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형철의 멋진 신세계?] ‘블레이드 러너 2049’, 다시 인간에 대해, 묻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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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0-25 11:05 | 최종 업데이트 2017-11-08 13:44

[=격주 수요일마다 ‘정형철의 멋진 신세계?’를 연재합니다. 브레이크 없는 테크놀로지의 폭주는 우리의 삶을 뿌리째 바꾸고 있습니다. 미래가 현재에 들어와 있고, SF가 현실이 되어버린 세상. 기술산업문명이 만들어낸 기괴한 풍경 속에서 대안과 전환을 모색해 봅니다. ]

<블레이드 러너>가 돌아왔다. 35년 만이다. 전작(1982)이 그려냈던 2019년을 바로 눈앞에 두고, 2049년의 미래 세계로 우리는 또다시 시간여행을 떠난다. 제법 긴 상영시간에도 빛과 소리가 만들어내는 영화적 감흥은 충분하다. 오랜 기다림이 그다지 아깝지 않다.

무엇보다도 이제는 전설이 된 전작의 아우라를 훼손하지 않으면서 영화적 흐름을 이어가고 있다는 점이 눈에 띈다. ‘사이버펑크’, ‘SF느와르’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고 평가받았던 <블레이드 러너>만의 영화미학은, 속편 곳곳에서 재현되고 있다. 물론 전작이 남긴 충격적인 감수성과 문제의식을 넘어섰다고 평가하기는 어렵지만 말이다.

▲리들리 스콧 감독의 <블레이드 러너>(1982)

돌이켜보면 흥행 실패와 평단의 혹평에, 리들리 스콧의 실패한 초기작으로 영영 묻힐 뻔했던 전작 <블레이드 러너>는, 뒤늦게 ‘저주받은 걸작’의 반열에 오르기까지 오랜 세월의 풍파를 견뎌야 했다. 아니, 견뎌야 했다기보다는 더욱 강렬한 작품으로 다시 태어났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비디오(VHS)가 대중화되면서 이 걸작을 나중에서야 알아본 관객들의 열화 같은 청원이 감독판(1993)과 최종본(파이널컷, 2007)을 만들어냈다. 그 결과, 어떤 영화도 범접하기 힘든 디스토피아적 상상력에다 영화적 완성도까지 더해져 후대에 가장 지대한 영향을 미친 SF의 고전으로 거듭났다.

<블레이드 러너> 속편 책임자로 선택되었다는 것부터 드니 빌뇌브는 이미 역량이 공인된 감독임에 틀림없지만, 전작의 명성이 적지 않게 부담스러웠을 것이라는 점은 짐작하고도 남는다. 그런데도 그는 특별한 흠결을 찾아내기 어려울 정도로 무난하게 속편을 완성해냈다. 전작과 연결고리를 매끄럽게 이어가면서도 좀 더 차분하고 긴 호흡으로 문제에 접근한다. 이러한 드니 빌뇌브의 방식은 매우 독특한 감성을 지닌 SF로 높이 평가받았던 자신의 영화, <컨택트, 2016>에서처럼 이 영화에서도 감독 특유의 스타일로 살아나고 있다.

인간보다 더 인간적인? – 비(非)인간의 존재를 통한 인간에 대한 물음

<블레이드 러너>는 스탠리 큐브릭의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와 더불어 여러 방면에서 가장 많이 논의되는 SF영화 텍스트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철학적 주제와 관련하여 <블레이드 러너>만큼 많이 언급되는 영화는 드물다. 얼핏 살펴보더라도 ‘존재론과 실재론’, ‘유한성과 무한성’, ‘가상과 현실’, ‘주체와 타자’, ‘권력과 계급’과 같은 눈에 띄는 주제 외에도, 들뢰즈-과타리의 ‘안티-오이디푸스’ 개념을 빌려서 철학적 재해석(이진경)을 시도하는 등 좀 더 세밀한 접근이 이루어지기도 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우리가 <블레이드 러너> 전작과 속편 모두에서 주목할 수밖에 없는 가장 본질적인 문제는 결국 ‘인간이란 무엇인가?’에 관한 물음이다.

