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쿠팡이 사실 그대로 공개했으면, 산재 인정 4개월 안 걸려”

쿠팡 대구물류센터 고 장덕준 어머니 박미숙 씨
국감 '운이 좋았다'···"사업주 자료 제출 법적 강제 필요"
'버린 세대'라던 아들이 남긴 숙제, "물류센터 죽음 멈춰야"

10:39

아들이 주문한 프라모델이 하나씩 배송된다. 배송 온 순서대로 아들 방에 쌓아두고 방문을 닫았다가 열어둔다. 누군가 또 방문을 닫으면 다시 열기를 반복한다. 프라모델을 담은 택배 상자는 주인이 없는 줄도 모르고 지난해 12월까지 이어졌다. 아들이 없는 집은 아직 어색하다. 쿠팡 대구물류센터(칠곡)에서 일하다 숨진 고 장덕준(27) 씨의 부모님은 일이 없는 공방에 나와 하루를 보낸다.

지난달 25일 경북 경산시 한 목공방에서 장 씨의 어머니 박미숙(53) 씨를 만났다. 최근 아들의 산재 인정 판결이 난 뒤, 4개월여 만에 공방 문을 열었다. 공방 곳곳에 아들의 흔적이 남아있다.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아 아들 얼굴을 새긴 트레이를 만들기 시작했다. 한쪽에는 “함께 해 주셔서 고맙습니다”라는 문구도 새겼다. 산재 인정을 받기 위해 도움을 준 사람들에게 선물할 거다.

지난달 9일 근로복지공단은 아들의 사망을 산업재해라고 인정했다. 쿠팡이 처음으로 공식 사과 입장을 냈다. 물론 아직 직접 사과는 받지 못했다. 한시름 덜었다고 생각했을 때, 미숙 씨와 가족들은 아들이 없다는 사실과 정면으로 마주해야 했다.

“지난 4개월도 힘들었지만, 그것보다 자식이 없다는 게 정말 제일 큰 아픔이에요. 아들 죽음을 우리 나머지 네 가족이 다 봤어요. 새벽에 들어와서 씻고 있을 때 우리가 다 깨어 있었어요. 왜 우리가 한 명이라도 더 빨리 들여다보지 않았을까. 미안한 마음이에요. 먹는 거, 자는 거, 재밌는 거 이제 아무 의미가 없어요. 내가 웃는게 너무 미안한 거 있잖아요”

▲고 장덕준 씨의 부모님이 작업한 목공 트레이, ‘함께해 주셔서 고맙습니다’라는 문구와 덕준 씨의 얼굴이 새겨져있다.

쿠팡이 제공한 자료 단 두 건
유가족엔 안 주고 국회에는 제출

지난해 10월 12일 새벽에도 어김없이 미숙 씨는 아침을 준비하고 있었다. 야간근무를 하고 온 아들이 씻고 나오면 다섯 가족이 모여 아침을 먹는다. 한참을 나오지 않아 욕실 문을 열었을 때, 아들은 욕조에 몸을 웅크린 채 굳어 있었다.

장례식장을 찾아온 아들 동료들의 이야기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자주 가슴을 치는 모습을 보였다고 한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아들은 쿠팡 물류센터에서 일하고 난 뒤 몸무게가 15kg나 빠졌다. 무릎을 다쳐 한의원 치료도 한동안 받았다. 엘리베이터에서 물건을 내려야 하는데 혼자 하느라 힘들다고 했던 이야기도 떠올랐다. 미숙 씨는 택배과로사대책위원회로 연락해 도움을 요청했다. 장례를 멈추고 부검을 시작했다.

택배대책위가 과로사를 의심하며 쿠팡 측에 사과와 대책 마련을 요구했다. 산재 신청을 위해 ▲출퇴근 기록 ▲급여명세서 ▲소속 부서의 조직 현황표와 인원 배치, 업무 분장표 ▲소속 부서의 업무 일지 ▲근로계약서 ▲연장 근로 일지 ▲물류센터 작업공정표 등 자료를 요청했다.

