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영의 시적 여정] (24) 사랑을 만드는 기술, 혁명의 기술

15:20

[=황규관 시인이 연재하는 ‘김수영의 시적 여정’은 매달 5일, 20일 뉴스민에 연재한다. 인용된 작품의 전문 수록은 저작권자와의 협의를 마쳤습니다.]

「사랑의 변주곡」은 “욕망이여 입을 열어라 그 속에서/ 사랑을 발견하겠다”로 시작된다. 임홍배에 의하면 「사랑의 변주곡」은 “흔히 김수영의 시에서 예외적으로 ‘낭만적 의식의 과잉’에 함몰된 시로 평가받기도” 한다고 한다.(「자유의 이행을 위한 시적 여정」) 일찍이 유종호도 이 작품을 가리켜 “아마도 우리 말로 씌어진 가장 도취적이고 환상적이며 장엄한 행복의 약속을 보여주고 있다”고 말한 적이 있다. “낭만의 과잉”이나 “도취적이고 환상적”이라는 지적은 그러나 김수영의 시적 인식이 5·16쿠데타 이후 분화되고 다시 종합되면서 복잡하게 계열화된 점을 짚지 못할 때 불충분한 것이 된다.

김수영이 「사랑의 변주곡」에서 말하고 싶었던 것은 무엇일까? 혹 과잉 그 자체나 도취는 아니었을까? 과잉은 무절제로 치환되어 비판받기보다 생산의 역동성을 표현한다는 맥락에서 재조명되어야 한다. 기존의 가치와 개념들을 전복하거나 그것에 새로운 힘을 불어넣는 것은 바로 과잉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새로운 힘을 불어넣는다는 것은 기존의 것들을 단순하게 개·보수하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새로운 힘을 불어넣는다는 것은 그 대상들의 질적 전환을 꾀한다는 쪽에 더 가깝다. 따라서 과잉 그 자체가 부정적인 현상은 아니다. 문제는 언제나 그것의 방향이다. 그렇다면 「사랑의 변주곡」에서 보여준 김수영의 과잉은 무엇을 구성하고 있는 것일까.

비슷한 시기에 쓴 「VOUGE야」에서는 “신성을 지키는 시인의 자리 위에 또 하나/ 넓은 자리가 있었”다고 말한다. 비록 그것은 “섹스도 아”니고 “유물론도 아”니고 “선망조차도” 아니지만 그것을 향한 “아이들의 눈을 막은 죄”에 대해서 말한다. 마지막에는 “그리고 아들아 나는 아직도 너에게 할 말이” 있으나 “안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로 끝난다. 물론 철저한 반어이다. ‘VOUGE’로 상징되는 자본주의적 욕망을 시의 화자는 줄곧 “신성을 지키는 시인의 자리”의 아래 굴복시켜왔다고 생각해 왔으나 현실은 그렇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다면 “신성을 지키는 시인의 자리”와 ‘VOUGE’의 자리를 바꾸면 사태가 해결이 될까? 당연히 그것은 타락이나 또는 궁극적 패배가 된다. 그래서 김수영이 발명한 것이 “욕망”의 입을 벌리게 해 그 안에서 “사랑을 발견”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 발언은 사랑이란 욕망의 힘을 통해 지탱된다는 속화된 명제를 배격한다.

2연은 특히 이 시에서 심연에 해당된다.

사랑의 기차가 지나갈 때마다 우리들의
슬픔처럼 자라나고 도야지우리의 밥찌끼
같은 서울의 등불을 무시한다
이제 가시밭, 넝쿨장미의 기나긴 가시 가지
까지도 사랑이다

_「사랑의 변주곡」 부분

2연은 과잉을 분비하고 있는 어떤 이념에 대한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서 두 편의 다른 작품이 겹쳐 읽히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1963년 작 「반달」과 그 다음 해인 1964년 작 「거대한 뿌리」이다. 「반달」은 “음악을 들으면 차밭의 앞뒤 시간이/ 가시처럼 생각된다”로 시작하는데 단지 「사랑의 변주곡」에서도 보이는 “가시”라는 어휘의 중복 사용 때문이 아니다. 비밀은 3연에 있다. 「반달」의 3연은 다음과 같다.

