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와 영남학원](1)영남대는 어떻게 “장물”이 되었나

“독립운동가인 최준, 최해청 선생을 일본군 장교 박정희가 약탈한 것”

17:10

[편집자 주] 박근혜 새누리당 대선 후보의 과거사 검증 논란이 뜨겁다. 정수장학회가 군사정권에 의한 장물유산으로 규정되고, 최필립 정수장학회 이사장과 이진숙 MBC 기획홍보본부장의 비밀 회동이 논란을 일으키는 등 박근혜 후보가 대통령이 되기 위해서는 과거 아버지 시대의 유산을 정리해야 한다는 주장이 안팎에서 흘러나오고 있다. 대구에서도 지난 9월 각계 인사들이 모여 ‘영남대재단정상화를위한범시민대책위’를 결성하고 또 다른 “장물”이라 불리는 영남학원 문제를 박 후보가 청산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이에 <뉴스민>은 박 후보와 영남학원 과거와 현재를 세 차례에 거쳐 연재한다.

(1)영남대는 어떻게 “장물”이 되었나
(2)영남대, 영남이공대···박정희 찬양과 비리의 역사
(3)영남대의료원 해고자 박문진, 송영숙에게 박근혜는···.

“독립운동가인 최준, 최해청 선생을 일본군 장교 박정희가 약탈한 것”

지난달 30일 유은혜 민주통합당 의원이 주관하고 국회 교육과학기술위원회 야당 의원들이 공동 주최한 토론회 ‘장물유산 영남대, 그 문제적 현실에 주목하다’에서 발제자로 참석한 함종호 4.9인혁열사계승사업회 부이사장은 단호하게 “약탈”이라고 못박았다.

▲ 지난 10월 30일 유은혜 민주통합당 의원의 주관하고 국회 교과위 야당 의원들이 공동 주최한 <장물유산 영남대, 그 문제적 현실에 주목하다> 토론회가 열렸다.

최근 박근혜 새누리당 대선 후보는 아버지 박정희로부터 이어지는 과거사 문제 청산을 지속적으로 요구 받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5.16 이후 군사정권이 김지태 씨로부터 강탈한 정수장학회 문제다. 박근혜 후보는 지난 10월 21일 기자회견을 통해 “정수장학회는 부일장학회를 승계한 것이 아니”라며 “법원이 강압이 있었다고 인정하기 어렵다고 판정한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가 여론의 뭇매를 맞았다. 기자회견이 끝난 후 “강압이 없었다고 했습니까? 잘못 말씀드린 것 같다”고 정정했으나 돌이킬 수 없었다.

정수장학회와 더불어 대구지역에서 박근혜 후보에게 청산을 요구하는 ‘장물’이 바로 영남대학교, 영남이공대학교, 영남대의료원을 비롯한 학교법인 영남학원이다. 함종호 부이사장은 영남대 설립 과정이 청구대와 대구대(현재의 대구대와는 별개)를 설립한 최해청, 최준 선생으로부터 박정희 정권이 “약탈하는 과정”이었다고 강조했다.

이들이 영남대를 “박정희가 약탈했다”고 주장하는 데는 1988년 영남대 국정감사에서 영남대 설립에 박정희 일가가 단 한 푼돈도 출연한 것이 없다는 사실을 확인한 것이 크다. 당시 조일문 재단 이사장은 박정희와 박근혜 후보의 재단 출연금을 묻는 질문에 “문서상 나타나 있는 것이 하나도 없다”고 답했다.

함 부이사장은 “박정희 일가는 일체의 출연금이 없었다”며 “그래서 박근혜는 영남대의 주인이 박정희의 유족인 자신임을 법제화해놓고 싶었을 것”이라며 영남학원 정관에 ‘교주 박정희’가 명시된 이유를 설명했다. 그렇다면 출연금 한 푼도 없이 박정희는 어떻게 두 대학을 병합하여 영남대의 ‘교주’가 될 수 있었을까.

독립지사 최해청, “새 시대 개척자” 만들기 위해 청구대 설립
“박정희 대통령을 최고고문으로 뫼시고…” 1인 대학으로 전락

지난 2010년 영남대학 교수회가 펴낸 ‘학교법인 영남학원 정상화 백서(백서)’를 살펴보면 영남대의 설립 과정이 상세하게 설명되어 있다. 영남대의 전신은 청구대와 대구대다. 청구대는 최해청 선생이 설립한 대학으로 함 부이사장은 “청구대는 최해청 선생이 독립된 나라의 청년들을 양성하기 위한 눈물겨운 노력의 산물”이라며 “최해청 선생은 거액의 기부자가 없는 가운데 온 정열을 바쳐 대학 설립을 위해 노력했다”고 설명했다.

