생기지 않았다. 병원을 갔더니, 스트레스가 많아서 아이가 안 생긴단다. 그래서 2년쯤 됐을 때 직장을 잠시 그만뒀다. 그러니 한 달 만에 첫째가 들어섰다. 아이를 어느 정도 키우고 나서 다시 일을 할 생각이었는데, 18개월이라는 짧은 텀을 두고 둘째 유정을 가지게 됐다. 유정이 태어난 뒤 생각한 청사진은 ‘꽃가게를 해볼까’ 하는 생각이었다. 정선 씨는 화훼장식 기능사 자격증을 가지고 있었고 교회 꽃꽂이를 오래 해왔기 때문이다. 그런데 둘째 아이가 좀 남달랐다. 표정도 무뚝뚝하고 이름을 불러도 뒤를 잘 돌아보지 않았다. 당시에는 경상도 남자인 남편을 닮아 그런가 했다. 유정은 형과 같이 어울려 놀다가도 어느 순간 사라져 홀로 창가에 앉아 밖을 바라보곤 했다. 좀 이상하다, 싶으면 다음날 방긋방긋 웃어 아무 문제가 없으리라 생각했다. 유정은 형 덕에 말이 빨리 트인 똘똘한 아이였기 때문이다.

그 무렵 정선 씨의 여동생이 정선 씨네 집에 방문했다. 그리고 유정을 유심히 지켜보더니 책 한 권을 건네며 말했다. “유정이 좀 이상하다.” 동생은 대학원에서 발달장애를 배우고 있었다. 그가 건네준 책도 자폐 스펙트럼에 관련된 책이었다. 정선 씨는 떨떠름하게 책을 정독했다. 자폐 스펙트럼을 자가진단하는 문항에, 유정이가 겹쳐 보였다. 유정이 15개월이 되던 쯤이었다.

시간이 지나며 유정의 말이 점점 사라졌다. 멍하게 허공을 바라보고, 그러다 까무러치게 울고 힘들어했다. 정선 씨는 유정이 22개월 쯤 대구대학교 특수교육학과에 아는 사람을 통해 검사를 받았다. 결과는 ‘유사 자폐’랬다. 아이가 어렸고 증상이 극심하지 않기 때문에 자폐라고 단정 짓기 어렵다는 의미였다. 빨리 치료하면 증상이 완화될지도 모른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렇게 5개월이 더 흐르고, 유정은 가톨릭 병원에서 자폐 진단을 받았다. 그때도 아닐 수 있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서울대병원의 자폐 관련 명의를 찾아가 어렵게 예약을 걸었다. 그렇게 어렵게 찾아간 명의에게서 받은 건, 유정의 ‘발달장애 1급 영구 판정’이었다. 그간 유정의 표정이 무뚝뚝하고 이름을 불러도 뒤를 돌아보지 않던 건, 모두 퇴행이 일어나고 있기 때문이었다.

도현숙 씨의 이야기

88학번, 89학번. 그 당시 대학가는 시위 열풍이 불어 동아리들이 연합해 시위 현장에 나가곤 했다. 연극부인 도현숙 씨는 치의대학 풍물동아리의 남편을 그때 처음 만났다. 첫인상은 ‘너무 말랐다’. 그래서 별 다른 관심이 가지 않았다. 그런데 시위를 나갈 때마다 마주치고, 또 계속 만나며 서로에게 정이 들었다. 그러던 중 학교 행사를 위해 길놀이를 하던 남편을 보고 멋있다고 느껴 두 사람은 연인이 되고 결혼 생활을 하게 됐다.

현숙 씨와 남편은 아이 둘만 낳기로 했다. 그렇게 첫째를 낳고 2년 뒤 둘째를 가졌다. 둘째가 뱃속에 있는 지 5개월 무렵, 몸이 급격히 나빠졌다. 얼굴에 있는 온 구멍이 아팠다. 아이가 있기에 약을 먹지도 못하고 겨우겨우 견뎌냈다. “이 아이를 끄집어내고 싶다.” 검사를 하러 갈 때마다 얌전한 아이였기에 그저 빨리 낳아서 아픈 게 끝났으면 했다.

아이는 얌전한 아이가 아니었다. 모자동실의 산모들이 하나둘씩 제 아이를 받을 때, 현숙 씨는 아이를 보지 못했다. 뒤늦게 나타난 의사가 “아이가 이상합니다. 팔다리를 펴지 못하고, 팔을 펴보려 하면 자지러지듯 울기만 합니다. 우선 중환자실에 있으니….”라고 했다. 그 병원에서 수련의를 하고 있던 남편도 그 이야기를 금방 들었다. 이 아이는 신체에 이상이 있겠구나, 생각했다. 의료에 종사한 덕분인지 아이에게 불편함이 있을 거라는 것에 크게 절망스럽지는 않았다고 한다.

그런 남편조차도 무너졌다. 팔다리가 움직이지 않는 아이는 3개월 때 소아마비 판정을 받았다. 게다가 아무리 시끄러운 곳에 있어도 아이가 아무 반응을 하지 않아 청각 검사를 해보니 청각 장애가 있어 2급 판정을 받았다. 청각장애 등급은 2~6급. 가장 높은 등급이다. 그 후 발달장애 판정을 받았다. 하나의 장애만 있어도 고통스러운데 세 개의 장애가 한 아이에게서 연달아 나타났다. 청각장애 판정을 받은 그날 새벽, 남편은 술에 잔뜩 취해 쓰러지듯 울었다.


1. 내 자식의 장애를 발견하다
[우리 집은 절대로 행복할 수가 없어]

도현숙 씨의 이야기

소아마비, 청각·발달장애를 가지고 태어난 둘째를 덤덤하게 받아들인 덕분일까. 부부는 장애아를 키우는 게 생각보다 어렵지 않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어차피 둘째로 인해 회사로 복귀하지 못했으니, 첫째 아이에게 친구를 만들어주고 싶었다. 그러나 그렇게 낳은 막내도 ‘남달랐다’.목가누기가 되지 않았고, 척추가 반쯤 휘어져 숨 쉬고 밥을 먹는 게 어려웠다.

