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에서 만난 홍범도의 후예들···어디서도, 환영받지 못했다

홍범도 장군 흉상 이전 논란이 촉발한 고려인 트라우마
홍범도 장군 정착한 카자흐스탄 출신 김왈레리 씨
해주, 평양, 하얼빈, 카자흐스탄, 다시 경주로
대륙에 펼쳐진 유랑의 일생···
한국에서 느낀 제도적 '차별'
홍범도 논란 계기로 경각심

1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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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란 가방을 둘러메고 통학버스를 기다리는 어린이는 고려인이다. 우즈베키스탄에서 왔다는 어린이는 한국말과 모어인 슬라브어가 모두 유창하다. 함께 기다리던 할머니는 한국말을 할 수 없다. 그 탓에 할머니는 손녀가 없이는 주변과 소통할 수 없다. 할머니의 일상 대부분은 집 주변을 벗어나지 않는다. 노인은 어린이를 배웅한 뒤 몇 마디 말을 남기곤 골목 쪽으로 자취를 감췄다.

경북 경주 성건동의 풍경이 변모하고 있다. 도심지 등교 시각. 키릴 문자로 쓰인 상점 간판 아래로 삼삼오오 학생들이 지나간다. 동양인의 얼굴로 슬라브어를 말한다. 초등학교 운동장, 키릴 문자로 쓰인 현수막 옆으로 학생들이 체육 수업을 받고 있다. 이 학교는 이주민 학생 비율이 40%에 가까우며, 이주민 학생 중에서는 고려인이 가장 다수다. 다리 하나 건너 대학이 있어 과거 대학생들이 주로 생활했던 성건동 거리는 정주민 인구감소와 함께 다른 풍경으로 전환되고 있다.

성건동에 고려인 유입이 늘면서 고려인 지원 기관도 생겼다. 경상북도 고려인통합지원센터가 성건동에 세워졌고, 고려인 식당과 카페, 상점, 고려인 교회도 자리 잡았다. 노신사 김왈레리(70) 씨는 점심 무렵 고려인 교회로 들어섰다. 모자를 눌러 쓰고 손에는 한국어 교재를 들었다. 주 2회 교회에서 열리는 한국어와 운동 수업을 듣고, 다른 고려인들과 함께 식사도 하기 위해서다.

▲김왈레리 씨가 경주중앙시장 상가를 지나고 있다.
▲경주 한 초등학교에 키릴문자로 현수막이 게시돼 있다.

오전부터 나와서 모임을 준비하던 윤아니타(가명, 62) 씨가 왈레리 씨를 맞이했다. 아니타 씨는 우즈베키스탄에서 태어난 고려인이다. 생의 풍파를 따라 타지키스탄으로, 블라디보스토크으로 옮겨 갔다가 그곳에서 교회를 다니게 됐다. 아니타 씨 자녀들이 경주 자동차 부품공장에 취직하면서 아니타 씨도 2015년 경주에 정착했다. 경주에 난생 처음 오는 아니타 씨의 결혼 전 성씨는 경주 이씨다.

한반도에서 동북아시아로, 중앙아시아로 유랑하던 고려인이 한 세기가 지나 다시 한반도로 돌아오고 있다. 오랜 세월 변모한 한국은 그들에게 종착지가 될 수 있을까. 윤석열 정부 들어 불거진 홍범도 장군 논란은 정쟁이나 역사관 논쟁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한국 사회의 소수 구성원으로 존재하는 고려인들이 여파를 느끼기 때문이다. 동북아시아에서 항일활동을 하다 스탈린의 강제 이주 정책 탓에 카자흐스탄으로 이주해야 했던 홍범도 장군과 함께 중앙아시아에 정착한 고려인들. 홍범도 장군의 후예들은 이번 논란에 촉각을 세우고 있다.

홍범도 장군 정착한 카자흐스탄 출신 왈레리 씨
해주, 평양, 하얼빈, 카자흐스탄, 다시 경주
대륙에 펼쳐진 유랑의 일생
어디서도, 환영받지 못했다

왈레리 씨는 1943년 소련 카자흐스탄 지역에서 태어났다. 왈레리 씨의 조부는 지금의 북한, 조모는 남한 영토에서 태어나 두만강을 건너 소련 포시예트에서 왈레리 씨 아버지를 낳았고, 왈레리 씨 아버지와 어머니는 1937년 스탈린의 소수민족 강제 이주 조치로 열차로 카자흐스탄에 수송돼 정착했다.