백서를 보면 “우리가 나아갈 길은 독립정신을 되찾는 민족교육에 있음을 통감하고 ‘독립정신’의 기치를 높이 들고 나선 분이 독립촉성 경북청년총연맹 최해청 위원장이다”고 기록하고 있다. 최 선생은 1948년 9월 청구대의 전신인 ‘문리과전문학원’을 개원하고 초대원장에 취임했다. 최 선생은 “우리는 비록 과거 수난의 역사 속에서나마 오직 한 가닥의 민족정의와 독립정신의 혈통을 이어받아 조국의 문화계승자가 되어야 하고 새 시대의 개척자가 되어야 한다”는 개원사를 통해 일찍부터 청구대학의 건학정신을 천명했다. 독립된 조국의 일꾼을 키워내겠다는 의지를 밝힌 것이다.

하지만 최 선생의 의지는 1950년 청구대학이 설립되고 18년이 흐른 1967년 불의의 사고가 발생하면서 꺾이기 시작한다. 1967년 6월 15일 대학을 확장하는 과정에서 공사중이던 5층 본관 건물이 무너지는 사고가 발생했다. 이 사고로 10명이 사망하고 30여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이를 수습하기 위해 최해태 당시 학장과 조경희 교무처장, 심재완, 이찬우 교수 등이 참여한 자문위원회가 구성되었는데 이 자문위원회는 대학을 박정희 대통령에게 맡겨 사태를 수습하자는 해결책을 내놓는다.

심재완 교수는 ‘청구대학 운영난과 새 재단찾기’란 회고를 통해 “쉽사리 학교를 맡아 주겠다는 사람이 없었다. 어느날 최해태 학장과 나는 우연히 일치된 묘안을 생각했다”며 “박정희 대통령에게 맡아달라고 간청하면 맡아주지 않을까라는 안이 나왔다”고 밝혔다. 이후의 일은 일사천리였다.

1967년 8월 18일, 사고 발생 두 달여 만에 이후락 비서실장 주도하에 “청구대학은 박정희 대통령을 최고고문으로 뫼시고 학교의 운영이나 이사의 진퇴에 대하여 그 지도를 받아 지시에 따른다”는 결의문을 발표했다. 한 독립지사가 우국충정으로 만든 대학이 일본군 출신 대통령에게 헌납된 순간이었다. 최해청 선생은 유고집인 <청구유언>을 통해 “나의 동의란 하나도 없었다. 전부 일방적 행위였다”고 밝혔다.

“대구대학의 설립에는 문파 최준의 역할이 특히 컸다”
이맹희, “이후락 씨가 대구대학을 정부에 넘기라고 했다”

백서에는 “대구대학의 설립에는 문파 최준의 역할이 특히 컸다”고 기록하고 있다. 최준 선생은 광복과 함께 경북종합대학 기성회가 발족하자 준비위원회 기성회장으로 피선되어 현금 40만원과 장서 5,000여권을 기부했다. 이후 대구대학 창설때부터 대구대학이 영남대로 병합될때까지 재단이사, 이사장, 학장서리를 역임하며 민립대학의 전통을 사수하고자 노력했다.

백서에는 이후 대구대학이 청구대학과 합병하여 영남대가 설립되는 과정에 대해서는 상세한 설명이 없다. 단지 “영남학원의 역사적인 발족은 설립자 박정희 대통령의 교육에 대한 관심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며 박정희의 공을 칭송하는 기록이 남아있을 뿐이다.

대구대학이 정권에 강탈되었다는 사실은 삼성가 이병철의 장남 이맹희 씨가 1993년 발간한 회고록 <묻어둔 이야기>를 통해 알려졌다. 이 씨는 회고록에서 “당시 대구에 대학을 만들어 박 전 대통령이 은퇴 후 그곳 총장으로 취임할 것이라는 소문이 파다했다”고 밝혔다. 이 씨는 “삼성이 대구대를 소유하고 있었는데 이후락 씨가 어느 날 대구대학을 정부에 넘기라고 요구했다”며 “지금 상식으로는 말도 되지 않는 소리지만 그대로 헌납할 수밖에 없었다”고 대구대를 박정희에게 강압적으로 빼앗겼다고 강조했다.

당시 대구대학은 최준 선생이 이병철 회장에게 이사장 직을 넘겨주고 관리를 맡긴 상태였다. 최준 선생의 손자인 최염 씨는 “조부께서는 좀 더 나은 학교의 발전을 위해서 삼성의 이병철 회장에게 아무런 조건 없이 잘 운영하라고 대구대학의 재단을 넘긴 바 있다. 그런데 얼마 후 이병철 회장이 일언반구의 협의도 없이 대구대학을 포기하고 영남대학의 설립에 동의했다”고 설명했다.

