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 박문진 찾아 100km 걸어 온 김진숙, “그 외로움 내가 잘 아니까···”

김진숙-박문진, 영남대의료원 고공농성장에서 만나
박문진, "당신이 준 우정, 반드시 승리의 꽃으로 피우겠다"

19:37

예순을 앞둔 두 여성노동자가 70m 고공에서 서로를 부둥켜안고 울었다. 두 사람은 여행을 다니며 노후를 보내자며 산티아고 순례길을 함께 걷기로 했는데, 길 대신 하늘 위에서 만나버렸다. 영남대의료원 고공에서 182일째 농성 중인 해고노동자 박문진(58) 보건의료노조 지도위원과 김진숙(59) 민주노총 부산본부 지도위원이다.

29일 오후 4시께 김진숙 지도위원은 고공농성 중인 박문진 지도위원을 만났다. 김 지도위원은 지난 23일 부산에서부터 박 지도위원을 보기 위해 7일 동안 100km 넘는 길을 걸어왔다. 혼자 걷기 시작한 길은 도착하는 날 200여 명으로 불어났다. 박문진 지도위원이 고공농성을 시작한 후, 노조 간부와 언론, 의료지원팀을 제외한 일반인을 만난 건 이번이 처음이다.

고공에서 만난 두 친구는 울음을 멈추지 못했다. 김진숙 지도위원은 1층 엘리베이터를 타면서부터 눈시울이 붉어졌다. 박문진 지도위원도 연두색 형광 조끼를 입은 행진 대오가 의료원 정문으로 들어오는 걸 보면서부터 울었다고 한다.

▲영남대의료원 고공농성장에서 만난 김진숙 지도위원과 박문진 지도위원

김진숙 지도위원은 ‘고공농성 선배’다. 지난 2011년 부산 한진중공업 타워크레인에서 309일 동안 한진중공업 정리해고 문제 해결을 요구하며 고공농성을 했다. 그는 당시 입었던 빨간색 패딩을 챙겨왔다. 경남 밀양을 지나면서 시민에게 받았던 도톰한 스카프와 소금꽃나무 목걸이도 건넸다. 김 지도위원은 “누가 이런 거 해주더냐. 이건 내려와서 꼭 돌려줘야 한다”고 말했다.

김 지도위원은 점점 추워지는 날씨에 빨갛게 언 친구의 귀가 마음에 걸렸다. 박 지도위원은 장갑, 목도리, 모자로 중무장했지만 귀만 내놓고 있았다. 김 지도위원이 “귀를 덮는 모자를 쓰라”고 말하자, 박 지도위원은 “이게 사진이 잘 나온다”고 우스갯소리로 받아쳤다.

두 사람의 인연은 1994년께 부산 한 병원 투쟁 현장에서 시작됐다. 그 후로도 자주 투쟁 현장에서 마주쳤고, 몇 차례 여행을 함께 다니며 친해졌다. 김 지도위원은 “박문진이 말을 잘 안 들어서 많이 싸웠다”고 말했다.

▲도보 행진 중인 김진숙 지도위원

김 지도위원은 암 투병 후 생긴 부작용과 후유증으로 한동안 걷지도 못했다. 영남대의료원 고공농성이 100일을 넘기자 친구를 위해 나서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먼저 고공농성을 해본 사람으로서 박문진 지도위원의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1km씩 거리를 늘려가며 두 달 동안 걷는 연습을 했다. 연습 중 쇼크가 오기도 했다.

“저 친구가 이 상황에서 어떤 마음일까 내가 너무 잘 아니까 가만있을 수가 없었어요. 100일 지날 무렵부터는 ‘힘들어지는구나’, ‘길어지는구나’ 생각이 들어서 걷는 연습을 미리 좀 했어요. 제가 고공농성 할 때 쌍용자동차 동지들이 평택에서 부산까지 걸어왔었는데, 그 생각이 나더라고요. 저도 100일 되던 날이 너무 선명하게 기억나요. 내가 그때 크레인 위에서 ‘직녀에게’라는 노래를 불렀거든. 그런 외로움, 박문진이 말한 외로움이 뭔지 아니까. 그게 내 친구니까 외면할 수 없는 거에요” – 김진숙

그들은 농성장에서 30분가량 대화를 나눈 뒤 헤어졌다. 김 지도위원은 “내가 여기까지 걸어왔으니 운동화 한 켤레는 사줘야 한다”고 말했다. 박문진 지도위원은 웃음으로 대답했다. 김 지도위원이 보안문을 열고 나갈 때까지 눈을 떼지 않았다.