왈레리 씨 가족은 세파에 휩쓸려 정처 없이 아시아 대륙을 횡단해야 했다. 그리고 옮겨가는 모든 곳에서 왈레리 씨 가족은 이방인이었다. 1948년 소련공산당의 파견으로 카자흐스탄에서 이북 해주지역으로 다시 거처를 옮긴 왈레리 씨 가족은 한국전쟁 발발 즈음 다시 평양과 하얼빈으로 순차적으로 옮겨가야 했다.

이북 정착 이후 북한 엘리트층이 성장하면서 소련 출신 고려인들은 로스께(русские)라 불리며 경계와 배척의 대상이 됐다. 하얼빈 체류 당시 중국은 국공내전 이후 공산당이 집권한 시기로, 정부로부터는 호의를 받았지만 중국 인민들과 충돌이 잦았다. 왈레리 씨도 또래와는 친해질 수 없었고 사소하게라도 다투게 되면 돌팔매질을 당했다. 그러면서 왈레리 씨는 어릴 적 어렴풋한 기억으로 남은 카자흐스탄을 떠올렸다.

1958년 모스크바를 거쳐 카자흐스탄으로 돌아가는 기차. 왈레리 씨 가족은 옷가지 몇 벌 밖에 가진 것이 없었지만 그래도 평안을 꿈꿀 수 있었다. 카자흐스탄에서는 고려인이라는 이유로 주변 이웃과 특별한 갈등을 일으킬 일은 없었다. 30여년의 그 평안한 시절은 소련 해체와 함께 끝났다. 중앙아시아 지역에서 출현한 신생 독립국가에서 민족주의 유행이 시작됐기 때문이다.

카자흐스탄 독립 이후 공식 언어를 카자흐어로 정하는 등 카자흐화 정책이 펼쳐졌고, 러시아어를 쓰는 다른 민족 고려인은 다시 배척의 대상이 됐다. 중앙아시아 지역 독립국가연합(CIS)에서 전반적으로 보인 흐름이다. 어딜 가든 결국에는 주변부로 밀려나는 경험을 쌓아오면서, 왈레리 씨는 ‘고려인’이라는 정체성을 형성했다. ‘모국’이란 없다. ‘고향’도 없다. 그저 ‘고려인’일 뿐이다.

카자흐스탄은 시장 개방 이후 천연자원 등의 이점을 무기로 괄목할 성장을 기록했지만, 도농 격차, 빈부 격차는 더 커졌다. 왈레리 씨는 국가가 성장하는데도 소수민족인 고려인은 전반적으로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고 느꼈다. 2000년대 이후 경기 침체를 겪었고, 자녀들이 먼저 일자리가 있는 경주로 향했다. 결정적으로 러시아 지역 인접국 간 관계가 악화하면서, 왈레리 씨도 2022년 자녀가 정착한 경주로 이주했다.

▲시장을 보는 김왈레리 씨
▲경주 성건동 상가 풍경

한국에서 느낀 제도적 ‘차별’
홍범도 논란 계기로 경각심

일선에서 은퇴할 나이가 되어 도착한 한국에서 왈레리 씨는 가정과 고려인 커뮤니티 외에 특별한 관계를 만들지는 않는다. 장보기, 교회 출석 등 단조로운 일상을 보내고 있다.

최근 홍범도 장군 흉상 이슈를 뉴스로 접하고부터 건조한 일상이 헝클어졌다. 카자흐스탄에서 왈레리 씨가 태어난 그해에 카자흐스탄에서 사망한 홍범도 장군을, 이번 사태를 통해 알았다. 홍범도 장군은 강제 이주의 역사를 공유하는 선대 고려인이었다. 한국 사회가 앞서 거친 다른 국가들보다 고려인에 대한 교육 기회나 사회복지 등에서 낫다고 느끼면서도, 다시 일생 겪었던 해묵은 위태로움을 느꼈다. 언제든 배척될지 모른다는 위기감.

왈레리 씨는 선조가 전개한 항일 운동에 근거한 고려인에 대한 한국 사회의 존중을 바라지 않는다. 적확한 한국 단어를 한참 고민하던 왈레리 씨는 단어 찾기를 포기하고, 영어 사용이 내키지 않는듯 한 단어를 꺼냈다.

“Discrimination(차별). 우리 고려인들도 이 나라를 더 사랑하고 싶어요. 그러려면 이 문제(차별)를 해결해야 해요. 한국도 본래 민족이 줄고 있어요. 여러 민족이 한국으로 오고 있죠. 우리 고려인은 우리 정체성이 있는데, 지금처럼 책임 있는 위치의 사람이 말을 잘못해서는 안 돼요. 그게 나빠요. 고려인들도 이곳에서 이 국가가 더 잘되길 바라요. 같이 잘 사는 한국이 되면 좋겠는데, 홍범도 장군을 문제 삼는 소식을 듣고 보면 언제든 우리를 이방인처럼 배척하지 않을까 걱정돼요.”

