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견벽청야(堅壁淸野) 푸른 밤에] (11) 박산골의 시신 수습 / 에필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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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선 연재>
[견벽청야(堅壁淸野) 푸른 밤에] (1) 섣달그믐
[견벽청야(堅壁淸野) 푸른 밤에] (2) 잠과 밥 / 설날 / 정월 초이틀
[견벽청야(堅壁淸野) 푸른 밤에] (3) 피난
[견벽청야(堅壁淸野) 푸른 밤에] (4) 청연학살
[견벽청야(堅壁淸野) 푸른 밤에] (5) 인정마저 앗아간 학살과 네 번째로 다녀온 저승의 문턱 ①
[견벽청야(堅壁淸野) 푸른 밤에] (6) 인정마저 앗아간 학살과 네 번째로 다녀온 저승의 문턱 ②
[견벽청야(堅壁淸野) 푸른 밤에] (7) 다섯 번째 저승 문턱
[견벽청야(堅壁淸野) 푸른 밤에] (8) 외갓집 / 봄은 왔는데
[견벽청야(堅壁淸野) 푸른 밤에] (9) 탄량골, 박산골의 호곡성
[견벽청야(堅壁淸野) 푸른 밤에] (10) 새로운 삶

■ 박산골의 시신 수습
3학년이 되던 해 봄,
박산골에 흰 옷 입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1954년 4월 5일 청명 한식을 맞이해서
박산계곡에 방치되어있던
시신을 수습하기 위한 유족들이었다
3년여를 방치해놓은 517여 구의 시신 수습이 시작되었다
살은 녹아내리고 뼈만 남아
남녀 시신을 구분할 수 없었다
큰 뼈는 남자, 중간 뼈는 여자, 가는 뼈는 어린아이로
성별을 구분했다
억장이 무너지고 구곡간장이 녹아내리는
유족들의 오열 속에 화장을 하였다
박산에 남자와 여자의 묘를 만들었다
보통 봉분보다 두 배 가량 큰 묘였다
어린아이들의 시신은 홍동골로 옮겨 이미 암매장을 했기에
어린아이의 묘는 비(碑)만 만들어 세웠다
신윤철 씨는 유족 가운데 유일하게
자신의 부친의 시신을 찾았는데
시신의 주머니에서 부친의 도장과 손칼이 나왔기 때문이다
원통하게 죽은 시신이라도 찾은 유족은 다행이어서
선산에 매장을 하였다
517명 희생자의 유족들은 억울하고 분해서
하루 종일을 울었다
박산도 감악산도 눈을 감고 피울음을 울었다

▲훼손된 박산골의 위령비. 5.16군사정권은 위령비의 글자를 정으로 쪼개 동강 내어 땅에 파묻었는데 1988년 2월 15일 다시 파냈다. (사진=김성경)

■ 에필로그
오호라, 넋이야 넋이로다!
청연에 피는 진달래는 우리 엄마 넋이로다
내동에 피는 개나리는 우리 여동생 넋이로다
감악산 새소리는 우리 작은형 넋이로다

오호라, 넋이야 넋이로다!
억울하고 원통해라
청연의 푸른 들은 눈을 뜨고 다 보았다
흰 눈 위에 뿌려진 붉은 피를
인정사정없는 개머리판과 군홧발을
총칼에 찢기고 터진 살점을
총알에 반쪽이 날아간 어머니의 얼굴을

오호라, 넋이야 넋이로다!
70년의 원통한 세월을
누구에게 돌려받아야 하나
내동의 들판이여!
청연의 냇물이여!
나에게 말해다오!
핏빛으로 물드는 박산의 단풍이여!
이제는 말해다오!

나비야, 청산 가자
청연의 범나비 너도 가자
우리 엄마 무덤가에 핀 양지꽃 만나러 가자
가다가 저물거든 꽃잎 속에 자고 가자
낯선 꽃이 푸대접하거든 잎에서나 자고 가자

나비야, 청산 가자
언 땅에 파묻은 우리 여동생 만나러 가자
눈 쌓인 응달에 제비꽃이 피었거든
여우가 파먹은 우리 동생 넋이니
날 저물면 제비꽃에 오래오래 자고 가라

나비야, 청산 가자, 나하고 같이 가자
가다가 날 저물면 고목에 자고 가자
고목이 싫다 하고 뿌리치면
달과 별 병풍 삼고 풀잎은 자리 삼아
찬이슬에 자고 가자

나비야, 거창 가자
여우가 파먹은 우리 작은형
야윈 뼈 찾으러 가자
박산에 누워있는 위령비 일으켜 세우러 가자
국회에서 잠자는 ‘배상특별법’ 깨우러 가자
썩은 역사 갈아엎고 원혼의 눈물 닦아주자
나비야, 거창 가자
나비야, 거창 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