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출지대 9月호] 경산시민 독서감상문 대회: 이 책은 검열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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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주=뉴스민은 ‘대구 아트 시사저널 표출지대’와 전재 계약을 맺고, 온라인으로 글을 게재합니다. 원본은 표출지대를 통해 볼 수 있습니다.]

공동체 안에서 살아가는 이상, 한 인간을 둘러싼 일상 속 모든 것은 정치와 관련되어 있다. 시민은 법과 제도의 정비를 통해 개개인이 속한 성별, 세대, 직종 등의 권리를 보장받을 수 있는 존재이고, 이를 위한 일련의 과정은 정치 안에서 일어나기 때문이다. ‘정치적 동물’로서의 특징은 아주 오래전부터 인간의 중요한 정체성이었다.

이는 ‘바보’라는 의미로 알려진 idiot의 어원에서도 드러난다. 해당 단어는 ‘공공선이나 정치에 관심이 없는 사람’을 의미하는 고대 그리스어 idiotes에서 유래했다. 직접민주주의를 실천하던 그리스 아테네에서 시민이 정치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는 것은 idiotes, 즉 아무 쓸모 없는 인간에 불과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고대 그리스보다 발전한 민주주의를 추구하는 2023년의 대한민국이라면, 정치에 대한 시민의 관심이 높아지도록 권하는 것이 옳은 흐름이다. 그러나 최근 경산시민 독서감상문 대회에서 그에 반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경산시 등의 후원으로 개최된 해당 대회 선정도서 중 4권이 좌편향 됐다는 민원으로 목록에서 삭제된 것이다.

경산시는 홍택정 문명교육재단 이사장 외 10여 명의 반복된 항의 민원이 있어 행사 주최 측인 경산신문에 도서선정 재고를 권고했고, 경산신문은 그에 따라 좌편향적이라고 지적받은 도서들을 대회 선정도서에서 제외했다. 유관단체 관계자, 민원인 그 누구도 도서의 좌편향 여부를 판단하는 기준이 무엇인지에 대해 설명하지 않았다.

홍 이사장은 유시민 작가와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이 좌편향 인사이고, 정지아 작가는 문재인 전 대통령이 운영하는 평산책방에서 행사를 연 인물임을 지적하며 순서대로 그들의 책인 <나의 한국현대사>, <조국의 법고전 산책>, <아버지의 해방일지>를 좌편향 도서로 규정했다. 김익중 동국대 의대 교수의 <한국탈핵>의 경우 탈원전을 주장하는 내용이 문제라고 덧붙였다. 하지만 이는 홍 이사장이 해당 책들에 갖는 주관적인 감상일 뿐이다. 또한 그를 제외한 10여 명의 민원인들은 경산시민인지조차도 알 수 없는 이들이다.

경산시는 단지 보조금이 투입되는 행사에 민원을 방치하면 지탄을 받는다는 이유로, 객관적인 근거도 없이 민원을 제기하는 ‘블랙컨슈머’ 들에 굴복했다. 그리고 경산시의 후원을 받아 대회를 주최하는 경산신문은 권고의 탈을 쓴 강요에 순응해 해당 책들을 목록에서 삭제했다. 헌법에 따라 언론·출판의 자유를 보장받고 있는 유관단체들이 자본과 권력에 무너진 것이다.

홍 이사장을 포함한 10여 명의 민원인에게 경산시민 독서감상문 대회 선정도서 목록 중 읽어본 책이 있는지를 묻고싶다. 그들이 말하는 좌편향성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으나, 현 우파 정권의 사상에 반기를 드는 책은 앞서 언급한 4권 외에도 존재하기 때문이다.

일례로 레이첼 카슨 작가의 <침묵의 봄>이 있다. 해당 책은 DDT를 비롯한 농약 등 화학물질을 무차별적으로 배출함으로써 발생하는 환경파괴 위험성을 다루고 있다. 이러한 점에서 탈원전의 내용을 담고 <한국탈핵>과 궤를 함께한다. 물론 현재 대한민국에서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가 큰 논란이 되고 있음을 고려했을 때 <침묵의 봄>은 참 시기적절하게 선정된 도서이지만, 탈원전을 권하는, 즉 우파 정권의 기조에 반발하는 책인지의 여부를 따진다면 당연히 검열 대상이어야 하지 않았을까.

그럼에도 해당 책이 대회 선정도서 목록에 버젓이 남아있는 것을 봤을 때, 민원인들은 그저 책의 제목과 대략 전해들은 내용만을 보고 좌편향 여부를 판단하는 것이 아닌지에 대한 합리적 의심이 든다. 민원인들은 <침묵의 봄>이라는 언뜻 서정적으로 보이는 제목에 매료되기라도 한 것인가. 책을 몇 장만 넘겨봤다면 <한국탈핵>이라는 직접적인 제목의 책과 그리 다르지 않은 내용이 담겨있음을 알 수 있었을 텐데, 참 안타까운 지점이다.

이렇듯 경산시민 독서감상문 대회를 둘러싼 이번 검열은 수많은 민원인과 유관단체 그들 스스로에 대한 검열은 부재한 채 이뤄졌고, 결국 그들의 무지함은 세간에 낱낱이 까발려졌다. 책은 작가의 가치관을 담고 있으므로 일정하게 가치편향적인 것이 당연하며, 독자들은 책을 읽고 자신만의 관점을 정리할 능력을 갖고 있다. 민원인, 유관단체 모두는 이것을 명심해야 한다.

글_표출지대 조희수
pyochuler@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