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3/054] 우리 곁의 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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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취재원은 사건으로 만나 오랜 기간 사건으로 소통한다. 대구 북구에서 전세사기를 당한 정태운(32)도 그렇다. 작년 초 세 들어 살던 건물에 신탁 사기가 발생했다는 사실을 알고선 피해자를 모아 세입자 대책위원회를 꾸렸다. 피해 사실을 입증하기 위해 언론, 은행, 부동산, 경찰을 두드리던 그는 어느날은 부산, 어느날은 서울에 서서 마이크를 잡기 시작했다.

그는 서울 여의도 국민의힘 중앙당사 앞에서 ‘탈당 신고서’와 함께 ‘지도부 면담요청서’를 들고 전세사기 특별법 개정을 외쳤다. 단순히 피해 사실을 호소하는 게 아닌, 책임자의 역할을 촉구하는 발언을 어떤 언론은 전문 그대로 실었다. 그렇게 그는 지난해 연말 ‘전세사기·깡통전세 피해 대구대책위원장’을 맡아 전국을 바쁘게 다녔다.

때론 지쳐 보였다. “대구시는 적극적으로 피해자 지원에 나서지 않는다. 어떻게 생각하냐”며 인터뷰를 요청하니 거절하기도 했다. 당시 그는 “같은 말을 언론, 정치권에 반복하는데, 변화의 조짐이 보이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대구, 경북에서 또 다른 전세 피해자들이 모여 기자회견을 하는 자리에 여지없이 함께 했다. 눈인사를 꾸벅하고선 각자의 역할을 하는데, 나는 도무지 길이 보이지 않은 상황에 내 탓도 있는 것 같아 마음이 불편했다.

“기자님, 저희 임대인이 구속됐어요. 너무 기분 좋더라고요. 저희 건물 다른 피해자들도 진정한 심리치료를 받은 것 같다고 하시네요. 여러 번 구속영장이 기각되니까 솔직히 포기하고 있었거든요. 담당 경찰이 끈질기게 매달려서 4번 만에 구속됐어요” 지난 24일 저녁에는 그에게서 반가운 전화가 왔다. 헤어진 지 얼마 안 된 참이었다. 그날 낮 경산에서 전세사기 범행을 저지른 임대인이 징역형을 받은 재판이 있었다. 취재를 갔더니 그가 있었다. 경산에서 전세사기 피해자 대책위를 꾸리기 위해 준비하는 이들을 돕고 있었다.

통화를 끊고선 ‘멈추지 않고 문을 두드린 사람들의 힘이 컸다’고 말할 걸 후회했다. “끝까지 화이팅입니다” 따위의 말로 끊은 게 아쉬워 글을 남긴다. 지난 주말 영화 ‘시민덕희’를 봤는데, 보이스피싱범을 직접 잡는 덕희와 그가 겹쳐 보였다. 시스템의 부재를 꼬집는 영화지만, 이러나저러나 덕희의 활약상은 통쾌했다. 내 주변의 덕희들을 떠올리며 울고 웃었다. 그들은 ‘우리 잘못이 아니다’ 목소리 내고, 지치더라도 멈추지 않으며 연대한다. 해결할 때까지 그리고 같은 피해자가 나오지 않을 때까지.

▲대구시의회가 ‘전세사기 피해자 지원 및 주거 안정에 관한 조례안’을 상정하고 심사에 돌입했다. 피해자들은 제대로 된 전세사기 피해자 지원 조례 제정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사진=정의당 대구시당)

김보현 기자
bh@newsmi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