“둘째가 3개월 차에 청각장애 판정을 받고, 또 그때부터 물리치료를 시작했어요. 매일매일 물리치료를 하러 다니고 매일매일 아이를 지켜보고 한다는 게 사실 쉽지는 않잖아요. 근데 막내가 태어나서 목가누기가 안 되는 걸 봤을 때 ‘어?’ 좀 의아한 생각이 들면서…. 둘째를 제가 손에서 내려놓은 적이 없는데, 셋째는… 껴안는 게 좀 힘들었어요. 그래서 그냥 내려놓고 지켜보기만 한 거 같아요. 다시 오빠(둘째)가 한 그 과정을 다시 해야 한다라는 게, 굉장히 힘들었어요.”

박정선 씨의 이야기

정선 씨는 앞이 캄캄했다. 삶을 모두 부정당하는 기분이었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하는 생각이 드는 동시에 ‘평범한 삶’에서 배제가 될 거라는 상상으로 괴로웠다. “남편이 기분 전환하자고 영화 보러 가자 해서 영화를 봤는데 스크린에 우리 아이 얼굴이 대문짝만하게 나타나면서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내 아이는 이것도 못 느낄 거야. 영화를 보면 걔는 모를 거야.” ‘내 삶’이 없어질 정선 씨 자신의 삶도 힘들겠지만, 평생 손가락질 받고 비장애인들이 누리고 느끼는 것들을 경험하지 못하고 살아갈 유정이 너무 불쌍했다. 과거 직장에서 장애인 시설에 봉사활동을 갔을 때 마주했던 아이들 생각이 났다. 살고 싶지 않았다.

온 집에 커튼을 쳤다. 전화도 받지 않고 일주일간 은둔생활을 했다. 먹는 음식은 그대로 다 토해냈다. 남편이 억지로 정선 씨를 부축해 음식을 입에 대줘도 먹는 즉시 다 게워내고 말았다. 그러다 꿈을 꾸게 됐다. 모든 상황이 회복되는 꿈을. 꿈에서 깨어난 후 주변을 둘러보니 유정이 곁에 있었다. 어린이집을 갔다 온 첫째 종희에게 밥도 해줘야 했다. 모든 상황이 힘들어 잠적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엄마’니까 회복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정선 씨는 장애에 관한 공부를 시작했다.


2. 발달장애를 배우다
[아이를 이해하고 싶었다.]

박정선 씨의 이야기

정선 씨는 미친 듯이 인터넷을 뒤졌다. 유정의 치료법을 찾기 위해서였다. 영어로 자폐를 뜻하는 ‘autism’을 검색했더니 안양의 치료기관이 나왔다. 사이트에 들어가 게재된 내용을 읽었다. 완치 사례가 있었다. 상담을 신청했더니, 29개월인 지금이 치료 적기라며 하루빨리 올라오라는 답을 들었다. 아이를 생각하면 마음이 너무 힘들었는데 한 가닥 희망이 잡혔다. 유정을 고칠 수 있다니. 그래서 일주일 만에 집을 팔고 윗동네(안양)로 올라갔다. 남편과 주말부부로 지낼 결심을 한 채로. 아이를 완치시켜야겠다는 생각이 컸다.

“진짜 꼭두새벽부터 뻘 체험을 가요. 안양 근처에 오이도가 있거든요. 감각이 예민하니까 펄을 밟을 수 있는 갯벌을 가고, 땡볕에 소금 염전 체험하러 가고, 당시 센세이션했던 시민의 숲이라는 서울 공원에 가서 지압 길 걷기 하고, 몽촌토성에 갈대밭 가고, 슈퍼마켓 같은 데 가서 과일 만져보게 하고. 지방에서 올라온 엄마들 몇 명이서 강행군을 했어요. 오전에는 인덕원역 쪽에서 6교시까지 치료받고 오후에는 도시락 싸서 안 가본 데가 없어요. 언어치료실, 감각통합실 이런 데를 또 다니고. 당시 인덕원역 지하철에 엘리베이터나 에스컬레이터 같은 게 없었어요. 애를 포대기에 업고 가파른 계단을 오르면서, 진짜 여전사처럼 그러고 다녔어요. 당시 한 달 치료비가 80만원이었는데, 월급의 절반 정도였어요. 남들 다 돈 모을 시기에 제 퇴직금하고 돈 있는 거 다 쓸 지경에 이르고, 시댁에도 손 좀 벌리고 했었죠.”

그렇게 1년을 내리 바쳤다. 16개월 이후부터 퇴행한 케이스라 열심히 교육하면 회복시킬 수 있겠다는 생각에서였다. 하지만 그 생각은 산산이 부서졌다. 유정의 상태에는 변화가 없고 퇴행도 더 이뤄졌다. 소리 지르기 같은 별별 문제 행동들이 다 나왔다. 그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정상’이 되긴 힘들겠구나. 그동안의 자신을 돌아본 정선 씨는 생각했다. “맨날 유정이 보고 안 돼, 하지마, 이렇게 하면 안 돼. 말했는데 얘가 어디 가서 칭찬이라는 걸 들을까, 집에서라도 좀 칭찬해주자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때부터 조금이라도 잘하는 게 있으면 찾아내서 헐리우드 액션으로 과장해서 칭찬하기 시작했어요. 내가 삐에로구나, 이런 생각을 했어요. 속은 슬프고 힘든데 겉으로는 얘한테 웃음을 줘야지 하는 생각으로.”