▲지난해 산재 신청 기자회견에 참석한 연 고 장덕준 씨의 부모님

하지만 쿠팡은 택배대책위가 사실을 왜곡하고 있다며 덕준 씨가 포장보조원으로 업무강도가 낮고 쉬운 업무를 했다고 주장했다. 산재 신청 과정에서 필요한 자료를 제공하겠다던 쿠팡은 근로계약서와 사망 전 12주치 근무표만 줬다. 쿠팡은 아들이 사망 전 3개월간 주당 평균 근무 시간은 약 43시간이라고 주장했다.

처음 쿠팡이 제공한 것은 월별 근무일수였다. 집계하려면 시간이 걸린다는 말에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미숙 씨는 직접 아들의 4대보험 부과내역을 떼서 확인했다. 쿠팡이 알려준 근무일수와 보험료를 끼워 맞춰 몇 시간을 일했는지 계산할 생각이었다. 7월에는 23일, 8월에는 25일 9월에는 23일 근무했다. 8월은 다른 달 보다 이틀 더 일했을 뿐인데 급여가 300만 원이 넘었다.

“주 43시간에 맞추면 급여가 200만 원 정도인데, 300만 원이 넘잖아요. 우리 애가 예뻐서 더 많이 준 건 아닐 테고, 얼마나 일을 더 시켰길래. 이 사람들이 신고를 잘못했거나, 거짓말을 하거나 둘 중 하나잖아요. 아이한테 듣기로 7시 전부터 들어가서 일을 한다고 들었거든요. 이걸 근로복지공단에 보여주면서 회사에서 준 기록을 믿을 수 없다고 이야기했어요”

▲박미숙 씨가 평소보다 유독 많은 8월 급여를 가르키고 있다.

의문은 며칠 뒤에 풀렸다. 지난해 10월 26일 국회 국정감사 앞둔 기자회견 자리에서였다. 정의당 강은미 의원실은 쿠팡으로부터 덕준 씨의 3개월치 근무시간 내역을 확보했다. 미숙 씨는 그 자리에서 도표를 만들어 기자회견장에 나갔다. 8월부터 10월 12일 숨지기 전까지 근무시간을 보면, 덕준 씨는 9월보다 8월에 약 30시간을 더 일했다. 이틀 더 일했지만, 월급이 30만 원 이상 차이 난 이유였다.

“국감 전 기자회견장에서 이미 국회의원들이 받아서 들고 있었어요. 너무 어이가 없잖아요. 내가 받아야 하는 걸 나는 못 받고. 그걸 받아서 바로 도표를 만들어서 갔어요. 의원실에서 그걸 보더니 7일 연속 일을 했다는 거예요. 사실 제가 표 만들 때는 몰랐어요. 당연히 일주일은 일요일에서 시작해서 토요일에 끝나는 거로 생각했어요. 그걸 잡아준 게 강은미 의원실이었어요. 야간근로니까 30%를 가산해야 한다는 것도 강은미 의원실에서 알려주셨어요”

강 의원실에서 지적해 준 대로 근무시간을 계산했다. 아들의 하루 평균 근무시간은 8시간~9.5시간, 30%를 가산했을 때 9.5시간~11.5시간을 근무했다. 8월과 9월에는 각각 7일 연속 일을 하는 경우도 있었다.

다음은 아들이 어떤 일을 했는지 밝혀야 했다. 장례식에 왔던 동료들에게 다시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연락은 잘 닿지 않았고, 겨우 연락이 닿으면 쿠팡에서 계속 일하는데 불이익이 있을까봐 증언을 해주지 않았다. 일을 그만둔 동료 1명이 유일하게 증언을 해줬다.

