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칼럼] 의심하라, 그 ‘젠더게임’ / 박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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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2-25 10:23 | 최종 업데이트 2019-02-25 10:52

정치를 ‘말의 예술’이라고도 한다. 뛰어난 정치인일수록 절묘한 어휘를 계산된 맥락에서 사용한다. 표현 하나로 정치적 유불리뿐 아니라 여론과 정책의 방향까지 좌우할 수 있다. 이는 곧, 그 정치세력이 평소 쓰는 어휘가 그 세력의 수준을 보여준다는 의미다. 2019년 3월 4일 국회에서 열릴 예정이었던 어느 ‘전문가 대토론회’는 이에 대한 완벽한 사례다.

▲조·중·동과 경제신문들은 노골적인 호남혐오·차별 담론을 유포하면서도 “지역갈등” 운운했고, 기업이 폭력배를 동원해 노동자를 폭행한 사건을 “노사갈등”이라 했다. 무고한 흑인이 백인의 총에 살해당한 사건에 항의하는 시위를 “흑백갈등”이라 부르는 인종주의자들 또한 여전히 적지 않다. (사진=gettyimage)

더불어민주당 최재성 의원이 주관하고 뉴민주주의 연구소가 주최할 예정이었던 토론회의 명칭은 ‘젠더갈등, 전면해부’다. 왜 민주당 국회의원들이 이런 토론회를 열려고 했는지, 그 배경을 짐작키는 어렵지 않다. 얼마 전 대통령과 여당에 대한 젊은 남성의 지지가 급격히 빠져나갔다는 소식이 각 매체에 대서특필됐다. 젊은 세대는 전통적으로 진보 성향이 강했던 집단이고 오늘날 민주당을 여당으로 만든 주축의 하나다. 그 지지율이 일목요연하게 떨어졌으니, 민주당으로선 심각성을 피부로 느꼈을 것이다. 대중정당으로서 신속히 반응한 것 자체는 좋다. 문제는 관점과 방향이다.

토론회 소식이 전해지면서 소셜미디어 일각에서 우려 섞인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우선 토론회 참석자의 면면 때문이다. 사회자는 이훈 국회의원, 토론자는 우석훈 ‘내가 꿈꾸는 나라’ 공동대표, 이선옥 르포작가, 오세라비 작가, 한귀영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 사회정책센터장이라고 한다. 각자 나름의 전문분야는 있겠으나, 젠더 이슈에서 과연 이들이 어떤 대표성과 전문성을 담지하는지 의구심을 품을 수밖에 없다.

더 심각한 건 토론회의 명칭에 딱 박혀 있는 단어, “젠더갈등”이다. 토론회가 공식적으로 밝히고 있는 취지는 다음과 같다. “청년세대 내부의 주요 갈등으로 부상한 젠더갈등의 원인을 진단하고 대안을 모색”“정부여당의 젠더갈등에 대한 인식을 점검하고 젠더갈등 해소를 위한 정책을 모색.” 어쨌든 ‘젠더갈등’이 핵심어다. 또 하나 중요한 표현은 “청년세대 내부”다. 즉, 청년세대 내부의 젠더갈등을 해소하기 위해 정부여당이 직접 나서겠다는 것이다. 안타깝게도 기본 전제부터가 완전히 틀렸다. 전제가 틀렸으니 모여서 토론해봐야 틀린 결론이 나올 수밖에 없다.

젊은 남성의 반문정서를 포함해 지금 젠더 이슈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현상은 ‘젠더갈등’이 아니다. 또한 그 현상은 ‘청년세대 내부’의 일도 아니다. 혹자는 이렇게 되물을 수도 있겠다. “지금 인터넷에서 남자들과 여자들이 패를 나눠 박 터지게 싸우는 게 안보이십니까?” 이 물음에 대한 대답은 명확하다. “그 정도 논란은 늘 있었을 뿐 아니라, 군 가산점 제도가 위헌판결 나고 여성부가 막 설립된 2000년대 초반엔 지금보다 훨씬 심했습니다.” 그때와 다른 점이 있다면, 당시 집권세력을 지지했던 젊은 남성들이 지금처럼 지지를 철회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요컨대 지금 사태는 젠더갈등이 아니라 ‘정권과 젊은 남성 간의 갈등’이다. 싫은 건 집권세력이라는데 왜 엄한 ‘젠더갈등’ 타령인가?

‘젠더갈등’이란 표현은 구체적 사실 차원에서도 오류이지만, 개념 인식 차원에서도 문제가 많다. ‘갈등’이라는 표현은 가치중립적으로 들리고 상호간 대등한 싸움이라는 뉘앙스를 강하게 머금기 때문에, ‘젠더갈등’이라고 할 경우 사회적 성으로서 여성과 남성이 마치 대등한 권력관계에 있는 양 호도되기 쉽다. 조·중·동과 경제신문들은 노골적인 호남혐오·차별 담론을 유포하면서도 “지역갈등” 운운했고, 기업이 폭력배를 동원해 노동자를 폭행한 사건을 “노사갈등”이라 했다. 무고한 흑인이 백인의 총에 살해당한 사건에 항의하는 시위를 “흑백갈등”이라 부르는 인종주의자들 또한 여전히 적지 않다. 대부분 무지해서가 아니라 개념의 프레이밍 효과를 노리고 의도적으로 명명한 것들이다.

세대문제에 꾸준히 천착해온 사회학자 전상진은 저서 <세대게임>에서 파울 바츨라비크의 유명한 우화를 소개한 바 있다. “한 경관이 밤에 순찰하다가 가로등 아래에서 뭔가를 찾는 사람을 보았다. 경관은 그에게 다가가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그 사람은 술기운이 느껴지는 목소리로 답했다. “열쇠 찾는 중입니다. 도와주세요.” 경관은 취객과 함께 열쇠를 찾기 시작했다. 꽤 오랜 시간을 살폈지만 도무지 찾을 수 없었다. 경관이 물었다. “여기서 열쇠를 잃어버린 게 분명해요?” 취객이 답했다. “아니요. 여기가 아니라 저기에서 잃어버렸어요. 근데 저기는 가로등이 없어서 너무 어두워요. 안 보이면 못 찾잖아요.””1)전상진, <세대게임>, 문학과지성사, 2018, 22쪽

취객이 영원히 열쇠를 찾을 수 없는 이유는 잘못된 생각 때문이다. 전상진은 사회현안을 세대 문제로 해석하는 프레임을 ‘세대 프레임’이라 규정하고, 취객의 가로등처럼 세대 프레임이 엉뚱한 곳을 비추는 건 아닌지 끝없이 의심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세대전쟁이 아닌 것을 세대전쟁으로 만들”고, “청년세대와 기성세대의 대립을 선과악의 싸움으로 만들”어 이득을 취하는 ‘세대 게임 플레이어’에게 현혹되면 안된다고 강조한다.

젠더 의제 역시 세대 의제와 유사한 면이 많다. 기성 정치에 대한 불만을 ‘젠더갈등’으로 치환하는 것은 단순히 무지해서일 수도 있지만 의도적인 것일 수도 있다. 실제로 최근 몇 년 사이 젠더전쟁이 아닌 것을 젠더전쟁으로 만들어 보려는 ‘젠더 게임 플레이어’들이 우후죽순 나타나고 있다. 이럴 때일수록 사회의 분배 구조 문제를 청년세대 남성과 여성이라는 약자들 밥그릇 싸움으로 프레이밍하는 게 과연 옳은지, 냉정히 짚어 보아야 한다. 이것 하나는 분명하다. ‘젠더갈등’이란 접근법으로는 결코 문제가 해결되지 않을 거라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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