소멸하는 경주를 지탱하는 이주민
고려인 유입 요인은 일자리와 가족 돌봄
정착 지원 필요

이주민이 인구소멸 위험 도시인 경주를 지탱하고 있다. 경주시에 따르면 2022년 4월 기준 등록 외국인은 9,051명이며, 이중 상위 3개 국적은 베트남(2,835), 우즈베키스탄(910), 카자흐스탄(794) 순이다. 고려인을 따로 분류 집계하지 않기 때문에 다른 소수 중앙아시아 출신 이주민을 포함해 고려인은 약 1천 명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경주 내에서도 이주민은 이주민 상가나 커뮤니티가 조성된 성건동이나 제조업 업체가 밀집한 외동에 집중된다.

고려인은 주로 취직을 위해 경주에 유입되며, 자녀 돌봄을 위해 출신국에 거주하던 가족이 추가로 유입되는 경향도 보인다. 2020년 성건동 지역 고려인 235명에 대한 생활실태를 조사한 자료1에 따르면 163명(77.6%)이 노동을 이유로 이주했으며, 그다음 사유는 결혼(19명, 9.0%)이다. 부모 이주는 8명(3.8%)이다. 해당 논문은 “경주 거주 결정은 일자리와 연관되어 있으며 이미 거주하는 부모나 친척 등 가족 관계망을 통해 경주로 유입되고 있다”고 해석한다.

해당 논문에서는 경주 거주 고려인들이 한국 생활의 어려움에 대한 사유로 ‘언어 문제'(56.7%), ‘외로움'(41.9%)을 가장 많이 꼽았는데, 이는 인천 등 다른 지역 고려인과 구별되는 특징이라고 설명한다. 또한, 조사대상자 63%가 출신국과 외국에서 온 사람들하고만 소통해 출신국 고려인 중심의 사회적 관계를 형성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성건동에서 고려인 지원에 매진하는 하이웃이주민센터 센터장 김조훈 목사는 고려인이 느끼는 소외감이나 불안에 대한 특성을 설명하면서, 이주민을 존중하는 사회 분위기가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특히 ‘조선족’과 같이 미디어에서 부정적 이미지를 조장해 사회적 각인을 형성한 사례도 불안 요소라고 한다.

김조훈 목사는 “일자리, 돌봄 외에도 전쟁과 같은 중앙아시아 지역 불안한 상황 때문에도 고려인 유입이 늘어나고 있다. 성건동은 국내 다른 고려인 밀집 지역과 달리 고려인 마을을 형성하거나 고려인 조직을 갖추지는 않았지만 유입이 늘며 커뮤니티는 형성되고 있다”며 “고려인은 특히 고령층일수록 고립된다. 주민센터에 가거나 운동을 하려 해도 한국말을 하지 못하거나 한국말을 해도 북한말투로 들리기 때문에 자신감을 갖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점점 더 제한적인 사회관계를 갖게 된다”고 설명했다.

이어 “고려인의 한국사회 정착을 위해 존중하는 문화가 필요한데, 아직 어려운 점이 많다. 일례로 조선족 사례를 보면, 처음에는 독립운동가들의 후예라는 이미지도 있고 특별히 나쁜 이미지가 아니었지만 갑자기 영화나 미디어에서 조선족을 마치 간첩이나 범죄자로 묘사해서 그런 이미지로 각인되는 과정이 있었다”며 “고려인은 아직은 선조의 독립운동에 대한 이미지도 있고 조선족만큼 배척되는 분위기는 아니지만, 언제 뒤바뀔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있다”고 말했다.

끝으로 김조훈 목사는 “고려인이든 조선족이든 한국에서 이주민이 정착하고 있고, 우리 사회에서 필요한 역할도 하고 있다”며 “우리 사회는 이들 이주민을 자원으로만 대상화해서 여기지 말고 이들이 사회 구성원으로서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여건에도 신경써야 하는데 아직 부족하다”고 강조했다.

▲하이웃이주민센터에서 만난 김왈레리 씨, 김조훈 목사, 고려인들

박중엽 기자
nahollow@newsmin.co.kr

  1. 박신규, 이채문, 「귀환이주자로서 고려인의 지역사회 생활실태 분석 및 지원방안」, 『디아스포라연구』, 제15권 제2호(제30집) 2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