생각을 바꾸고 인정하니 정선 씨 눈에 아이의 사랑스러운 모습이 눈에 더 잘 들어왔다. 마음가짐이 바뀌자 아이가 더 안정됐다. 문제 행동이라 생각했던 ‘모든 곳에 낙서하기’도 아이의 장점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유정은 벽과 바닥에 그림을 그리다 못해 나무 벤치를 파듯 집착해서 그림을 그렸다. 좋아하는 ‘환풍기’를 보면 집에 돌아와서 환풍기를 천 대씩 그리곤 했다. 소방차를 보면 소방차를 그렸다. 이런 행동을 관점을 바꿔 바라봤다. 오히려 아이가 밖에서 뭘 봤는지 대화 없이도 파악할 수 있어 좋았다. 벽에다 전지를 붙여 마음껏 그리게 했다. 정선 씨는 말한다. “엄마가 편해지니 유정이도 편해진 것 같아요.”

그림에 관심이 많은 유정을 위해 그림 과외 선생님을 모셨지만, 선생님이 유정을 감당하지 못했다. 그래서 정선 씨가 택한 길은 아이의 감정도 읽고 장점도 발전시켜줄 수 있는 미술 치료 공부였다. 마침 유정이 7살 때 ‘활동 바우처’ 제도가 생겼다. 40시간 정도밖에 나오지 않았지만, 그 덕에 초등학교에 들어간 활동 보조인에게 하루 두시간 정도 유정을 맡기고 짬이 나는 시간에 공부를 할 수 있었다. 그렇게 정선 씨는 미술치료사가 됐다. 발달장애인 아이의 엄마로서 직접 보고 겪은 아이의 감정 변화와 심리를 적극 활용했다. “천직을 찾았어요. 저는 미술치료가 너무 좋고 이 직업을 통해서 만나는 친구들이 너무 좋아요. 또 나와 같은 마음의 엄마들을 너무 잘 아니까 그분들과 많은 얘기를 할 수 있거든요.” 아이 덕에 정선 씨의 새로운 미래가, 새로운 시각이 열린 것이다.

도현숙 씨의 이야기

“우리 아이 눈을 보는데, 우리 아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전혀 모르겠는 거예요. 그리고 부모로서 장애를 가진 아이를 케어하려고 하니까, 너무 어려웠어요. 내가 모르니까.” 그렇게 현숙 씨는 대구사이버대학 특수교육학과에 편입했다. 아이를 조금이라도 알기 위해서였다.

그곳에서 배운 ‘응용행동분석’은 현숙 씨의 시야를 바꿨다. 그 전에 장애인 교육은 모두 행동수정, 즉 장애아이를 ‘고쳐서’ 비장애인처럼 만드는 것이다. 그러나 응용행동분석은 아이 자체를 보고 아이의 행동이 장애 때문인지 혹은 특성 때문인지 분석한 뒤 고칠 수 있는 부분을 찾는 것이다. 타인을 때리는 행동이나 바지를 벗는 행동들은 고쳐야 하는 것이지만, 수저를 줄 세운다거나 하는 것들은 발달장애인이 가진 높은 불안을 낮추는 행동이다. “그거는 주변에서 지켜봐주면 되는 거예요.”

현숙 씨가 경산에 살 무렵 자주 가던 횟집이 있었다. 현숙 씨의 둘째 아들이자 발달장애인 장명근 씨는 식당에 가면 매번 컵을 나열하거나 수저를 꺼내 줄을 세웠다. 현숙 씨는 처음엔 이를 민폐라 여겨 매번 식당 주인에게 사과했다. 그러나 어느 순간 주인이 그냥 놔두라고 했다. “위험한 거 아니니까 나중에 우리가 한 번씩 더 씻으면 된다. 그거 어려운 거 아니다.” 아이의 불안으로 나온 행동을 이해해준 사람을 만난 것이다. 사회에서 아이가 받아들여질 수 있다고 배운 첫 사례였다.


3. 발달장애의 특수성
[맞아도 맞았다고 말할 수 없는 아이]

오랜 시간 장애 부모를 만나오고 그 자신도 장애 아이를 키우고 있는 사람은 발달 장애를 어떻게 정의할까. 전은애 함께하는장애인부모회 대표는 발달장애를 과학기술이 발전한 미래의 마지막 순간까지도 남게 될 장애라고 표현한다. 신체 기능적으로 보조할 수 있는 지체장애 등과 달리, 시간이 흘러도 그 당사자가 무엇을 원하는지조차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자신의 권리 옹호를 어떤 방식으로든 할 수 없다는 것도 특징으로 꼽는다.

전 대표는 유명 웹툰 작가 가족의 사례가 통합교육을 제대로 하지 않았기 때문에 일어난 문제라고 지적했다. 통합교육을 가로막는 가장 큰 정서는 ‘학습권 침해’다. 고3 교실에서 시끄럽게 돌발행동을 한다고 생각하면 그 어떤 부모라도 눈을 찌푸리지 않겠느냐는 논리다. 소위 ‘걸리적거리는 존재’다. 아무리 인권교육을, 장애감수성 교육을 해도 교실 안에서 그 사실은 달라지지 않는다. 교육의 목적이 ‘함께 살기’가 아니라 ‘높은 성적을 받아내는 것’에 고정돼 있기 때문이다.

전 대표는 우리가 교육의 방향을 바로잡고 제대로 함께 살기위해 노력한다면, 반드시 함께 살 수 있다고 말한다. 장애아동이 문제를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장애 아동이 있음으로 기존의 문제가 드러난 것이라고 역설한다. 장애인과 함께 살아본 적 없는 사회여서 발생하는 불협화음은 함께 살아서 해소하는 수밖에 없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도현숙 씨의 이야기

“발달장애인들은 기본 특성이 강박, 불안이 굉장히 높아서 자신의 강박, 불안에 의해 누구도 예상치 못한 돌발행동을 하는 게 특징입니다. 특히 오감이 굉장히 민감한데, 이게 비장애인들이 느끼는 게 아니라 왜곡된 형태로, 그들만의 감각으로 느낀다고 생각하시면 돼요. 비장애인들에게는 절대 자극적으로 느껴지지 않는 일상적인 소리, 빛, 냄새, 촉각 등 그들이 모두 다르게 느낀다고 생각하시면 돼요. 발달장애인 개개인이 모두 달라요. 그래서 평균값이란 걸 도출할 수가 없어요. 평생을 함께 살아온 가족도 그 기준값을 알 수가 없고, 그래서 돌발 상황에 대비조차 안 되는 거예요.”