전작 <블레이드 러너>의 중심 설정은, 자신들을 설계한 인간만큼 뛰어난 지능과 능력을 지녔지만, 4년이라는 한시적 삶만을 보장받은 리플리컨트(복제인간)의 비극적 운명이다. 이들은 위험한 우주 탐험과 다른 행성의 식민지 개척에 기계적 도구로 사용되는 노예에 불과했다. 이에 복제인간들은 반란을 일으키고 특수경찰 ‘블레이드 러너’는 비정하고 집요하게 이들을 쫓게 된다.

그런데 복제인간 제조회사 타이렐의 모토, ‘인간보다 더 인간답게!, More Human Than Human’처럼 이들이 만들어낸 최신형 리플리컨트는 인간과 구별하기 힘들 뿐 아니라, 오히려 인간보다 더 인간적인 면모를 갖춘 존재로 그려진다. 그런 면에서 주인공 데커드(해리슨 포드)와 사랑에 빠지게 되는 레이첼이 자신이 인간이 아니라 리플리컨트에 불과하다는 사실에 슬픔의 눈물을 흘리는 장면은 매우 인상적이다. 공감 능력이 없는 전형적인 리플리컨트의 모습으로 보였던 로이는, 자신을 죽이려는 데커드를 죽음 직전에서 구하고, “빗속에 흐르는 눈물처럼” 마지막 숨을 거둔다. 이 장면에서 로이가 보여준 모습은 너무나 인간적인 모습, 그 자체였다. 아마도 <블레이드 러너>에서 가장 감동적이고 기억에 남는 명장면으로 손꼽히는 씬이다.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결국 상대적일 수밖에 없다. 그런 의미에서 인간 세바스찬에게, 리플리컨트 프리스가, 그 유명한 데카르트의 인간에 대한 정의,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를 인용하며 자신과 인간이 별반 다를 바 없음을 이야기하는 장면은 아주 상징적이다. 인간은 비(非)인간과의 대별을 통해 자신의 존재를 명확히 증명해 오기를 힘써 왔다. 데카르트의 정의는 비인간과의 확연한 차이를 통한 인간의 특성을 탐구한 결과다. 하지만 오랫동안 인간을 규정해 왔던 이러한 정의는 이제 근본적으로 흔들리고 있다. 차이를 분별하려 애써보지만 생각과 지능이 인간만의 전유물이라는 인간이 확립한 진리는, 인간 스스로 ‘생각을 지닌 다른 존재’를 창조함으로써 자체 폐기되고 말았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은 결코 SF가 아니라 지금 우리의 현실이 되어가고 있다.

나는 누구인가? – 이식된 기억과 정체의 소멸

<블레이드 러너>를 관통하는 근본적인 질문의 또다른 양상은 ‘나는 누구인가?’에 관한 것이다. 전작의 주인공 데커드는 인간인지 리플리컨트인지 모호하게 그려진다(원작소설이나 감독, 배우의 심중과는 상관없이 분명하지 않다). 확고하게 인간이라고 생각하고 싶어하지만, 스스로도 인간이라고 확신할 수 없는 상황에 마주친다. 그럴 때마다 인간으로 살았던 기억을 되살릴 뿐이다. 물론 그 기억은 실제의 기억인지 이식된 기억인지 확실하지 않다. 그런 의미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기억에 의존해 증명하는 방식은 불가피하지만 매우 불안정할 수밖에 없다. 레이첼은 그토록 소중하게 간직해온 자신의 기억이 결국 이식된 남의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확인하게 되는 순간, 결국 자신의 정체성에 절망하고야 만다.

▲드니 빌뇌브 감독, <블레이드 러너 2049>(2017)

속편 <블레이드 러너 2049>에서는 이와 같은 ‘정체성’ 문제가 훨씬 더 중요하고 비중있게 다뤄진다. 속편의 주인공 블레이드 러너 K(라이언 고슬링)는 레이첼이 남긴 생명의 흔적과 자신의 유년 시절 기억 한 조각이 퍼즐처럼 맞춰지면서 자신이 그 생명의 당사자일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품게 된다. 자신과 같은 리플리컨트들에게는 불가능의 영역으로 남아 있는 생명의 가능성이란, 어느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절대적 욕망과 본성이다. 하지만 K 역시 자신의 기억은 결국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지고 심어진 것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 속편을 지배하는 K의 우수에 찬 표정과 모습은, 바로 이러한 정체의 소멸과 상실에서 비롯된다.

