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공장 현장실습 간다며 자랑하던 친구, 나는 맞장구쳐줄 수 없었다

일하는 청소년 인권은 어디로 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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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주: 글쓴이 손소희 씨는 대구청소년노동인권네트워크에서 청소년노동인권 교육 강사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청소년노동인권교육을 하면서 겪은 이야기를 6회에 걸쳐 연재합니다]

몇 년 전 날씨가 차가웠던 어느 날 현장실습을 나갔던 특성화고 3학년 학생이 기아차 공장에서 일하다 쓰러졌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너무 놀라웠다. 대한민국 굴지의 대기업이어서 놀랐고, 그런 곳에서조차 졸업도 하지 않은 학생들을 주야 맞교대 근무시키며 어른들과 똑같이 일을 시켜먹었다는 사실이 놀랐다.

어렸을 적, 공업고등학교 다니던 친구가 현장실습으로 ko중공업으로 가게 됐다고 들떠서 침을 튀기면서 자랑하던 기억이 났다. 그 친구는 자신이 나갈 실습 현장, 대공장 자랑을 마구 떠벌렸는데, 그 공장은 대한민국에서 아주 큰 기업이라고 했다. 현장실습 동안 성실히 하면 졸업하고 정식직원으로 채용된다고 했다. 몇 년만 열심히 일하면 돈도 많이 모을 것이라 기대했다. 군대를 다녀와서도 계속 다닐 수 있는 곳이라고 했다.

지금도 밥상머리에서 침을 튀기며 들떠있는 그 친구의 상기된 얼굴이 생생히 기억난다. 그런데 묘한 건 그 친구 얼굴이 어떻게 생겼는지는 기억나지 않고, 이름도 까맣게 잊어버렸다. 내 기억은 파편화되어서 친구의 모습은 없고 그 날 그 장면만 남아있다.

나는 그 친구에게 맞장구를 쳐줄 수가 없었다. 정말 좋은 곳이라는 확신이 없었고, 상대방이 너무 칭찬하니까 괜한 의구심이 들었나 보다. 그 친구가 막상 일해보고 실망하면 어쩌나? 그게 더 걱정이었다. 들떠서 흥분하고 있는 친구에게 맞장구쳐줄 수 없어서 나는 늘 미안한 마음이었다.

그렇게 세월은 20년도 더 흘렀지만, 여전히 세상은 특성화학교 예전엔 실업학교라고 불렀던 공고·상고에 다니는 청소년들이 학교도 졸업하기 전에 현장실습을 나간다. 현장실습은 그야말로 교육의 연장이고, 말 그대로 실습이어야 한다. 하지만 현실은 돈 안 들이고 마구 써먹을 수 있는 노동력일 뿐이다.

어린 나이에 노동이 자아를 실현하는 수단으로 이해되지 못하고 힘들고 고통스런 더러운 오염덩어리로 왜곡된 이해를 키우는 현장이 되어버렸다. 한 번씩 그 친구 생각이 난다. 지금도 ko중공업에서 정규직으로 잘살고 있을까?

2011년 김민재 학생이 뇌출혈로 쓰러진 사건은 사회적 파장이 엄청났다. 나도 그 사건을 뉴스로 보고 충격을 받았는데, 이 사회도 엄청 큰 충격이었던가 보다. 대구지역에서도 민주노총과 전교조를 비롯해 특성화고 현장실습에 대한 문제의식을 느끼고, 사회운동 단체들과 청소년 대상 노동인권 교육이라도 제대로 해보자고 했다.

사회구조적인 문제를 하루아침에 다 해결할 수는 없지만, 청소년들이 현장실습 나가기 전에 노동인권교육을 한 번만이라도 받고 나갈 수 있기를 바랐다. 교육이 모든 것일 수는 없지만, 또 다른 일을 만들기 위한 실마리가 될 수 있으리라는 시도였다.

소식을 바깥에서 접했을 때 나는 참 훌륭한 일이라고 생각했지만, 여건상 그 일에 적극 나설 수는 없어 언저리에서 마음으로 지지하는 한 사람이었다. 청소년이 권리의 주체로 서는 법을 배울 수 있는 공간은 더 많이 열려야 하고, 더 많이 커나가야 한다고 지지했다.

그렇게 청소년노동인권교육운동을 지지하는 역할에 만족하고 있을 무렵이었다. 가벼운 등산을 하던 중 누군가가 내게 “청소년노동인권교육 강사단 활동해보지 않을래”라는 말을 건넸다. 나 자신이 누군가를 가르칠 자격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고, 특히나 나의 인권감수성이 밑바닥 수준인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런 나에게 대구청소년노동인권네트워크(이하 “대구청노넷”)에서 강사로 활동하자고 제안해준 건 참 기뻤지만, 걱정도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우선은 대학 근처에도 가보지 못한 나는 지적 수준도 부족하기 짝이 없는 사람이라서, 내가 누군가를 가르친다는 것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그런데 그 순간 욕심이 났다. 청소년노동인권의 중요성을 생각했고, 나름의 의미를 부여하면서 내가 변해야겠다고 마음을 고쳐먹었다. 청소년노동인권교육을 할 수 있는 사람으로 말이다.

나는 여전히 배워야 하는 위치에 서 있어야 할 사람이었다. 그다음으로는 청소년에게 다가갈 자신이 없었다. 아들과 딸을 키운 엄마이기도 한 나는 질풍노도의 시기를 보냈던 아이들과의 갈등을 폭력적인 대화로 더욱 증폭시켰고, 서로가 서로의 가슴에 할퀴어 새겨진 상처를 아물게 하는 방법을 몰랐다.

청소년들 앞에서 나는 자존감이 꺾일지도 모르겠다는 막연한 두려움도 있었다. 청소년노동인권 강사는 자신 없었지만, 노동운동가로서 역사가 발전하는 방향으로 더 낮은 곳을 끌어올리는 운동을 만나는 순간이었기에 망설이지 않고 청소년노동인권운동을 해보자고 했다.

청노넷손소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