▲스트레스로 인해 이마가 해질 정도로 긁고 있는 장명근 씨

명근 씨는 10여 년 전 척추측만증 수술을 한 뒤 약물부작용으로 ‘악성신경이완증후군’이 생겼다. 이는 현재진행형이다. 상태가 괜찮다가도 다시 몸이 좋지 않을 때면 머리를 쥐어뜯거나 이마 살갗이 벗겨질 정도로 긁어대기도 하고, 일주일씩 날밤을 새기도 한다. 이 모습이 2주 간격으로 나타난다. 현숙 씨는 그럴 때면 명근 씨와 함께 밤을 새주곤 하는데, 이제는 나이가 있어 체력이 되지 않는다고 한다. 그래서 어제는 먼저 잤더니 그것이 명근 씨에겐 큰 스트레스가 되었다.

“아마 본인 입장에서는 본인은 못 자고 있으니까 좀 화가 났겠죠. 졸다가 잠깐 또 눈을 떴는데, 온 주방이 다 설탕인 거야. 상상되세요? 주방 바닥이 다 설탕이야. 그래서 어제, 아니 오늘 새벽에 청소기 막 밀었어요. 원래는 정수기 열어서 한강 만들고, 냉장고 문 열어두는 정도였거든요. 근데 설탕은 이번이 처음이었어요. 바닥에 뭐 이렇게 조금 흘린 게 아니고 그냥 다 흩뿌렸고, 어젯밤에 남편이 다 샤워를 시키고 잤는데 온몸이 설탕 범벅이고.”

“새로운 게 뭔가가 나왔다는 게 무슨 말이냐면은, 우리가 또 대처해야 할 것들이 한 가지 더 늘었고 또 앞으로 더 늘어날 거란 거예요. 설탕이나 이런 거 다 치워놓고 또 다르게 해야지, 뭐 어쩌겠어. 발달장애인들은 ‘더 예민하다’기보단, ‘예견할 수 없는 민감성’이라 표현하는 게 더 맞을 거예요.” 예전에 A만큼의 스트레스에 B라는 반응이 나타났으니 이번에도 그럴 것이라는 게 참이 될 수 없다는 뜻이다.

“어쩌면 평균값을 자꾸만 아이들에게 제시하고 또 반응하길 요구하기 때문에 또 힘들 거예요. 저도 그걸 알면서도 사람인지라 그렇게 되니까 또 힘들고, 다시 정신차리고.”

박정선 씨의 이야기

“저는 주호민 씨 부부 심정도 이해가 가고 특수교사도 안 됐다는 생각이 들고 이해가 가요. 그런데 그들 부부가 너무했다는 생각은 들긴 했거든요. 먼저 만나서 얘기하는 게 맞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들고. 그런데 그렇게밖에 할 수 없었던 그 마음은 또 이해가 가요. 우리 아이들이 일반 아이들한테 섞여 있는 경우에 왕따 당하고 놀림 받고 어떨 때는 두드려 맞기도 하거든요.”

정선 씨는 유정이 통합학급을 다니던 초등학생 시절 교문 앞이나 복도에 서서 항상 아이를 기다렸다. 아이를 학교에 보내면 학교가 아이를 책임지는 게 맞았지만, 그때는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지금은 그때보다는 인식이 개선되어 장애아 부모들의 생각이 달라진 것 같다고 했다. 좀 더 적극적으로 학교와 교사에게 책임을 요구하는 방식으로. 하지만 정선 씨는 말한다. “그런데 항상 우리는 약자는 맞아요. 일반 학급에도 이 친구들이 배치되지 않기를 바라고, 특수학교를 지으려고 해도 데모하고 반대해서 못 들어오게 하잖아요. 그래서 1시간 넘게 스쿨버스 타고 다니는 학생들도 있거든요.”

정선 씨는 유정이 밖에서 멍들어오면 어디서 멍 들었냐 물어도 대답을 못하고 아팠다고만 한다고 증언했다. 그런 일이 생기면 정선 씨는 유정에게 두 가지 선택지를 제시한다. 유정이 간 곳을 유추하여 A인지 B인지 선택하게 만드는 방식이다. 그렇게 시간과 장소를 유추해서 유치원 교사에게 전화하면 그제야 상황의 전말을 전해들을 수 있었다. 아이를 통해 겨우 안 내용을 추후에 교사에게 듣게 된 엄마는 속이 상한다. 그래서 정선 씨는 “엄마의 마음까지는 안 바라지만 사랑의 마음, 긍휼의 마음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자기 연민이라는 말은 장애아 부모 당사자가 안 되어 봐서 그런 말을 한다고 생각해요. 장애를 가진 부모는 내가 장애가 있는 것보다 더 마음이 아프거든요. 정말 그래요. 아이가 어디 찢어져 오면 찢어진 게 내 살이 아픈 것처럼 느껴져요. 그런 아픔을 자기연민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아픈 말인 것 같아요.”

정선 씨는 수도 없이 겪고 들었다. 체육시간 2시간 동안 아이를 안 데리고 가거나, 학교에서 체험학습을 갈 때 중간에 아이를 놓쳐 3시간 동안 제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게 하는 등 발달장애인 아이들과 그 부모들이 겪은 이야기를. 비장애인 아이들은 작은 얘기도 엄마한테 가서 말하려 한다. 하지만 많은 발달장애인은 어떠한 말도 하지 못한다. 그렇기 때문에 정선 씨는 사람들이 ‘자기연민’ 같은 아픈 말을 장애아 부모에게 들이대는 대신 “오죽했으면 그럴까” 하는 마음으로 바라봐주길 바랐다.