전작의 마지막 장면에서 레이첼과 함께 어디론가 사라졌던 데커드는, 그로부터 30년이 흐른 2049년에 자신을 찾아온 블레이드 러너 K와 조우한다. 데커드는 속편에서도 자신의 정체를 분명히 드러내지 않는다. 데커드가 인간인지, 리플리컨트인지, 리플리컨트라면 어떤 유형인지, 여전히 확인할 길이 없다. 다만 데커드는 레이첼과 함께 ‘기적의 아이’와 관련된 존재라는 것과 그 아이를 지키기 위해 혼신을 다했다는 사실만 분명할 뿐이다. 속편에서의 데커드 등장은, 혼란스럽고 기괴한 복제인간 시대에도 생명이 매개한 관계만큼 강렬한 삶의 열망과 동기는 없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이러한 정체성 문제는 속편의 다른 주변부 캐릭터에도 확대되어 나타난다. 속편에서 홀로그램에 불과한 조이는 K와의 교감을 나누게 되는데, 결국 자신의 소멸을 감수하면서까지 K와의 관계를 포기하지 않는다. 만질 수도 느낄 수도 없는 홀로그램 조이에 대해, K는 “넌 내게 진짜야”라고 말해 준다. 관계와 교감을 거래하는, 실체 없는 가상 프로그램에 불과하지만 K의 유일한 벗은 조이뿐이었다. 이런 점에서 조이는 또다른 SF 걸작, <그녀, 2013>에 나오는 인공지능 프로그램 사만다보다 진일보한 캐릭터라고 할 수 있다.

디스토피아 시대의 죽음과 생명

어둡고 무겁게 내려앉은 하늘, 뾰족하게 높이 솟은 건물엔 불기둥이 치솟고, 뿌연 허공을 굉음을 지르며 가르는 비행선, 도시 뒷골목을 쉴새없이 적시는 산성비, 을씨년스러운 표정의 사람들. <블레이드 러너>는 산업사회와 기술문명의 제어되지 않는 탐욕이 만들어낸 디스토피아를 탁월하게 묘사했다. 그리고 이 영화가 그려낸 풍경은, 이후 여러 장르의 다양한 작품에서 차용되고 변주된다.

이처럼 이 영화에서 그려내고 있는 미래사회의 기괴한 풍경은 죽음의 이미지와 곧장 연결된다. 인간사회가 스스로 종말의 지점까지 몰고 간 극단의 결과이다. 그 어디에서도 산뜻한 생명의 이미지는 찾아볼 길 없다. 일 년 내내 화창한 날씨를 자랑하는 현실의 로스엔젤리스는 어둠과 죽음의 도시로 변해 있다. 외계 행성으로 탈주하지 못한 사람들, 노아의 방주에 올라타지 못한 사람들은 이 죽음의 도시에 남아, 거대한 지옥에 갇혀 하루하루를 아무 희망도 없이 근근이 살아갈 뿐이다. 그리고 이들을 내려다 보며, “우주 식민지의 새로운 삶이 당신을 부릅니다. 기회와 모험의 황금 땅에서 새로운 기회를 찾으십시오.”라는 선전 방송이 끊임없이 되풀이된다.

하층계급이라고는 하지만, 인간의 삶이 이럴진대, 리플리컨트의 삶은 어떻겠는가. 무엇보다도 이들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 전작에서 반란을 일으키고 잠입한 넥서스6은 지능과 신체적 능력 면에서는 보통의 인간을 앞지르지만 불과 4년이라는 생을 보장받을 뿐이다. 4년의 삶이란 도무지 이해불가의 시간이다. 속편에서 쫓기는 리플리컨트로 나오는, 사퍼는 넥서스8에 해당한다. 그는 이미 폐기처분 명령이 떨어진 리플리컨트로서 자신의 신분을 속이며 숨어 살고 있다. 하지만 눈동자에 새겨진 시리얼 번호는 영원한 낙인과 족쇄가 되어 결국 그를 죽음으로 내몰았다. 블레이드 러너 K와 같은 넥서스9 모델은 이전 모델과는 달리 자신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인간에게 무조건적이고 완벽하게 순종해야만 한다.

