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수 칼럼] 최숙현법에도 난감한 ‘나 좀 살려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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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육계에는 인권침해를 당하거나 비리를 알고 있는 경우, 신고할 수 있는 체육인들만의 구제기관이 있다. 트라이애슬론 故 최숙현 선수가 안타까운 일을 당한 후, 일명 ‘최숙현법’에 근거해 설립한 스포츠윤리센터(이하 윤리센터)가 그것이다. 당시 체육계에 구제기관이 없는 것은 아니었는데,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으라 했던가, 정부는 새로운 기관이 출범하면 다 해결될 것처럼 부산을 떨었다.

바람 잘 날 없는 윤리센터가 출범한지 벌써 3년이 지났고, 세 번째 이사장이 취임한 오늘, 만약 나에게 또 다른 최숙현이 찾아와 “나 좀 살려주세요!”라고 말한다면 참 난감할 것 같다. 인권침해 구제는 늘 일관성 있는 결과를 기대할 수 있어야 하고, 행정기관임에도 피해자의 마음을 잘 보듬어 줄 수 있는 세심함이 필요한데, 윤리센터는 아직 그런 조직이 아니기 때문이다.

윤리센터에 의한 이런 ‘난감함’이 오래 지속되는 이유는 졸속 출범으로 인해 조직의 성격이 명확하게 규정되지 못한 탓이 크다. 문제를 직접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문체부 장관을 통해 징계를 요청하는 권한만 가지고 있고, 징계요청을 받은 체육단체들은 법인으로서 자치권을 갖고 있어 정부가 직영하는 윤리센터의 일방적인 ‘간섭’에 무조건 따를 이유도 없다. 조사가 부실하다고 생각되거나, 피해자의 방어권 보장, 그리고 기타 시간을 끌 이유가 있으면 소송을 걸면 그만이다, 또 한세월 어영부영 지날 수도 있는 것이다.

실제로 2020년부터 2023년 사이 요청한 234건의 징계요청에 대해 131건(55.9%)은 최종 처분이 내려지지 않았다. 이에 문체부는 과태료를 부과하거나 예산을 축소하겠다며 으름장을 놓지만, 체육 단체들은 그리 만만한 조직이 아니다. 체육계에서는 윤리센터 문제뿐만 아니라 인사추천문제, 징벌적 예산삭감 등 정부의 이런 ‘간섭’에 대해 맞서는 결기는 체육회장 선거에서 유리한 조건이 될 만큼 ‘간섭’에 민감하다.

물론 국가의 예산이 들어가는 조직인데, 그 정도는 간섭, 즉 관리는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니냐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하지만 국민의 체육활동을 지원하고, 증진하는 것은 국가의 의무다. 국가의 의무를 대행하는 체육회가 말을 안 듣는다고 국가의 의무를 축소하겠다는 것도 설득력을 얻기 어렵다. 더구나 체육계에 특별사법경찰을 두겠다는 논의도 제법 진척이 되었는데, 이것이야말로 난센스다. 도대체 공권력의 범위를 어디까지로 생각하는지 알 수 없는 발상이다. 이런 구조적인 문제 아래 생겨난 우회로가 “징계요청”이었지만 이는 누가 봐도 어설픈 구제 방안 아닌가?

인권침해 구제기관의 가장 중요한 요소로는 전문성, 독립성, 신뢰성을 꼽을 수 있다. 전문성은 조사관의 권위와 관련된 것인데, 현재 조사관의 전문적 역량이 부족한 상태라면, 윤리센터의 조사관은 개인이 아니라 법률 또는 조사 전문가를 포함하는 팀으로 운영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윤리센터는 징계대상자의 소송 여부와 별개로 조사관의 권위를 신뢰하고, 우선의 행정적 조치는 모두 취하는 피해자 중심의 구제 환경 구축이 필요하다.

독립성은 체육계는 물론이고, 문체부로부터의 독립도 필요하다. 현재와 같이 구조적인 문제를 낳는 문체부가 출자하고, 관리하는 방식으로는 그 한계가 뚜렷하다. 체육계가 직접 출자하고, 스스로 징계권을 이양해 체육단체 통합형 윤리센터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 안에는 이양받은 징계 권한을 바탕으로 통합징계위원회를 구성하여 종목 불문하고 언제나 일관된 결과를 기대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 이때 독립성 보장은 두말하면 잔소리다.

그러고는 조사의 전문성과 심의, 징계 조치의 일관성을 바탕으로 마지막 조건인 신뢰성을 기대하면 된다. 윤리센터가 최숙현법이라는 무시무시한 법적 뒷받침에도 불구하고, 아무도 겁안내는 종이호랑이로 전락한 이유는 바로 이 세 가지를 모두 갖추지 못했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인권구제정책이란 것이 그렇다. 그 면면은 촘촘하고, 모든 대비가 잘된 듯 보이지만 국민들은 아무도 모른다. 사고가 터지고 나서야 ‘그런 게 있었어’라고 말하며, 그 누구도 ‘모르던 잣대’로 처벌하고, 꼬리를 잘라내는 기준으로 삼는다. 심지어는 정책이 그 정도 수준에 머물러 있다는 것을 미리 알아챈 자들이 요리조리 잘 피해 다니면서 체육계를 이끌고 있다. 혹 지금도 있었을지도 모를 “나 좀 살려주세요!”라는 절규는 오늘도 그런 가운데 묻힌다.

김현수 전 국가인권위원회 스포츠인권특별조사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