“장례식장에서 미리 알았더라면 녹음을 했을 텐데 증거를 모아야 한다고 마음을 먹었을 때는 이미 연락이 안 되는 거예요. 사실 회사에서 우리 애가 무슨 일을 했는지 제대로 이야기하면 다 해결될 일이잖아요. 그런데 자료는 하나도 안 주고, 계속 빈 박스, 빈 비닐만 보충했다고만 하니까. 제가 애한테 들은 건 그게 아니었고. 다행히 한 친구가 증언을 해줬어요. 그 친구가 빈 포장재를 보충하는 일은 스무 가지 업무 중 한 가지 정도라고 하더라고요”

▲고 장덕준 씨의 지난해 8월 일자별 근무시간(자료 제공=강은미 의원실)

포장재 보충 업무 영상만 보여준 쿠팡
1시간 남짓 CCTV에서 설명과 다른 사실 드러나
“쿠팡이 사실 그대로 공개했으면 4개월 안 걸려”

미숙 씨는 결국 필요한 자료를 모두 얻지 못한 채 아들이 숨진 지 한 달이 지난 지난해 11월 6일 근로복지공단에 산재를 신청했다. 근로복지공단에서 쿠팡에 재해 경위를 물었지만, 쿠팡은 ‘거부’라고 의견을 밝혔다. 재해 경위가 불명확하다는 이유에서다. 쿠팡에 기대할 것이 없었다.

근로복지공단에서 1차 조사를 받고 한 달 뒤인 12월께 현장 조사에 동행했다. 경북 칠곡 영남물류센터 9동 7층이 아들이 일하던 곳이다. 사람 네 명이 타면 꽉 차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7층에 도착했다. 공간은 넓었지만 일하는 사람 얼마 없었다. 쿠팡 안내에 따라 빈 팔레트와 바구니가 올라오는 곳으로 따라갔다.

7층은 복층이라 다른 층보다 공간이 넓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하루는 아들이 만보계를 차고 갔는데 5만 보가 찍혔다. 마감 시간을 맞추기 위해서 속도가 느린 곳에 들어가 도와주기도 했다. 하지만 현장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제가 1.5층도 있다고, 거기도 가야 한다고 했는데 안 보여줬어요. 저긴 왜 안 가느냐고 몇 번을 이야기했는데, 쿠팡에서 그건 우리 애 업무랑 상관없다고 공개를 안 했어요. 처음에 저희가 소란을 일으키지 않는 조건으로 들어갔거든요. 보여주는 거만 보고 나왔죠”

▲쿠팡 대구물류센터(칠곡), 고 장덕준 씨는 영남물류센터 9동 7층에서 지원 업무(워터 스파이더)를 해왔다.

근로복지공단에서 CCTV를 확보한 뒤 2차 조사를 받았다. 약 1시간 분량은 포장대 앞만 비추었다. CCTV에서 아들은 이미 오후 7시가 되기 전 일을 시작했다. 아들은 무전기를 차고 있었고, 한 손에는 칼을 들고, 한 손에는 PDA를 들고 있었다. 상품이 올라오면 칼로 뜯어내는 장면이 잡혔다.

“포장 지원하는 부분만 있으니까 그 화면에 우리 애가 얼마나 나오겠어요. 다른 일도 했다고 저희가 계속 이야기했어요. 우리 애한테 들은 게 있으니까. 우리 애가 여기 없으면 놀고 있는 건 아니잖아요. 그래서 조사위원들이 현장에 한 번 더 방문했다고 들었어요. 쿠팡이 있는 사실 그대로만 공개했어도 이렇게 시간이 오래 걸리진 않았을 거예요”

근로복지공단은 덕준 씨가 사망 전 일주일 동안 평균 62시간 10분을 일했고. 사망 12주 전 평균 근무시간은 58시간 38분이라고 밝혔다. 또, 포장재 보충 등 지원 업무(워터 스파이더) 뿐 아니라 택배 물품 스캐너, 택배 운반, PDA로 물품 확인 등 타 작업 지원 업무를 했다고 확인했다. CCTV를 확인한 뒤, 미숙 씨의 주장에 신뢰도가 높아졌다. 근로복지공단은 한 차례 추가 현장 조사 후, 쿠팡 측에 CCTV 제출도 추가 요청했다.