▲드니 빌뇌브 감독, <블레이드 러너 2049>(2017)의 한 장면.

결국 리플리컨트의 삶은 곧바로 죽음과 맞닿아 있다. 그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한계를 조금이라도 벗어나는 순간 죽음을 맞이하도록 설계되어 있다. 속편에 등장하는 세 부류의 리플리컨트의 죽음은 이렇듯 각각 자신에게 설정된 한계 상황과 밀접하게 관련돼 있다. 이러한 공통된 운명에도, 그들이 맞이하는 죽음은 조금씩 다른 의미를 지닌다. 사퍼(넥서스8)의 죽음은 제품의 폐기를 의미하고, 웰러스 비서 러브(넥서스9)의 죽음은 절대적 복종으로 인한 죽음이며, 블레이드 러너 K의 죽음은 불복종의 죽음, 다시 말하면 저항의 죽음을 상징한다. 여기에서 어떤 죽음이 더 가치가 있는지 따지는 것은 무의미하다. 다만 이들의 죽음은 모두 개별적이지만 결국 생명에 대한 강렬한 열망으로 이어진다.

속편 <블레이드 러너 2049>는 전작과 다르게 리플리컨트의 생명으로서의 가능성을 열어놓았다. 레이첼이 낳은 아이는 리플리컨트에게는 기적과 같은 존재이다. 인간에 의해 제품처럼 만들어졌고, 생식 능력을 갖추지 못한 채 세상에 나온 리플리컨트에게 생명은 다다를 수 없는 꿈, 불가능의 영역이었다. 만일 그 기적의 아이가 이들에게 새로운 생명의 시원이 될 수 있다면 인간과 리플리컨트의 운명은 다시 설정되어야 한다. 생명의 기적을 부여받은 리플리컨트는 더 이상 인간에게 종속된 존재로서 머물지 않을 것이며, 그렇게 된다면 필연적으로 인간의 통제를 벗어나는 길을 모색할 것이다. 비록 영화적 설정이지만 복제인간 리플리컨트의 생명으로서의 가능성은 인간에게는 충격적인 결과를 가져올 것임에 틀림없다. 이처럼 생명은 기적을 낳는 근원이다.

다시 인간에 대해, 묻다

전작 <블레이드 러너>가 배경으로 삼았던 2019년이 다가오고 있다. 물론 누구도 이 영화에서 그려내고 있는 모습이 현실에서 그대로 일어나리라 예상하지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에 나온 <블레이드 러너 2049>도 마찬가지다. 영화는 영화일 뿐이다.

하지만 인간이 달나라에 가기 1년 전에 만들어진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1968)는 수십년 전에 이미 오늘날 인공지능 시대에 우리가 고민해야 하는 문제를 심도 있게 다루고 있다. 이 영화는 기계와 기술이 인간의 통제를 뛰어넘는 자율성을 갖게 되면 어떤 재앙을 가져오게 되는지와 기술에 대한 통제력을 잃고 유약한 모습으로 전락해 가는 인간의 어리석음에 대해 날카롭게 풍자하고 있다. 그리고 이 영화의 메시지는 현실의 우리에게 적지 않은 고민을 던져준다. SF적 상상력이 마냥 허무맹랑한 것으로 치부되어서도 곤란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우리는 지금 이전 시대보다 훨씬 더 기술이 압도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기술의 무분별한 질주는 거의 모든 SF가 경고하는 자멸의 근원이다. <블레이드 러너>에 나오는 리플리컨트에게만 한계 상황이 주어져야 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우리는 인간에 대해, 그리고 인간에게 주어진 한계에 대해 다시 묻고 답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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