4. 일상 속에서의 어려움
[제 삶은 여전사였어요.]

박정선 씨의 이야기

정선 씨는 유정이 동선을 벗어나 여기저기 다니는 게 너무 힘들었다고 말한다. “학교를 뛰쳐나간다든가 집에서 뛰쳐나간다든가 이런 것들은 어릴 때는 없었거든요. 근처 잠깐 갔다가 돌아오는 정도였지. 그런데 중학생 되고 사춘기가 오면서 뛰쳐나가는 반경이 넓어지는 거예요. 그럼 학교에 비상 걸리고.” 경찰서에 실종 시 참고를 위해 사진을 비치해뒀을 정도다. 그런 그에게는 잊지 못할 에피소드가 있다. 바로 ‘광명역 사건’이다.

“어떤 날은 혼자 학교를 탈출해서 KTX를 타고 광명역을 갔어요. 애가 학교에서 사라져서 동선 될 만한 곳 CCTV를 다 뒤졌어요. 그랬더니 애가 버스 타고 동대구역을 가서, 공익요원도 지나치고 쏜살같이 기차로 들어가버린 거예요. 서울 가는 방면을 확인하고 그냥 타서, 대전에서 철도경찰한테 표 없이 탄 걸 걸려서 경찰서에 갔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기차 타고 대전에 올라가서 유정이를 데려온 적이 있어요.” 버스 타고 나가고, 지하철 타고 나가고, 사람들한테 민폐도 많이 끼쳤다고 한다. ‘왜 애를 제대로 안 보냐’는 얘기를 듣는 건 다반사였다. 특히 학교에서 선생님들이 너무 힘들어했다. 그래서 정선 씨는 유정이 중학교 1학년 2학기 때 새로 생긴 특수학교로 전학을 결심했다.

기억에 남는 주변인들도 있다. 안양에서 지낼 때의 일들이다. 같이 치료받으러 다니던 한 엄마가 정선 씨와 같은 대구 사람이었다. 남편은 지방에 있고 엄마는 안양에 올라와서 방 하나 얻어 아이에게 모든 걸 쏟아부으며 치료하는 상황이었다. 정선 씨의 남편은 매주 올라왔지만, 그 가족은 남편 회사가 바빠 자주 오지 못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들 가족은 부부 관계가 안 좋아져 이혼하게 됐다. 그래서 어린 나이에 아이가 시설에 가게 됐다. 장애 아이 때문에 이혼하는 가정이 많았다. 그집은 남편이 아이를 데리고 갔기에 아이가 초등학생쯤 됐을 때 엄마가 시설로 아이를 보러 갔다. “완전 그냥 짐승같이 살더라.” 정선 씨가 그에게서 들은 말이다. 안양에서 지낼 당시 그 아이와 유정은 비슷한 상태였다. 엄마와 함께 생활하며 지속적으로 교육을 받은 유정과 달리 어린 나이에 시설에 입소한 그 아이는 상태가 악화되어 있었다.

“치료실에서 만났던 또 다른 엄마가 있어요. 아이 데리고 와서 잘 웃고 했는데, 며칠 뒤에 일가족이 자동차에 타고 강으로 뛰어들어 사망했거든요. 그때 굉장히 충격을 받았어요.” 정선 씨는 말한다. 자녀가 중증이어서, 또 사회적 편견 때문에 장애 아이를 돌보는 게 힘들고 고달팠겠다고. 그래서 이들, 어머니들은 외친다. 부모와 자식이 어느 정도 분리돼서 엄마도 엄마 나름의 삶을 살고 자녀도 안정적인 곳에서 보호받게 해달라고.

도현숙 씨의 이야기

현숙 씨는 원래 다른 분들에게 굉장히 ‘미안했다’고 한다. 받아들이기 어려운 행동을 하는 아이들 때문이었다. 그러나 한 사건으로 인해 공격적으로 나서자고 결심했다.

“마트에 가서 장 보는데, 잠깐 물건을 고르는 사이에 손을 놓친 거예요. 근데 그 사이에 저쪽에서 난리가 난 거예요. 뭔 소리고 보니까, 저희 아이가 다른 아이를 터치를 했어요. 근데 강도나 이런 게 저희(비장애인)처럼 살살하는 게 잘 안 되잖아요. 때리는 것처럼 터지를 했겠죠. 그래서 급하게 쫓아가서, 아이한테 ‘너 다른 친구 그렇게 하면 친구가 아파. 너 잘못한 거야’ 하고 설명을 하고 사과를 했어요. 어머니한테도 제가 사과를 했고, 아이한테도 미안하다고 사과하라고까지 다 했어요. 아이도 주뼛거리더만 ‘미안해’ 사과를 하고.”

“근데 그 친구 어머니가, 굉장히 날이 서있는 거예요. 계속 막 저희한테 뭐라고 어필하고. 그래서 다시 설명을 했어요. 우리 아이가 장애가 있어서 조절이 잘 안 된다, 그래서 우리 애한테 설명을 하고 또 사과도 드렸지 않느냐. 그런데도 어머님이… 어… 안 받아들이시고, 막 계속 뭐라 하시더니… 제가 보는 앞에서 때리는 거예요. 저희 아이를, 탁!”

그날 저녁, 현숙 씨는 남편과 이야기를 나눴다. “우리 아이가 다른 사람한테 폐를 끼치는 건 맞지만, 그 폐라는 게 부모가 보는 앞에서 아이가 맞아야 할 정도의 폐일까.” “아이가 잘못한 건 맞지만, 그게 수용되지 않고 늘 비난의 대상이 된다면, 우리 아이가 늘 비난만 받고선 살 수가 없잖아요. 그러면 그때 우리 아이를 보호할 수 있는 입장에 있는 게 사실 엄마거든요. 엄마고, 아빠고, 또 가족이고.”

