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듯 같은 역사] 백성의 고통은 늘 이중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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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였다면, 한창 연말의 분위기가 무르익고 있을 즈음이다. 따듯함을 약속하는 입춘立春을 앞두었거나 혹은 막 지난 상황에서, 새로운 한 해에 대한 기대와 명절 음식 준비로 여념이 없을 때이다. 그러나 1628년은 그렇지 못했던 듯하다. 음력 12월 25일 잠시 눈이 내렸는데, 이 눈이 그해 겨울의 첫눈이었다. 이미 눈이 그만 와야 할 시점에 첫눈이 내렸으니, 백성들 입장에서는 하늘의 주기가 무언가 잘못되어도 단단히 잘못되었다고 생각했다.

흉흉한 날씨로 인해 계절의 일상성이 깨어지면, 백성들의 마음 역시 흉흉해지기 마련이다. 뜬 소문들이 전국을 떠돌기 시작했던 이유이다. 당시 삼척에는 용한 점쟁이가 있었는데, 그를 보기 위해 날마다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그 사람의 집 앞은 저잣거리 같았고, 그 집으로 가는 길도 사람들로 인산인해일 정도였다. 갓을 쓴 양반들도 체면불구하고 그를 찾을 정도였으니, 삼척의 무당에 대한 소문이 예안(현 경상북도 안동시 예안면 일대)까지 퍼지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특히 병을 잘 낫게 한다는 소문 때문에 죽음 앞에서 마지막 희망이라도 걸어 보려는 백성들이 전국에서 몰려들었다.

이러한 현상은 삼척에서만 그친 게 아니었다. 흉흉한 연말로 불안하기 이를 데 없는 백성들의 마음을 파고드는 사람들이 이곳저곳에서 생겨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경상도 지역에서도 임하(현 경상북도 안동시 임하면 일대)에서 이름난 무당이 사람을 불러 모은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리고 개단(현 경상북도 봉화군 물야면 개단리 일대)에서도 신들린 사람이 하나 있는데 이를 만나기 위해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고 했다.

특히 개단에 사는 신들린 사람은 예안에서 가까운 탓에 그 소문의 속사정을 쉽게 확인할 수 있었는데, 그 내용을 알고 보니 기가 찰 일이었다. 이 무당은 권상충의 매부인 이영기라는 사람의 계집종으로 이름은 칠대였다. 그녀는 자기 남편과 승려, 그리고 이러한 일에 능한 거사들 몇 명과 모의하여, 세존이 내려왔다면서 대중들을 미혹했던 것이다. 날씨로 인해 하늘마저 흉흉하니 세존의 강림은 백성들의 마음을 유혹하기에 충분했다. 많은 백성들이 밤낮으로 그녀를 보기 위해 개단으로 모여들었고, 이 집을 찾아가기 위해 길을 메운 사람들의 수가 저잣거리보다 많을 지경이었다.

그런데 모두 짐작하듯, 그녀를 만나기 위해 빈손으로 가는 사람을 찾기는 힘들었다. 대부분 칠대를 찾을 때마다 재물을 바치며 치성을 드렸는데, 그렇게 들어오는 치성이 하루에만 목면(목화로 만든 면) 5~6동, 즉 250~300필 정도였다. 목면 1필은 대략 16m가 넘는 길이이니, 300필이면 그 양을 쉽게 계산할 수 없을 정도이다. 게다가 목면 1필을 가격을 쌀 4~5말 정도로만 계산해도, 이들이 하루에 긁어모으는 치성품이 얼마나 되는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목면 외에도 참깨가 수십 섬, 쌀 100여 섬, 과일, 참기름, 납촉 등이 매일 들어왔다고 하니, 이를 보관하는 창고가 모자랄 지경이었다.

이렇게 백성들이 칠대를 찾기 시작하면서, 이제는 삼척에서처럼 양반들까지 의관을 차려입고 그녀를 만나러 가기 시작했다. 공자는 자신의 후예들에게 괴력난신怪力亂神(괴이한데 힘쓰는 일이나 난잡한 신들의 이야기)에 대해 멀리하도록 했지만, 가진 게 많아 잃을 것도 많은 양반들은 칠대를 통해 자신의 앞날을 예측하고 준비해야 했다. 그들에게는 공자의 말이나 양반의 염치보다 자신들의 안위가 더 우선했다.

그런데 이러한 현상은 일반 백성들에게 더욱 치명적인 결과로 돌아왔다. 김령의 기록에 따르면 1628년은 유난히 기근이 심했다. 그해 농사는 흉년이었고, 그러다 보니 곡식 수확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음력 12월부터 벌써 굶는 사람들이 속출하고 있었다. 거기에 환곡과 전세 등 각종 세금이 부과되다 보니, 백성들의 등은 휘어질 대로 휘어져 있었다. 어쩌면 백성들이 칠대를 찾는 가장 큰 이유는 이러한 상황에 내몰려 있는 상황 때문이겠지만, 문제는 칠대의 목적이 다른 곳에 있었다.

굶주리고 세금 독촉에 시달리는 백성들이 하루에만 목편 250~300필을 치성으로 칠대에게 바치고 있었다. 백성들 입장에서는 자신이 먹을 마지막 식량을 아끼고 정부에서 재촉을 피해 몸으로 막아서서 숨겨두었던 곡식들까지 긁어모아서 만든 치성이었을 터였다. 이들은 마른행주에서 마지막 남은 한 방울의 물까지 짜내듯이 자신의 남은 모든 것을 동원하여 마지막 희망을 걸고 치성품을 바쳤다는 말이다. 양반들이야 그나마 여유가 있을 수도 있었겠지만, 일반 백성들에게 이 목면은 그들의 마지막 생명줄이었을 가능성이 높았다.

시국이 흉흉하면, 백성들의 마지막 희망마저 갈취하는 많은 사람들이 이곳저곳에서 출현하기 마련이다. 그들은 팍팍하기 이를 데 없는 삶에 터를 잡고 삼아 가상의 희망을 최대한 크게 짓기 마련이다. 그리고 그 희망을 소비하도록 하면서, 남아 있는 백성들의 마지막 생명줄을 비용으로 청구했던 것이다. ‘새해는 지금과 같지 않아야 한다’는 무엇보다 간절한 소망을 위해 그들은 주린 배를 채우고 세금을 내야 할 돈을 치성으로 바쳤다. 소망을 위한 대가치고는 너무 가혹했으며, 그래서 이후 받게 되는 절망의 크기 역시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컸다. 조선시대의 이 아픈 현실이 400여 년 지난 2023년 우리의 마지막 날과는 다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