백서에 따르면 이병철 이사장은 1967년 12월 15일 삼성빌딩에서 열린 이사회에 위임장을 제출하고 참석하지 않았다. 이 이사회에서 대구대학과 청구대학의 합병안이 결정되었고, 같은 날 청구대학은 반도호텔에서 이사회를 열고 대구대학과의 합병안을 결정했다. 이후의 과정은 일사천리였다. 서로 다른 두 곳에서 합병을 결정하자마자 미리 준비되어 있던 합병약정서가 통과되었고, 문교부는 바로 다음날 설립인가를 내주었다.

▲ 기자회견을 진행 중인 박근혜 후보, 박 후보는 과거 아버지 때부터 이어져온 과거사에 대한 청산 요구를 안팎으로 받고 있다 [사진:박근혜 후보 공식홈페이지]

박정희 측근의 영남대에서, 
박근혜 측근의 영남대로

박근혜 후보가 주장하듯 영남학원과 박 후보는 ‘직접적인’ 관계는 없다. 재단 설립에 출연한 돈도 없고, 본인이 직접 이사로 재직한 8년을 제외하고는 직접 운영에 참여한 적도 없다. 하지만 그의 아버지 박정희도 직접 영남대와 관계를 맺은 적은 없다. 단지 그 측근들이 이사직을 맡았고, ‘교주 박정희’를 명명하며 박정희를 위한 대학을 만들어갔다.

영남학원 초대 이사장 이동녕은 공화당 의원이었고, 제외한 12명의 이사 중 절반이 박정희 최측근 또는 정권실세였다. 이후락 비서실장, 김성곤 공화당 재정위원장, 이효상 공화당 경북지부장, 신현확 공화당 국회의원, 박정희 외삼촌인 백남억 공화당 국회의원, 초대 총장을 맡은 신기석은 박정희의 대구사범학교 동창이다.

박근혜 후보 자신이 이사로 재직할 당시(1981년)에도 한준우 정수장학회 이사, 육영수 여사의 조카사위인 유연상 육영재단 이사, 류준 육영재단 이사, 신기수 정수장학회, 육영재단 이사 등 측근들과 이사로 재직하며 영남학원 정관 1조에 ‘교주 박정희’를 명문화시켰다.

현재도 그와 다를 것이 크게 없다. 2009년 박근혜 후보는 자신의 측근이라 일컬어지는 강신욱 전 대법관, 우의형 전 서울행정법원장, 박재갑 서울의대 교수, 신성철 카이스트 교수 등 4명을 ‘종전이사’ 자격으로 이사로 추천했다.

강신욱 전 대법관은 박근혜 후보가 지난 2007년, 대선캠프를 꾸릴 당시 선거대책위원회 법률지원 특보단장을 맡은 인물이고, 지난해 신성철 교수의 디지스트(대구경북과학기술원) 총장 취임식에 박 후보가 참석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우의형 전 법원장이나 박재갑 교수도 전형적인 친박계로 분류되는 인물이다. 이중 강신욱 전 대법관만 이시원 이사로 바뀌었을 뿐 나머지는 그대로 자리를 지키고 있다. 이시원 이사도 2010년 박근혜 후보에게 개인 최고 후원액인 500만원을 후원한 측근으로 파악된다.

▲ 지난 30일 국회 토론회에 참석한 최염 씨는 “영남대는 경북 도민과 대구 시민의 대학으로 남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최염, “경북 도민, 대구 시민의 대학으로 남아야”
박근혜, “제3자 일 뿐”

상식적인 판단이 필요할 뿐이다. 최해청, 최준 선생이 설립한 청구대와 대구대는 모두 애국애족, 향토애정신, 독립정신을 대학설립취지에 명시하고 해방된 조국의 청년들에게 고등교육 기회를 제공하는 책임을 다했다. 하지만 오늘의 영남대는 “설립자 박정희의 창학 정신에 입각한다”고 당당하게 내세우고 있다.

최준 선생의 손자인 최염 씨는 30일 토론회에 참석해 “조부님이 돌아가실 때 유언을 하셨다. 내가 설립한 대구대학을 너의 학교라고 생각하지 말고 애통해하지 마라. 억만금을 냈다고 학교를 대대손손 자손들이 가질 유산으로 이어나갈 생각을 갖지 말라고 하셨다”며 “그래서 저도 영남대학을 박근혜에게서 찾아서 운영하겠다는 생각은 천분의, 만분의 일도 없다. 오로지 경북 도민, 대구 시민의 대학으로 남아야 한다는 생각뿐이다”고 말했다.

‘설립자 박정희’의 딸 박근혜 후보는 여전히 “영남대를 떠났기 때문에 물러나고 말고 할 것 없는 제3자 일 뿐”이라는 말만 되풀이하고 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