기억에 남는 경험 몇 개만 말했지만, 실제로는 수없이 많게 경험했다. 처음에는 양해를 구하고 조곤조곤 이야기 하더라도 아이를 보호해야 하는 경험이 한 번에서 두 번, 세 번, 열 번, 백 번씩 쌓이다 보면 사람이라면 어느 순간 그 누구라도 화도 날 거고 그러면서 공격적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했다.

특수교사와의 갈등도 있었다. 명근 씨가 초등학교 1학년이던 2004년, 명근 씨의 특수반 활동을 지켜보러 간 현숙 씨에게 원적반 선생님이 말했다. “웬만하면 전학을 해라, 저 특수교사 선생님은 내가 봤을 때 아니다.” 그 말을 들은 현숙 씨는 특수교사에게 ‘교육 계획안’을 보여달라 요청했다. 그러나 특수교사는 “교육 계획안을 가짜로 짜기 때문에 보여줄 수 없다”고 했다.

특수교사는 개별화 교육 계획안(IEP)를 작성해야 한다. 이는 교육 프로그램이 개별적으로 장애 영유아의 교육적 요구에 맞추어지는 것을 뜻한다. 그렇기 때문에 부모도 IEP에 참여할 수 있으며 보여달라고도 할 수 있는데, 당시 특수 교사는 그럴 수 없다고 못 박은 것이다. 그러나 그런 상황에서도 현숙 씨는 차마 화내지 못했다.

“원반 선생님은 1년만 하고 또 담임선생님이 바뀌잖아요. 근데 특수 교사 선생님은, 이 학교에 있는 동안 계속 우리 아이를 봐야 되거든요, 몇 년 동안 봐야 하는 사람한테 제가 뭐라고 막 세게 어필을 못했어요. 근데 지금 생각하면 되게 바보스럽죠.”

만약 아이와 하루만이라도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면 어떤 이야기를 나누고 싶을까. “너 아플 때 어떻게 아파? 묻고 싶어요. 우리가 파악하는 거는 우리가 아플 때와 같이 아프지 않을까, 미루어 짐작하는데 표현하는 게 다르잖아요. 막 머리를 두드리는데 이마가 다 해질 정도로 두드리거든요. 머리를 막 뜯고. 그게 어딘가 불편하니까 두드리고 뜯을 거 아니에요. 근데 어디가 어떻게 불편한지 모르니까, 하루 얘기가 통한다면 머리를 두드릴 땐 머리가 어느 정도로 어떻게 아프다, 이런 얘기를 듣고 싶어요.”


5. 발달장애에 관한 오해
[장애라는 전제를 다는 순간 다양성은 사라진다]

도현숙 씨의 이야기

발달장애는 ‘정신’ 장애다. 운동성 장애를 중복으로 가지고 있지 않다면 보행에 문제가 없어 지체장애인이나 뇌병변장애인들과 비교가 되기 십상이다. 잘 걸어다닌다는 이유 때문이다. 시각·청각 등 감각 장애인과도 비교가 된다. 잘 보고 잘 듣는데 왜 장애라는 것이다. 눈에 보이는 것만으로 판단하면 결국 발달장애는 비장애인과 차별이 없다는 전제를 두게 된다. 그러나 발달장애인의 기본 특성은 자신만의 강박과 불안이 굉장히 높다는 것이다. 그로 인해 그 누구도 예상치 못한 돌발행동을 한다.

“남편이 휴가를 갔을 때였어요. 저희 집은 쉴 수 있는 사람만 우선 쉬고 남은 사람이 고생하자는 주의거든요. 그런 게 잘 돼 있는데, 아빠가 휴가를 갔잖아요? 새삼스럽게 얘한테 스트레스가 됐겠죠. 걔가 엄마를 괴롭히는데 막 제 머리를 뜯고 그런 거예요. 제가 머리숱이 적은 편도 아닌데 아들한테 다 뽑혔어요. 저희 집이 통침대였는데 아이가 날뛰면서 발을 콱 찍으니까, 애 발은 괜찮은데 침대에 구멍이 뻥 뚫렸어요. 통나무 탁자도 어른 서너 명이 같이 들어야 하는 걸 혼자 벌컥벌컥 뒤집고.”

당시 명근 씨는 약물부작용으로 인해 신경계에 이상이 왔을 때였다. 그러나 자신의 불안이 높아지거나 강박이 깨졌을 때 폭력적으로 표출하는 것은 특수한 경우가 아니라 오히려 일반적인 경우라고 설명했다. 현숙 씨는 지인의 사례를 들려줬다. “무조건 토요일에는 외출해야 한다는 거예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근데 살다보면 토요일에 일이 생길 수도 있잖아요? 어른이 돌아가셨다든지. 그래서 외출을 못하면, 그러면 이제 뒤집어 지는 거예요. 자해하는 애들도 있고 다른 사람한테 폐 끼치는 애들도 있고. 막 무는 애들도 있어요. 그런 거 보느니 차라리 내가 토요일 없애고 말겠다, 하는 거죠.”

우영우나 장애인 관련 광고와 관련해서도 도현숙 씨는 부정적인 반응을 내비쳤다. “대부분의 비장애인들이 바라보는 시각에 어떤 게 생기느냐 하면은, ‘집안에서 잘 케어하고, 잘 가르치고, 잘 교육하면 저렇게 될 것이다’라는 선입견, 편견이 생겨요. 왜? 아이에 대해 열심히 케어하고 최선을 다한 부모로 치면 나도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데, 우리 아이들은 지금 어떤가 보면 ‘전혀’거든요. 그리고 어려운 장애인일수록, 어려우면 어려울수록 부모님이 정말 더 많이 애쓰거든요. 오히려 이래서 다양성을 잃어버리는 것 같아요. 비장애인들도 능력치가 다 다르잖아요? 장애인들도 다 다르다고 생각해야 돼요. 근데 그 다르다라는 전제가 ‘장애’라는 이름을 달면 어느 순간 없어져요.”

