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사히글라스 공장 밖 9년] (2) 구미로 흘러온 사람들 오수일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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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주] 올해로 9년째다. 2015년 7월 아사히글라스 하청노동자들 178명이 전원 해고됐다. 22명의 노동자들은 원청인 아사히글라스가 직접 고용해야 한다며 9년째 공장 앞 농성장을 지키고 있다. 1, 2심 법원도 아사히글라스가 해고노동자를 직접 고용해야 한다고 판결을 내렸지만, 노동자들은 여전히 공장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아사히글라스가 노동자 직접 고용을 거부하면서 노동자에게 배상해야 할 임금, 이자는 지난해 12월 기준으로 약 90억 원이다. 노동자들과 아사히글라스가 서로 제기했던 민사소송은 6건이고, 파견법 위반으로 진행 중인 재판도 있다. 아사히글라스는 국내 최대 로펌인 김앤장과 법무법인 태평양에 사건을 맡겼다. 법조계에 따르면 소송 대리 비용도 만만찮을 것으로 예상된다. 아사히글라스는 노동자들의 해고 이후 정문 앞 경비 강화에도 비용을 더 투입했다. 노동자를 직접 고용하는 대신 법률 대응으로 아사히글라스가 9년 동안 쓴 돈은 100억을 훌쩍 넘긴다.

노동자들은 노동조합 설립, 해고를 겪으며 다방면으로 투쟁에 나섰다. 법원을 출입하는 일도 잦아졌다. 9년 동안 26건의 다양한 사건으로 재판을 받았고, 소송비용으로만 1억 원이 넘는 돈을 썼다. 법은 도대체 누구의 편인가 질문을 수없이 했다. 30대 초반의 노동자는 40대가 됐고, 40대 중반 노동자는 50대가 됐다. 만약, 아사히글라스가 노동조합을 인정했더라면 9년째 거리에서 싸우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뉴스민>은 노동조합을 만나 삶이 바뀐 해고노동자들의 현재 모습을 통해 노동자에게 취약한 법과 제도까지 짚어 본다.

▲금속노조 아사히비정규직회 오수일 조합원

부산 출신 오수일(50)도 피곤함에 절은 표정으로 공장에 들어섰다. 정문을 넘어서면 담배 생각이 났으나, 정신 차리면 어느새 기계가 된 듯 유리판을 자르고 있다. 오수일의 조는 1층 구트 공정. 거기서도 오프 1라인이다. 단순반복 작업인 구트 공정은 창의력보다 체력과 인내심을 요하는 일이다. 다른 조와 생산성 경쟁을 해야 타박을 면하기에, 박차에 차이는 말처럼 일해야 했다. 성취감 따위 얻을 길이 없는 것이다. 2013년 처음 아사히글라스 공장 문을 두드렸을 때 오수일의 얼굴은 지금의 얼굴과 달랐다. 사업에 모조리 실패한 뒤, 썩은 동아줄이라도 잡는 심정으로 아사히글라스 하청업체에 입사한 오수일의 표정에는 절박함과 일말의 기대감이 있었다. 초 단위로 옥죄는 생산작업이 그 모든 표정을 분할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오수일은 사실 두 번 다시는 공장 노동자가 되지 않겠다고 다짐했던 적 있다. 더럽고 서러운 꼴을 너무 많이 봤기 때문이다. 젊은 날에 산업재해를 당해봤고, 직접 인력 파견업체를 운영하면서 비정규직 노동자의 설움도 겪어봤다. 회사에서 억울한 일을 당해도 입도 뻥긋하지 못하는 청년들은 가끔 보는 사장 오수일을 찾아 하소연하곤 했다. 그렇지만 바지사장에 불과한 오수일이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그랬던 그가 어떻게 아사히글라스에 흘러오게 된 걸까.

***

오수일의 첫 직장은 달성공단 섬유공장이었다. 부산에서 중학교를 다녔지만 일찍이 그만두고, 외삼촌이 운영하는 공장에 들어가게 됐다. 혈육이라고 특별히 사정을 봐주지는 않았다. 천막이나 다를바 없는 기숙사에 살았고, 월급은 수중에 들어오지 않고 부모님께 보내졌다. 원사가 직물이 되기 바로 전 원사에 풀을 먹이고 크기에 맞게 빔에 감는 일인데, 하루 12시간씩 일해야 했다. 쉬는 날도 없었다. 힘든 것도 문제였지만 지저분하게 느껴졌고, 같이 놀던 친구들은 학교에 다니고 있다는 걸 떠올리면 먼지 묻은 얼굴이 수치스럽게 느껴졌다.

견디다 못한 오수일은 공장을 뛰쳐나왔다. 공단에서 무작정 아무 버스를 타다, 좀 떨어진 다른 공단에 내려 그곳에서 취직했다. 삼촌 공장보다는 조금 나았고, 월급도 줬다. 첫 월급은 30만 원. 그때부터 오수일은 좀더 나은 공장을 찾아 공단을 전전했으나, 특별히 더 나아지는 건 없었다. 옆에서 산재를 당하는 동료들도 더러 목격했다. 검정고시 공부를 결심했다. 평생 일하고 산다 생각하니 까마득했기 때문이다. 무리했던 탓일까. 오수일은 야간근무 도중 풀 먹인 원사를 감는 롤러에 손이 빨려 들어가는 산업재해를 당했다. 몸이 딸려가는 찰나, 다행히도 옆에 있던 사람이 급히 안전바를 내려 목숨은 건졌다. 8개월간 입원 치료 후 다시 일해보려 했는데, 롤러 앞에 서면 겁부터 나는 바람에 일을 할 수 없었다. 그길로 공장을 그만뒀다.