“사실 가장 힘들다고 했던 엘리베이터에서 자키를 끌어내리는 일은 확인 못 했어요. 다른 CCTV를 보면 확인했을 수도 있었겠죠. 시간이 더 늦어질 거 같아서 그냥 마무리했어요. 그나마 시간을 줄여서 4개월이 걸린 거예요”

‘버린 세대’라던 아들이 남긴 숙제
“사업주 자료 제출 법적 강제 필요”

▲고 장덕준 씨의 어머님 박미숙 씨

산재를 인정받는 동안 미숙 씨는 원인을 알 수 없는 두드러기가 돋았다. 남편은 술 없이는 잠을 이루지 못했다. 병원에 다닌 기록이 아들 산재 인정에 걸림돌이 될까봐 아파도 참았다. 세월호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유가족의 모습을 보고 아들과 다툰 기억이 떠올랐다. ‘좀 그만할 때도 되지 않았나’라고 하면, 아들은 ‘내가 죽어도 그렇게 하시겠어요’라고 반문했다.

“저희도 지금 일을 못 하고 있어요. 겪어 보니까 왜 사람들이 과격해지고, 왜 농성을 할 수밖에 없는지 알 거 같아요. 말을 해도 안 되니까. 어떤 논리가 잘못된 게 아니잖아요. 저희한테 증거를 제출하라고 하는데, 우리 애가 죽을 줄 알았나요?”

쿠팡을 다그칠 수 있는 힘이 있는 곳은 국회뿐이었다. 그는 아들이 죽고 얼마 후 국정감사가 있었던 것이 ‘운이 좋았다’고 표현했다. 자료 제출이 늦어질 때마다 미숙 씨는 국회의원실로 연락했다. 유가족에게 안 주는 자료도 국회에는 제출했기 때문이다. 산재 조사 과정에서 사업주의 자료 제출을 강제할 수 있는 법이 필요하다고 느낀 이유다.

“산재 신청하기 전부터 진행 상황까지 다 국회의원실에 계속 얘기했어요. 우리가 가진 자료가 없잖아요. 그래서 나라에서 강제적으로라도 자료를 제출할 수 있게 해야 할 거 같아요. 재해 사고도 기업에서 노동자 과실이라고 이야기하는데 하물며 과로사는 더 하죠. 이걸 개인이 어떻게 증명하겠어요. 산재 조사에 대해서 법적인 보완을 해줘야 해요”

산재 판정 후 지난달 9일 저녁 처음으로 쿠팡에서 직접 연락이 왔다. 빠른 시일 내에 해결하고 싶다는 내용이었다. 재발 방지 대책을 갖고 만나기로 했고, 대책위와 함께 지난달 15일이 만났다. 쿠팡은 연속근무일수 제한, 야간근로 시간 제한 등을 대책으로 내놨다. 대책위가 요구한 고용안정, 임금 현실화, 유급 휴식, 유급 휴가 보장 등은 없었다. 그사이(지난달 12일) 쿠팡은 미국 뉴욕증권거래소에 상장 신청서를 제출했다.

▲박미숙 씨가 최근 읽고 있는 책들

미숙 씨는 최근 근로기준법과 산업안전보건법 공부를 시작했다. 요즘은 야간노동에 대한 책을 읽고 있다. 야간노동에 대한 규제가 전혀 없다는 사실에 놀랐다. 김용균재단에서 출판한 ‘산재 사망사고 유가족을 위한 안내서:수많은 우리들이 함께 찾는 길’도 샀다. 기본 지식을 좀 쌓으면 법 개정을 위한 국민청원에도 도전해 볼 생각이다.

“산재는 무조건 막아야 해요. 사업주가 처벌받는다고 우리 애가 살아 돌아오지는 않잖아요. 애초에 이런 일이 일어나지 말아야 해요. 제가 여기서 입을 닫는다면 똑같은 일이 반복될 수밖에 없어요. 우리 아들 죽고 얼마 안 돼서 동탄에서도 돌아가셨잖아요. 근로환경이 바뀌지 않는 한 이 사고는 일어날 수밖에 없어요. 우리 애가 자기 목숨을 바쳤는데 여기서 뭔가 변하지 않으면 이건 진짜 개죽음이에요. 내 자식이 개죽음 되는 건 막아야죠.

우리 애 표현으로 지금 젊은이들을 ‘버린 세대’라고 하더라고요. 그때 저는 ‘네가 좀 더 적극적으로 하면 되지 않냐’고 이야기했어요. 우리 애는 사실 최선을 다했는데도 바꾸지 못한 거죠. 우리 애가 저희한테 남겨준 숙제라고 생각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