“간혹 가다 천재적인 자폐를 가진 인물이 있을 수도 있어요. 근데 저는 아직까지 그 정도의 천재적인 자폐는 못 봤어요. 30년 동안 그동안 활동을 제법 많이 했는데 주변에 그림을 잘 그리는 친구는 봤어요. 이렇게 예술적으로 그림을 잘 그린다든지 음악적으로 절대 음감이라든지, 그런 친구들은 tv에서도 보여주고 하니까 그냥 있는데. 현실적으로 그 정도의 고기능 자폐는 잘 없더라고요.”

나아가 발달 장애인 안에서도 스펙트럼이 굉장히 넓기 때문에 장애인의 부모 사이에서도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고도 한다. “우리 아이는 이 정돈 아닌데, 얘는 이 정도네? 하는 경우가 되게 많아요.” ‘발달장애’라는 이름으로 묶이지만 그 안에는 지적 장애와 자폐성 장애가 있다. 또한 1~3급으로 급수가 나뉘고 명근 씨처럼 또 다른 장애를 복합적으로 가진 중복 장애인, 그 정도가 심한 중도중복장애인도 많기 때문에 뭉뚱그려 한 단어로 표현하기란 어렵다는 것이다.

박정선 씨의 이야기

“시어머니가 그런 얘기를 하셨어요. 형제는 아무도 이런 애가 없는데 이런 애가 어디서 태어났지? 니가 어떻게 뭐 잘 생각해 봐라 너 임신했을 때 뭐 잘못 먹은 거 없나. 아니면 애 잘 봤나 약을 잘못 먹은 거 아니냐, 이런 얘기 하셔서 제가 너무 많이 슬펐거든요. 아버님은 유정이 오면 마음이 아파서 그렇겠지만 뒷짐 지고 밖에 나가시고 그래서 되게 죄인인 것 같았어요.” 정선 씨는 차츰 시간이 지나면서 알게 됐다. 유정이 발달장애를 갖게 된 이유가 자신의 잘못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환경적 요인이나 뇌의 결함 때문이라는 것을, 또 누구나 가정에 이런 친구가 찾아올 수 있겠다는 것들을 부모 교육도 하고 책도 찾아보면서 알게 됐다.

“어렸을 때는 사람들이 지하철을 탔을 때 유정이가 문제 행동들, 가만히 못 있고 왔다 갔다 하고 의자 같은 데도 막 올라가려 하고 제가 제재하려 하면 소리 지르기도 했어요. 유정이 외모는 정상이니까 사람들이 아이가 왜 그러는지 이해를 못하고 애를 버릇없이 키운다는 그런 표정으로 보고 그런 질책도 받았거든요. 오해 받았던 그런 시선들이 제일 힘들었던 것 같아요.”

‘엄마가 똑바로 해야지.’ 정선 씨가 수도 없이 들은 말이다. 지하철에서 만난 어떤 노인은 아이가 그렇게 난리를 치는데 엄마는 뭐 하고 있냐고 정선 씨를 윽박질렀다. 어떤 사람들은 혀를 차거나 빤히 보고 가기도 한다. 그럼 정선 씨는 마음이 아프다. “저는 시선과 생각들이 바뀌어야 된다고 생각해요. 가정마다 생활이 각각 다르잖아요. 그렇듯이 우리 집에도 특별한 아이가 한 명 왔다. 누구든 자신이 결혼해서 저런 아이를 낳을 수 있고 내 손자도 저렇게 태어날 수가 있다는 사실을 명심했으면 좋겠어요.”

한편 정선 씨는 ‘우영우’ 같은 드라마가 현실을 완벽하게 반영하지 못했다고 본다. 발달장애인들은 백이면 백 증상과 상태가 다르기 때문이다. 게다가 우영우는 상위 10% 정도에 불과한 서번트 증후군이라 지능이 뛰어나서 변호사가 될 수 있었던 거지, 엄마가 열심히 가르치고 노력한다고 해서 다 그렇게 되는 게 아니라고 말했다. “어떤 부모든 자식한테 최선을 다 한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아이들이 가진 각자의 역량이 있거든요. 그걸 최대한 끌어올려 주는 게 목적이지 비장애인 만드는 게 목적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6. 발달장애인과 그 부모에게 필요한 지원
[찾아가는 서비스가 필요하다.]

박정선 씨의 이야기

정선 씨는 평생교육의 필요성에 관해 말했다. 현재는 고등학교까지만 의무교육이지만, 발달장애인들은 교육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인지능력이 퇴행한다. 게다가 비장애인들과 다르게 40세까지 인지가 향상되어 꾸준한 자극이 필요하다. 현재 특수교육대상자가 고등학교 졸업 후에 갈 수 있는 ‘전공과’라는 제도가 있지만, 많은 학생들 중 시험을 친 상위 0.1%만 들어갈 수 있다. 정선 씨에 따르면 일반계고 통합학급에 있는 경계급 장애인만 갈 수 있는 학교라고 말한다. 실질적으로 발달장애인들은 고등학교 졸업 후 배울 수 있는 자리가 없는 것이다. 하지만 중증도가 심한 이들에게 교육은 더욱 중요하다. 따라서 정선 씨는 하루에 두세 시간이라도 발달장애인들이 받을 수 있는 일상적 교육이 가능한 평생교육센터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또 정선 씨는 ‘원스톱 복지’의 필요성을 말했다. 지금의 장애인 복지는 당사자가 직접 정보를 알아보고 신청해서 혜택을 받는 ‘신청주의’이다. 아무도 필요한 정보를 먼저 알려주지 않는다. 발품을 팔고 공부하는 엄마에게만 그만큼의 선택권이 주어지는 형식이다. 정선 씨는 ‘행복림’ 같은 사회적 협동조합이나 회비가 있는 대구시 장애인 학부모회, 발달장애지원센터 같은 곳에서 정보를 얻는다 말했다. ‘직접’ 연결해 놓아야 소식들이 들려오는 형태다. 그렇게 찾아다닌 정보를 기반으로 아들 유정 씨를 어엿한 회사원으로 키워냈다. 유정 씨는 사회적협동조합 사람과사람이 만든 ‘파란조약돌 디자인 스튜디오’의 1호 디자이너다.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는 적성을 살려 여러 대기업과 굿즈 콜라보레이션을 하며 꿈을 펼치고 있다. 정선 씨는 말한다. “정말 열악하게 사는 사람들, 부모도 장애가 있거나 하루하루 먹고 살기 힘든 사람들도 있거든요. 그런 사람들은 혜택이 있는 것도 몰라요. 모르면 신청도 못하거든요.” 따라서 ‘원스톱’으로 취약계층을 발굴하고 이들을 복지체계에 등록해주는 시스템이 필요하다. “진정한 선진국은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이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는 그런 수준까지 가야 된다고 생각해요.”