무슨 일이라도 해야 했다. 그만두기 전 공장에서 아내를 만나 결혼했기 때문이다. 달성공단 앞에서 포장마차를 시작했다. 신혼집은 달성공단 근처 13평짜리 반전세로 잡았다. 회를 떠서 퇴근하는 노동자들에게 팔았다. 공장에서 벗어나는 줄 알았더니, 손님에게 공장 돌아가는 이야기를 더 많이 듣게 됐다. 친구와 한잔 걸치러 온 주민도, 새벽에 퇴근한 노동자도 고된 몸을 술로 달래는 듯했다.

자리를 잡아가던 포장마차는 1년 만에 끝내야 했다. 장사가 점점 잘 되어가니 민원 신고도 늘었다. 마침 첫 아이가 태어났을 때다. 돈 벌 길은 장사밖에 없었다. 당구장을 열었다가 실패했다. 아내와 함께 커피를 타서 달성공단과 상가에 배달했더니 사업이 번창했다. 하지만 이도 안정적인 사업화에는 실패했다. 인복이 있어 여러 시도를 해볼 수는 있었다. 병원 주임으로 근무하면서 원장의 눈에 들어, 일하면서도 방통대 진학까지 지원받을 수 있었다. 경영에도 관심을 기울이던 차, 구미 대기업에서 일하던 친형의 연락을 받고 구미행을 결심했다.

대기업에서 쌓은 인맥을 무기로 식육점 영업을 해보자는 제안 때문이다. 구미에서는 대기업 인맥이면 뭐든 다 할 수 있다는 형의 말을 믿어보기로 했다. 하지만 때가 좋지 않았다. IMF 이후, 구미 공단은 산업 재편이 한창일 때였고 이는 형이 속한 대기업도 마찬가지였다. 즉, 퇴직 사원들의 자영업 진출로 인해 경쟁이 치열해지는 시기였다. 그 대기업에서 퇴직해 장사를 시작하는 사람이 형뿐만이 아니었다. 새벽부터 고기를 떼와 발골 작업을 했는데 급여는 나오지 않고 빚만 늘었다. 고기도 팔리지 않고 쌓여갔다.

거리에 나앉을 수는 없어 골몰한 결과, 오수일과 형은 인력 파견업체를 차려보기로 했다. 공단에서 아웃소싱이 확산되는 추세를 겨냥한 사업이었다. 사업은 상당히 잘 풀렸는데, 자리를 잡는가 했더니 형이 갑자기 러시아로 떠났다. 퇴직한 회사에서 러시아 파견직을 제안했기 때문이다. 당시만 해도 100명 가까운 사원들을 공장에 파견했는데, 형이 떠나고 1년이 지나니 30명으로 떨어졌다. 원청업체 직원들 술 접대를 해도, 아무리 급한 구인 조건에 맞춰줘도 인맥 없이는 쉽지 않았다. 2010년도에는 본격적으로 원청 출신 퇴직자들이 용역업체를 차리는 사례가 나왔고, 그들을 따라잡을 수는 없었다. 용역업체가 늘어나니, 원청 사이에서도 영업이익을 적게 책정하기 시작했다. 초창기 12%이던 영업이익은 5%까지 줄었는데, 급기야 4대 보험까지 떠넘기기 시작했다.

사업이 어려워지기도 했지만, 인도급 사업 자체도 호락한 일이 아니었다. 그 사업은 오수일의 내면을 갉아 먹었다. 원청이 책정한 인건비에서 오수일이 수수료를 가져갈수록 그만큼 노동자에게 가는 비용은 줄어드는 구조였다. 인도급 업체로 밀려오는 사람들은 대부분 딱한 처지였는데, 자꾸 마음에 걸리는 얼굴들이 늘었다. 그 사람들에게 오수일은 급여가 깎이는 이유를 제대로 설명할 수 없었다.

악조건에서도 말없이 일하던 젊은 여성 직원이 있었다. 그 직원이 원청 정규직 직원에게 성희롱당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오수일이 사업을 위해 여러 차례 별도로 접대해야 했던 그 업체였다. 고깃집에서 마주한 원청 관리자들의 얼굴은 거침없었다. 생기 없는 비정규직의 얼굴에서 보지 못한 표정이다. 피해 직원이 나서지 않았지만, 오수일은 원청 직원에게 자초지종을 물어봤다. 변하는 건 없었다. 성추행에 대해 하청업체 사장이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오수일은 사업을 접기로 했다. 다른 일자리를 찾기 위해 교차로를 펼쳐 들었다. 거기서 아사히글라스 사원 모집 광고를 보게 됐다. 실패를 거듭하면서, 오수일은 다시는 공장에서 일하지 않겠다는 결심을 접고 절박한 얼굴로 아사히글라스로 향했다. (계속)

▲구미 4공단 아사히글라스 공장 앞에 선 오수일 조합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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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박중엽, 김보현 기자
기사=박중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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