음악을 들으면 차밭의 앞뒤 시간이
가시처럼 생각된다 그리고 그 가시가
점점 더 똑똑해진다 동산에 걸린
새 달에 비친 나뭇가지처럼
세계를 배경으로 한 나의 사상처럼
죄어든 인생의 윤곽과 비밀처럼……
곡은 무용곡―모든 음악은 무용곡이다
오오 폐허의 질서여 수치의 개가(凱歌)여
차나무 냄새여 어둠이여 소녀여
휴식의 휴식이여
분명해진 그 가시의 의미여

_「반달」 부분

「반달」은 분명히 4·19혁명의 기억으로 작품인데, 처참하게 짓밟혀버린 혁명의 “폐허”와 “수치”를 통해서 얻은 역사적 시간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희미하게나마 울리고 있다. “음악”을 통해서 명료해지는 “차밭의 앞뒤 시간”이, 즉 지난 시간에 대한 기억이 “가시처럼” 아프게 그러나 우울하지 않게 살아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음악”은 이러한 운동을 시작하게 하니 당연히 “모든 음악은 무용곡”이 된다. 따라서 “음악”은 일종의 존재의 맥박과 같은 것이다. 바깥으로 선율을 이뤄 표현된 것이라기보다 내면에서 차차 자라나고 점점 커져 가는 내재율에 가깝다. 그런데 이 “음악”이 점점 자라나 끝내 「사랑의 변주곡」에서 ‘낭만의 과잉’을 이루는 리듬과 속도를 창출한 것은 아닐까?

「거대한 뿌리」는 김수영이 역사적 시간에 대한 긍정적 세계관을 확보한 것을 보여주는 작품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음악”의 실험을 시도한 작품이기도 하다. 어떻게 했던가? 그야말로 절제를 전혀 의식하지 않는 파토스가 분수처럼 솟구쳐 오르게 함으로써. 「거대한 뿌리」는 「사랑의 변주곡」에 선행해 이미 다른 방식으로 “기관포나 뗏목처럼 인생도 인생의 부분도/ 통째 움직인다”(「미역국」)는 것을 보여준 작품이다. 「거대한 뿌리」가 보여준 역사적 시간에 대한 대긍정이 하나의 물줄기를 이뤄 「사랑의 변주곡」으로 흘러 들어갔고, 「반달」에서 “폐허”와 “수치”를 뚫고 가시처럼 솟아난 “음악”, 즉 존재의 내재율이 「사랑의 변주곡」에 보태진 것이라고 한다면 지나친 비약일까.

「사랑의 변주곡」이 「풀」과는 다른 맥락에서 김수영 시의 절정으로 읽히는 것은, 앞에서 말했듯, 5·16이라는 반혁명을 이후로 해저에서부터 여러 인식의 갈래들이 만들어지다가 그것들이 만나고 종합되면서 수면 위로 터진 화산 같기 때문이다. 무엇으로 종합했는가? 바로 “사랑”이다. 그래서 이를 일러 ‘사랑의 존재론’이라고 부른 것이며, 「사랑의 변주곡」 2연이 작품의 ‘이념’에 해당한다고 본 것이다. 또 그 사랑은 혁명(의 기억)을 통해 배운 것이다.

그런 다음 곧바로 3연에서 이렇게 말한다.

왜 이렇게 벅차게 사랑의 숲은 밀려닥치느냐
사랑의 음식이 사랑이라는 것을 알 때까지

_「사랑의 변주곡」 부분

이념이 있으니 과잉은 무죄이며, 그 과잉은 파괴와 창조를 동시에 수행할 것이다. 이게 이념이 없는 과잉 즉 광기와 구별되는 지점이다. ‘사랑의 존재론’은 일상마저 환희에 차게 한다. “사랑은 이어져 가는” 속성마저 있다. 그런데 이것은 언젠가 경험한 것이 아닌가.