도현숙 씨의 이야기

현숙 씨는 우선 활동지원 정책의 허점을 짚었다. “활동지원사 제도에서 지체장애인 같은 경우에는 상대적으로 그렇게 안 꺼리세요. 지체장애인은 옆에서 따라다니면 되고 또 대부분 (전동)휠체어를 타고 본인이 다니기 때문에 대화도 어느 정도 통하거든요. 근데 발달장애인은, 경증이다 싶으면 지원을 받지 못하는 경우가 있고 중증이면 도전행동같은 것 때문에 지원사 분들이 회피를 하세요. 그래서 어떤 부모님들 보면 활동지원사 지원을 못 받고 본인들이 아이들을 케어하는 경우가 있는데, 차라리 그럴 것 같으면 본인이 본인 아이를 케어하도록 활동지원사의 지위를 주는 게 낫다고 생각해요. 그러면 아이도 객관적으로 고객님이 되잖아. 또 다르게 내 아이를 대할 수 있거든요.”
지난해 1월 김미애 의원은 가족이 장애인 활동지원을 할 수 있도록 하는 내용의 ‘장애인 활동 지원에 관한 법률 개정안’을 발의했다. 그러나 보건복지부는 “가족에 의한 활동지원급여 대상을 확대하는 것이 장애인 가족의 돌봄부담 경감, 사회적 책임 강화 등 장애인활동지원 제도의 취지와 부합하지 않는 측면이 있다”며 신중검토 의견을 표명했다.

또한 장애인의 부모와 연결될 수 있는 커뮤니티가 생기거나 멘토가 있었으면 한다는 바람도 내비쳤다. “비슷한 장애를 가진 부모 커뮤니티에 들어가면서 도움을 받은 게 굉장히 많았거든요. 나만 이런 어려운 아이를 키우는 게 아니구나, 또 누구도 있구나, 하면서 마음도 좀 편안하고. 그런 것처럼 선배 부모들과 연결될 수 있는 그런 연결고리들을 만들었으면 좋겠어요.”

현재 대구시에서는 장애인가족지원센터가 운영되고 있다. 장애인이 아닌 장애인 ‘가족’을 위한 유일한 센터다. 서울에는 구마다 장애인의 가족들을 위한 마음센터가 있는 것에 비하면 턱없이 적은 수다. 현숙 씨가 말한 선배·동료 가족과 상담을 받을 수 있는 장애인 가족 동료 상담 서비스를 운영하고 있지만, 이러한 것들을 직접 찾아서 신청해야 한다는 단점이 있다.


“자괴감이 든다.”

발달장애 딸을 데리고 센터에 가려다 경찰에 서너 번 신고를 당한 한 아버지의 말이다. 몸부림치는 딸을 제압해 차에 태우는 걸 보고 누군가가 장애인 학대라고 신고한 것이다. 남들이 보면 그렇게 보일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아침마다 실랑이를 하는 것도, 사람들의 오해 섞인 시선을 받는 것도 고통스럽다. “내가 이러는 게 맞나.” 내외적인 이중고인 셈이다.

국내 전체 장애인 중 발달장애인은 9.9%로 10%에 육박한다. 전체 인구 중에서는 0.5%를 차지한다. 그 안에서도 1~3급까지 각기 다른 등급이 존재하며, 그 정도는 사회생활이 가능한 경증부터 소통이 전혀 되지 않는 최중증까지 다양하다. 우리 사회에는 똑똑하고 공부 잘하는 ‘우영우’(이상한 변호사 우영우)나 ‘박시온’(굿닥터)보다도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에 나온 ‘김정훈’(문상훈)이 더 많으며, 유정 씨처럼 그림을 그리거나 명근 씨처럼 가족의 도움으로만 살아가는 발달장애인이 있다. 그 외에도 또 다른 누군가가 수없이 많다. 그러나 공통적으로는 자신의 의견을 직접 말할 수 없으며 부모나 가족이 대신해 앞에 나서야 한다.

발달장애인의 부모들이 유난이고 자기연민이 심하다는 건 오히려 그들의 삶을 단편적으로 바라보기 때문이다. 비장애인의 기준에서 부모가 대신 나서주는 건 ‘헬리콥터맘’이며, 육아의 고충을 말하는 장애인의 부모는 자기연민에 빠진 사람이다. 그러나 비장애인에게도 다양한 사람이 있듯 발달장애인 안에도 자폐와 지적 장애가 있고 그들 또한 자신만의 뚜렷하고 민감한 감각을 가지고 있다. “미루어 짐작해 내가 당신의 어려움을 안다고 하는 건 ‘모릅니다’라는 말과 똑같아요.” 도현숙 씨의 말이다. 부모조차 그들과 쉽게 소통하지 못한다. 그저 파악할 뿐이다. 일부의 모습만 보고 비난하기 보다는, 그 속사정을 알아보는 게 우선시되어야 한다.

‘2023 대구경북 커뮤니티 저널리즘 스쿨’ 참가자 김지효, 이현수, 이학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