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예롭지 못한 명예교수를 거부한 영남대 이승렬 교수의 정년퇴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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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숲길을 걷습니다
내딛는 한 걸음이 조심스럽습니다
다른 어떤 생명을 위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험한 산길을 걷습니다
바위를 움켜쥔 나무뿌리처럼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살아 냈습니다
나뭇잎을 스치는 바람 소리에 귀 기울입니다
갈대밭에서 새 소리에 귀 기울입니다
여울물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립니다
지성과 양심에 따라, 포장과 훈장을 받지 않는
명예롭지 못한 명예교수를 거부하는
그리고 다가와 숲과 강과 생명의 친구가 되는
이반 일리치의 우정을, 습지의 푸른 생명을
함께 살자, 잘 살자, 내가 사는데 필요한 것이
너의 존재를 위협하지 않는 공존의 생명으로
우정의 공동체를 향한 첫걸음, 당신은
어느새 조용히 다가와 속삭이듯 말합니다.
얼음이 얼고, 눈이 쌓인 그곳에서 봄이 온다고

_ 이반 일리치의 우정으로 

5일 저녁, 대구 중구 계산동의 오래된 성당을 마주하고 있는 작은 음악다방 쎄라비엔 노교수의 정년 퇴직을 ‘축하’하는 자리가 마련됐다. 스스로 목수이자 시를 쓰는 시인으로 소개한 조기현 씨는 교수의 퇴직을 축하하며 시를 선물로 남겼다. 이반 일리치의 우정, 노교수는 지난해 12월 마지막 강의에서 학생들에게 “타인의 고통에 감응하는 능력이 여러분의 삶을 풍요롭게 할 것”이라며 생태·반성장주의로 요약되는 사상가 이반 일리치의 철학을 요약했다.

▲이승렬 교수(왼쪽)가 자신의 정년 퇴직 축하 자리를 마련한 제자 김임미 씨의 이야기를 듣고 있다.

영남대학교에서 29년 동안 영문학과 교수로 재직한 이승렬 교수(66)가 교단을 떠난다. 퇴직을 몇 해 남기지 않은 2018년 교수회 의장을 맡은 그는 박정희·박근혜로 이어진 어두운 그림자를 학교에서 걷어내기 위해 힘을 쏟았지만, 그 결과로 마지막 몇 해를 송사에 시달렸다. 영남대는 그가 학교와 최외출 총장의 명예를 훼손했다는 이유로 징계와 소송, 고발을 이어가고 있다.

그는 큰 탈 없이 장기 근속한 교수들에게 으레 주어지는 명예교수의 직함도 스스로 거부했다. 지난해 10월 퇴직을 앞두고 학교로부터 정부 포상에 필요한 서류를 제출하라는 공문을 받았지만, 그는 “윤석열을 수반으로 한 정부에서 훈장을 받는 건 나의 지성과 양심에 비춰 부끄러운 일”이고, “대학의 역사적 뿌리를 부정하는 현 대학 집행부로부터 명예교수직을 부여받는 것은 불명예스러운 일”이라면서 제출하지 않았다. ‘명예’교수를 거부함으로써 스스로 명예를 지키는 길을 선택한 것이다.

그는 교단에 있으면서 학내 민주화나 사회 문제에 관심을 놓지 않았다. 영남대민주단체협의회 상임의장, 대구환경운동연합 의장을 맡아 학내에서, 거리에서 점점 민주주의를 잃어가는 학교와 재단을 질타했고, 개발과 성장 일변도로 달려가는 우리 사회가 브레이크를 밟아야 한다고 목소리 높였다. 그런 연유로 그의 퇴직을 축하하는 자리에는 제자들뿐 아니라 지역 사회에서 그와 함께 한 ‘동지’들이 자리를 채웠다.

이용우 영남대학교민주동문회 전 회장은 “이승렬 교수님을 의장님으로 모시고 영남대 민주화를 위한 투쟁, 박근혜 퇴진 투쟁을 함께하자고, 제가 펌프질을 많이 한 것 같다. 그래서 안 당해도 될 징계도 이어진 것 같아서 죄송스러운 마음”이라며 “퇴임하시면 더 자유롭게 투쟁하지 않을까”라고 또 다른 ‘펌프질’을 해 웃음을 자아냈고, 박호석 금호강 난개발 저지 대구경북 공동대책위 대표는 “의장님을 알고 지낸지는 오래되지 않았다. 집회때마다 연설을 하시는데 늘 보면 울림이 크다. 내공이 있고, 논리적이며 호소력이 있다. 저는 아집이 강한 편이지만 의장님은 융통성이 있는 분인 것 같다. 그래서 좋아한다. 앞에 두고 이런 말씀드리는 게 낯 간지럽지만 감사드린다”고 고마움을 표했다.

퇴직 축하 자리를 준비한 1호 제자, 김임미 씨는 “처음 미국 유학 다녀온 ‘서울내기’가 경산에 와서 이렇게, 저렇게 부침을 겪는 걸 옆에서 다 봐왔다. 그걸 반면교사 삼기도 하면서 저의 세계관도 많이 바뀐 것 같다”며 “학교 안에서 앞장서서 투쟁해 주셨는데 이제 끝이라고 하니, 갑자기 등대가 없어진 듯한 느낌이 없지 않아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김 씨는 “독서대를 선물로 사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 지금까지 사람들이 문제가 생기면 이승렬 선생님을 떠올리고, 이승렬 선생님이 앞장서기를 바라고, 이승렬 선생님이 어떻게 하는지를 지켜봤다. 그 부담감이 얼마나 컸을지 잘 알고 있다”며 “이젠 그냥 오롯이 자신을 위해 진짜 하고 싶은대로 편안하게 지내셨으면 한다. 그다음 자리는 젊은 누군가가 또 메우는 그런 대구 사회가 되었으면 한다”고 전했다.

이상원 기자
solee412@newsmi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