사실 4·19 때에 나는 하늘과 땅 사이에서 통일을 느꼈소. 이 ‘느꼈다’는 것은 정말 느껴 본 일이 없는 사람이면 그 위대성을 모를 것이오. 그때는 정말 ‘남’도 ‘북’도 없고 ‘미국’도 ‘소련’도 아무 두려울 것이 없습디다. 하늘과 땅 사이가 온통 ‘자유 독립’ 그것뿐입디다. 헐벗고 굶주린 사람들이 그처럼 아름다워 보일 수가 있습디까! 나의 온몸에는 티끌만 한 허위도 없습디다. 그러니까 나의 몸은 전부가 바로 ‘주장’입디다. ‘자유’입디다…….
‘4월’의 재산은 이러한 것이었소. 이남은 ‘4월’을 계기로 해서 다시 태어났고 그는 아직까지도 작열(灼熱)하고 있소. 맹렬히 치열하게 작열하고 있소.

_「저 하늘이 열릴 때―김병욱 형에게」 부분

이게 “최근 우리들이 4·19에서 배운 기술”, “사랑을 만드는 기술”의 원체험이다. “그러나 이제 우리들은 소리 내어 외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은 이제 우리의 이제 ‘이념’이 되었기 때문이다. “예기치 않은 순간에” 오는 “구원”을 존재론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들뢰즈는 『차이와 반복』에서 헤겔은 ‘이념’을 “드라마로 극화(劇化)하는 대신 어떤 개념들을 재현한다”면서 “어떤 거짓 연극, 거짓 드라마, 거짓 운동 등을 만들어내고 있”고 비판한다. 반면 “시대를 앞서가는 연극인의 이념” “연출자의 이념”은 “모든 재현을 넘어 정신을 뒤흔들 수 있는 어떤 운동을 작품 안에 생산해야 한다. 중요한 것은 운동 그 자체를 어떠한 중재도 없이 하나의 작품으로 만드는 것, 매개적인 재현들을 직접적인 기호들로 대체하는 것이다. 직접적으로 정신에 힘을 미치는 어떤 진동, 회전, 소용돌이, 중력들, 춤 또는 도약들을 고안”한다. 들뢰즈가 말하는 “연극인”, “연출자”는 비유이지만 삶과 세계를 하나의 알에서부터 개별화되어 나오는 드라마로 본다는 점에서 꼭 그렇지만도 않다. 들뢰즈가 말하는 “연극인” “연출자”는 철학자이기도 하고 예술가, 시인이기도 하다.

복사씨와 살구씨와 곶감씨의 아름다운 단단함이여
고요함과 사랑이 이루어 놓은 폭풍의 간악한
신념이여
봄베이도 뉴욕도 서울도 마찬가지이다
신념보다도 더 큰
내가 묻혀 사는 사랑의 위대한 도시에 비하면
너는 개미이냐

_「사랑의 변주곡」 부분

여기서 “복사씨와 살구씨와 곶감씨”가 각각 무엇을 의미하는지 자구(字句)에 빠지는 것은 이 시를 가장 확실하게 오독하는 지름길이다. 김수영의 시에 대체적으로 해당되지만 자구에 대한 지나친 집착은 김수영이 그렇게 강조했던 ‘힘’을 사상시키고 지루한 글자 놀이에 빠질 위험성이 있다. 우리는 김수영의 시를 읽을 때 들뢰즈의 말대로 “어떤 진동, 회전, 소용돌이, 중력들, 춤 또는 도약들을” 먼저 느낄 필요가 있다. 5·16 직전에 쓴 것으로 추정되는 「들어라 양키들아―쿠바의 소리」에서 이미 “혁명이라는 것에 대한 관념이 한 시대 전과는 달라서 인제는 아주 일상다반사가 되어 버렸다”고 말한 적이 있다. 즉 프랑스혁명이나 러시아혁명처럼 스펙타클한 혁명의 이미지야들도 어쩌면 낡은 것인지 모른다는 것이다.

「사랑의 변주곡」 6연은 이념의 과잉으로서의 혁명을 그리고 있다. 낭만적 수사로 보일지는 모르겠으나 “복사씨와 살구씨와 곶감씨의 아름다운 단단함이여/ 고요함과 사랑이 이루어 놓은 폭풍의 간악한/ 신념이여”에서는, 오고 있는 혁명을 자기 경험으로 규정하지 않으려는 신중함도 동시에 느껴진다. 그것은 “신념보다도 더 큰/ 내가 묻혀 사는 사랑의 위대한 도시에 비하면/ 너는 개미이냐”고 묻는 데서도 드러난다. “고요함과 사랑이 이루어놓은 폭풍”의 신념은 “간악”하기까지 하기 때문이다. “폭풍”은 어디에서 어디로 불지 모른다.

