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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뭐든 ‘있다’가 자랑이지 ‘없다’는 자랑이 될 수 없다. “람보르기니 있다”는 자랑이지만 “티코도 없다”는 자랑이 아니다. 그러나 어떤 경우 ‘없다’가 그 사람의 ‘자유로운 영혼’을 입증하고 또 기술 문명이나 자본주의에 대한 저항 행위로 비치는 경우가 있다. 예컨대 ‘그것’이 없다는 놈은 저 잘난 멋에 사는 나르시시스트이거나, 뭔가 “쎈” 척하려는 게 분명하다.
나는 ‘삐삐’ 시절에 삐삐가 없었고, 지금은 ‘스마트폰’으로 형질 변경된 핸드폰이 처음으로 대중화되기 시작하던 1990년대부터 올해 9월까지 한 번도 그것을 가져본 적이 없다. 이유는 심리적 장애 때문이다. 육군 대위 출신의 아버지는 언제나 무서웠고, 나는 열 살 무렵부터 그가 어서 죽기만을 기도했다. 그 때문이었는지 아버지는 내가 국민학교 5학년 때 교통사고로 타계했다. 나의 기도는 죄의식으로 돌아왔다. 집안의 전화기를 볼 때마다 “곧 저 암흑이 나를 부를 것”이라는 께름칙함을 느꼈다. 이런 이유 때문에 1990년대 초 대구의 본가에서 독립해 서울로 이사를 오고 나서는 2년 동안 집안에 유선전화기를 놓지 않고 살았다.
위의 이야기를 올해 9월에 나온 어느 책에 짧게 쓰긴 했지만, 지금까지 이런 사정을 말로서든 글로서든 한 번도 화제 삼아 본 적이 없다. 이유는 첫 문단에 쓴 것과 같다. 나 같은 사람에게는 휴대폰 없이 사는 것이 편한데다가 ‘힙’하게 보일지는 몰라도, 구직자는 물론 갖가지 경제 활동과 업무를 수행해야 하는 사람들에게 핸드폰은 필수적이다. 오히려 이달 27일, 삼성전자 회장이 된 이재용 정도나 되면 스마트폰이 필요 없을지도 모른다. 자기 눈에 보이는 임직원이 모두 자신의 ‘인간 스마트폰’이니 말이다.
평생 스마트폰을 갖지 않을 것이기에 스마트폰에 대해 함구하려고 했다. 스마트폰이 없다는 것이 자랑질로 비칠 것을 우려했다. 그런데 지난 회 칼럼 「‘개목걸이’를 사고서」에 밝혔듯이, 어쩔 수 없이 핸드폰을 갖게 됐다. 친구가 오래 전에 사용하다가 내던져둔 구닥다리 삼성 A5 스마트폰을 얻어 집 앞의 통신사에서 스마트폰을 개통하고 나서, 단골 식당에 망연자실(茫然自失: 황당한 일을 당하거나 어찌할 줄을 몰라 정신이 나간 듯이 멍함)한 채 앉아서 온갖 생각을 떠올렸다. 핸드폰을 소지하고 나서야 핸드폰에 대해서 비판할 수 있는 권리를 얻게 된 양 분기탱천해진 이런 상황은 결단코 정상이 아니다. 군대에 간 사람만이 군대를 비판할 수 있고, 대학에 간 사람만이 대학을 비판할 수 있다? 이 상황은 결혼을 한 사람만이 결혼 제도를 비판할 수 있고, 애를 낳아 길러본 여자만이 육아 불평등을 말할 수 있다는 게 아니고 무엇인가(스마트폰 개통 후, 핸드폰 없이 카카오계정을 얻는 방법이 인터넷에 떠돌아다니는 것을 보게 되었다).
스마트폰도 없으면서 “스마트폰과의 사랑을 멈추라”고 말하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기분이 상했을까. 강신주는 아주 오래 전에 “냉장고의 폐기”(「인간다운 삶을 가로막는 괴물, 냉장고」,<경향신문>,2013. 7. 21)를 주장하고 나서 웃음거리가 되었다. 냉장고를 폐기하는 것으로는 자본주의를 바로잡지 못할 뿐 아니라, 그런 일상적 실천은 거대악을 면죄하면서 시민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논리라는 것이다. 올곧은 비판이기는 하지만, 냉장고와 결별할 수 없으면 “냉장고의 용량이라도 줄여라!”라는 말을 코웃음 치는 사람들이 원자력 폐기에 적극적일 리도 만무하다. 그 싸움은 거대악과는 별도의 싸움이다.
『나는 지방대 시간 강사다』(은행나무,2015)를 출간한 김민섭은 선배ㆍ동료들로부터 “왜 우리를 모욕했느냐”, “왜 대학을 비리의 온상으로 묘사했느냐”, “너 때문에 학교가 감사를 받을 수도 있다”는 항의를 받았다. 핸드폰ㆍ냉장고ㆍ인터넷을 버리자는 주장을 불가능성만 내세워 조롱하는 사람이나 김민섭의 집에 밤에 찾아와 사과하라고 을러대는 사람은 실제로 같은 사람들이다. 자동차가 제 몸이 되어버린 사람에게 대중교통이 불편하기만 한 것처럼 ‘있다’와 일체가 된 사람은 ‘있다’의 바깥이나 ‘없다’를 상상하지 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