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듯 같은 역사] 나라 곳간과 백성들의 목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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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8년 9월, 갑산부(현 함경도 갑산군 일대) 소속 진동진 만호 노상추에게는 국경을 잘 지키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이 있었다. 갑산부는 산세가 험하고 사람 출입이 적어, 다른 지역에 비해 삼蔘(인삼이나 산삼) 채취가 가능했다. 갑산부가 조정에 삼 진상을 담당하는 지역이 된 이유였다. 그러나 삼을 채취하는 하는 매년 들쑥날쑥하여 일정하게 진상하는 것은 매우 어려웠다. 안정적으로 삼을 진상하기 위해서는 삼상參商(삼을 파는 상인)을 통해 삼을 구입해야 했다. 그러나 삼은 구하기 어려운만큼 가격이 비쌌고, 이는 고스란히 갑산부의 부담으로 돌아왔다. 갑산부 관아 창고가 늘 텅텅 빈 이유였다.

그러나 1788년 흉년으로 인해 삼은커녕, 굶주린 백성을 구제할 구휼미마저 부족한 상황이 되었다. 조선 경제 특성상 흉년은 단순한 국가 재정 문제로만 끝나지 않는다. 갑산부 입장에서는 인삼 진상으로 비어 있는 창고 인지라, 봄이 빌려준 환곡이라도 되돌아와야 창고를 채울 수 있었다. 그런데 흉년으로 인해 수확기가 지난 지금도 관아 창고는 여전히 비어 있었다. 그런데 이맘때 관아 창고가 비었다는 말은 내년 곡식을 수확해서 관아 창고를 채울는 이맘때까지 계속 관아 창고가 빈 상태일 수 있다는 의미이다. 당연히 이듬해 보릿고개를 넘길 방법이 없다. 이듬해 봄이 되면, 갑산부는 기근과 굶주림이 만드는 생지옥을 경험할 수도 있다는 말로 해석해야 하는 이유이다. 환곡을 갚지 않는 백성들인들 이 사실을 모를 리 없지만, 당장 오늘 닥쳐올 죽음부터 모면해야 했다.

갑산부의 이 같은 상황은 조정에 보고되었고, 조정 역시 대책을 강구했다. 일단 올해 바칠 인삼은 다음 해로 미루기로 했다. 이제 악순환의 고리를 끊을 방법을 찾아야 했다. 조정에서는 갑산부 산하 진장들에게 해당 지역 형편을 조사하여 보고하라는 명을 내렸다. 갑산부사는 이를 종합해 보고를 올렸고, 이제 조정의 조치만 남았다. 핵심은 텅 빈 관아의 창고를 채우는 일이었고, 최선은 조정에서 어떠한 방법으로든 창고를 채울 곡식을 보내주는 것이었다. 그러나 항상 실물보다는 말이 빠른 법, 조정은 환곡을 받아 창고를 채우라는 명을 ‘말’로 내렸다. 나라의 명에 따라 순영은 갑산부 산하의 진영에 환곡을 거두어 창고를 채우라고 독촉하기 시작했다. 갑산부의 사정을 모른 내려진 명령은 갑산부 백성들 입에서 곡소리를 나게 했다.

노상추는 자신이 맡고 있는 정동진의 상황을 갑산부에 전달할 수밖에 없었고, 갑산부 역시 이 문제를 다시 조정에 전했다. 공식 보고라인 외에도 지역 사족들이 중심이 되어 여러 경로를 통해 중앙정계에 갑산부의 어려움을 알렸다. 이렇게 되자 조정은 가난한 백성들과 군인들에게 배부하라면서 면포와 목화솜을 보내왔다. 이번 기근에 처음 내려진 정부의 직접 지원이었다. 그리고 매년 바쳐야 하는 산돼지와 산양 가죽 역시 올해에는 바치지 않아도 된다는 공문이 내려왔다. 환곡에 대한 유예도 있었다. 보리와 쌀보리, 겉귀리와 쌀귀리는 거두어들이는 시기를 미룰 수 없지만, 환곡에서 가장 많은 비율을 차지하는 쌀과 콩은 납부 기일을 미루어 준다고 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그러나 기껏 유예한 날짜가 얼마 되지 않다 보니, 조정의 명은 갑산지역의 험준한 지형을 넘지 못했다. 이 소식을 전하는 관리가 모든 고을에 이 명을 전하는 데 8일이나 걸렸기 때문이다. 기껏 며칠 납부를 유예받았는데, 그 소식을 어느 지역은 8일 먼저 듣고 어느 지역은 8일 늦게 들어야 했다. 일찍 들은 고을이야 비교적 여유를 가지고 환곡을 거두었지만, 늦게 들은 고을은 이 소식이 전해지는 순간 납부해야 할 날이 닥쳐오고 있었다. 헐레벌떡 환곡을 재촉하기 시작했지만, 유예받은 날짜는 아무 의미가 없었다. 늦게 이 소식을 들은 각 지역의 진장들은 억울함을 호소하면서 기간을 좀 늘려달라 했지만, 돌아오는 것은 문책뿐이었다. 게다가 명을 전달한 관리는 명이 늦게 전달된 책임을 물어 벌을 받을 것이라는 소문도 돌았다. 갑산부의 험한 지형이 어찌 명을 전하는 관리의 책임이겠냐만, 무언가 책임을 물을 필요가 있었던 듯했다. 소식을 전하는 관리만 억울했다.

농업을 근간으로 하는 조선의 국가 예산은 추계가 어렵기는 하다. 아무리 땅이 비옥하고 백성들이 부지런해도, 하늘이 도와주지 않으면 어찌할 도리가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홍수나 가뭄 같은 이상 기후라도 닥치면 나라는 단순한 경제적 어려움을 넘어, 백성들의 목숨이 왔다갔다 하는 상황으로 치달아 갔다. 추계도 힘들지만, 그만큼 최악의 상황도 고려해서 국가 재정을 운영해야 하는 이유였다. 이를 충분히 감안하지 않을 경우 그 결과는 기근과 굶주림이 만드는 생지옥으로 돌아오기 때문이다. 따라서 환곡을 위한 창고는 이맘때가 되면 가득 차기 시작해야 하고, 흉년을 예상해서 비축분을 충분하게 확보하는 정책은 기본 중에 기본이었다.

공물이나 진상, 전세 등의 세금 정책은 이러한 기반 위에서 장기적인 관점을 가지고 이루어져야 했다. 적어도 2~3년을 예측하면서 국가의 곳간을 관리해야 백성들의 부담을 고르게 만들 수 있다. 그러나 무능한 관리는 자기 출세나 문책을 피하는 방법으로 백성들의 목숨이 걸린 환곡 창고를 너무나 쉽게 털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갑자기 흉년이 닥치면, 끊을 수 없는 악순환의 고리가 시작되기 마련이다. 다음 해 보릿고개를 생각하면 환곡 창고를 채워야 하지만, 이는 안 그래도 흉년으로 막막한 백성들을 막다른 골목으로 내모는 일이었다. 백성들 입장에서는 뒷날 자신의 목숨을 유지할 수 있는 곡식을 가지고 지금의 목숨을 유지하는 게 유일한 방법이었다. 정부가 재정 정책을 잘못하면, 백성들은 목숨마저 돌려막기를 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