벤야민은 일찍이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에서 파울 클레의 그림 <새로운 천사(Angelus Novus)>를 통해 천국에서 불어오고 있는 “폭풍은 그의(천사의-인용자) 날개를 꼼짝달싹 못하게 할 정도로 세차게 불어오기 때문에 천사는 날개를 접을 수도 없다. 이 폭풍은, 그가 등을 돌리고 있는 미래 쪽을 향하여 간단없이 그를 떠밀고 있으며, 반면 그의 앞에 쌓이는 잔해의 더미는 하늘까지 치솟고 있다. 우리가 진보라고 일컫는 것은 바로 이러한 폭풍을 두고 하는 말이다”고 적은 적이 있다. 인식의 진전에 “한 방울의 잔인성이 포함”되어 있듯이 역사의 “폭풍”에도 “간악함”이 포함되어 있다. 그리고 김수영 자신이 그것을 경험하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김수영은 “사랑의 위대한 도시”를 외치면서 “욕망”의 입을 벌리게 해 “사랑을 발견하겠다”고 한다.

문제는 오고 있는 혁명은 구체적 현실과 만나고 나서야 그 모습을 드러낼 뿐, 완성된 모습으로 찾아오지 않는다는 점에 있다. 왜냐면 혁명의 구체적 이미지는 지금 현실과의 투쟁 속에서 맺혀지는 역사적 결과이지 관념적으로 선재(先在)하는 게 아니다. 김수영이 이즈음 발견한 것은 바로 ‘씨’로서의 혁명이다. 그리고 그 ‘씨’는 단단하고 그만큼 고요하다. 다시 벤야민에 기대 말하자면, “역사적으로 파악된 것의 영양이 풍부한 열매는, 귀중하지만 맛이 없는 씨앗으로서의 시간을 그 내부에 간직하고 있다.” “복사씨와 살구씨와 곶감씨”는 그러한 이미지로 읽을 수 있으며, 하필 왜 “복사씨와 살구씨와 곶감씨”냐는 의심은, 그것들이 바로 김수영이 사랑하는 “무수한 반동”(「거대한 뿌리」)들의 구체적 삶에 깊이 내재해 있기 때문이라는 답으로 충분할 것이다. 혁명이 규정적이지 않을 때 (규정적이지 않아야 그게 더 혁명의 ‘진실’에 가깝다) 지금 당장 할 일은 자신이 혁명적 존재가 되는 것밖에 없다. 혁명적 존재가 되지 않는 한 혁명은 오지 않거나 혹은 자신이 인지하지 못한 상태서 지나가버린다.

7연에서 김수영은 “아버지 같은 잘못된 시간”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는데, 이것은 그가 살아온 혹은 살고 있는 현실에서는 혁명에 실패했다는 것을 의식하고 있다는 방증이기도 하지만, 패배를 통해 얻은 게 있다는 뜻이기도 한데, 그 단단한 “고요함”이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는 긍지를 표현하고 있다. 따라서 “복사씨와 살구씨가/ 한번은 이렇게/ 사랑에 미쳐 날뛸 날이 올 거다”는 확신은 섣부른 예언이 아니다. 그것은 역사적 시간에 대한 긍정을 통해 미래의 어떤 시간을 예감하고 있는 것이라고 보아야 옳다. 그러나 예감에도 근거가 필요한 법이다. 김수영은 지난 혁명을 되새기면서 역사는 혁명의 ‘씨’를 준비하는 과정에 다름 아님을 깨달은 것이다. 그리고 그 ‘씨’끼리 “사랑에 미쳐 날뛸 날”이 바로 미래의 혁명임을 알았던 것이다. 그 ‘씨’는 그럼 구체적으로 무엇이라고 유추할 수 있을까? 그건 바로 “무수한 반동”, 민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