▲김진숙 지도위원과 박문진 지도위원이 고공농성장에서 아래를 향해 손을 흔들고 있다. 김 지도위원이 2011년 크레인 고공농성 때 입은 빨간 패딩을 입은 박 지도위원.

“그 몸으로 걸어왔다는 걸 직접 봤음에도 불구하고 실감이 안 나요. 하염없이 감사하고 고맙습니다. 든든한 힘이고, 앞으로 살아가는 힘이기도 하죠. 사실 일주일 동안 애가 타고 설레서 밥도 잘 못 먹었어요. 제가 여기서 할 수 있는 건 무탈하게 잘 도착할 수 있게 기도하는 거밖에 없었어요. 행렬이 들어오면서부터 계속 눈물이 나더라고요.” – 박문진

김진숙 지도위원도 2006~7년 당시 영남대의료원 노조를 기억했다. 김 지도위원이 조합원 교육을 하러 온 적이 있는데, 하루 3번씩 일주일을 해야 교육이 끝났다. 조합원이 1천 명이 넘었고, 그만큼 조합 활동도 활발했다.

“당시 영남대의료원 파업 후에 간부들이 연행돼 갈 때 조합원들이 막 닭장 버스를 쫓아갔어요. ‘위원장님, 위원장님’ 부르면서 신발이 다 벗겨지고 울며 며 쫓아갔어요. 간부들이 다 구속되니까 조합원들끼리 계명대 운동장에 따로 모여서 비대위를 만들고 노조를 지켜냈거든요. 그런 조합원들이 자발적으로 탈퇴서를 쓰고 나갔다? 이게 믿어지세요?” – 김진숙

노조파괴로 대법원에서 최종 유죄 판결을 받은 창조컨설팅은 영남대의료원 파업 후 해고 사태가 불거진 2007년 당시 의료원 측 노무사였다. 의료원은 창조컨실팅과 자문 계약을 맺은 사실은 인정했지만, 노조가 요구하는 노조파괴 의혹 진상규명에 대해서는 묵묵부답이다. 김 지도위원은 “노조 지키겠다고 구속되고, 해고되고, 고공에 오르고 언제까지 이런 일을 겪어야 하나”고 말했다. 

두 사람은 노후에 함께 여행을 다니며 살기로 약속했다. 산티아고 순례길도 걷고, 쿠바에 가서 살사댄스도 배우기로 했다. 노후를 함께 보내기로 한 이유는 해고노동자인 그들에게 남은 노후 보장이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김 지도위원은 “현장에 있었던 박문진 나이대 동기들은 정년퇴직하면 퇴직금도 나오고 연금도 나온다. 근데 박문진도 나도 아무것도 없다”며 “노동조합을 했다는 이유로 수십 년을 고통받은 데다가 아무런 보장도 없이 노후를 살아야 한다는 건 너무 가혹한 일이다. 이제라도 좀 되돌렸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부산과 대구를 김진숙이 걸으면서 그 길은 소통의 길, 생명의 길, 죽비를 기분 좋게 맞는 길, 공동체의 길, 치유의 길, 노동자의 순례길이 되었습니다. 주눅 든 어깨가 펴지면서 용기와 결의를 다짐하며 다시 웃을 수 있는 배짱과 패기를 얻었습니다. 당신이 준 우정, 반드시 승리의 꽃으로 피우겠습니다. 반드시 당신이 원하던 튼튼하고 예쁜 운동화를 신고, 산티아고 순례길도 걷고, 쿠바 여행 가서 살사 댄스도 배우면서 육십 평생 고단하고 힘들었던 주름진 세월을 위로합시다.” – 박문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