쯔엉탄 학살 위령관은 한국인을 기다렸다

[빈안학살 50주년 평화기행③] "카이,카이,카이(말 좀 하게 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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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3-06 19:28 | 최종 업데이트 2016-03-07 15:10
[편집자 주] 1966년 베트남 빈딘성 빈안에서는 1,004명의 주민이 학살당했다. 그 중 고자이에서는 불과 한 시간 만에 380명이 목숨을 잃었다. 그로부터 50년이 지난 2016년, 2월 24일 한국인 32명은 빈안마을로 떠났다. 한국군에 의한 학살이 일어난 이곳에서 열리는 위령제에 참가하기 위해서다.?2월 24일부터 3월 1일까지 진행된 ‘빈안학살 50주년 위령제 참배 베트남 평화기행’에 <뉴스민> 김규현 기자가 동행했다. 학살의 마지막 날인 2월 26일 열리는 위령제와 생존자의 증언을 통해 베트남전쟁에 대한 성찰의 기록을 담고자 한다.

[빈안학살 50주년 평화 기행]①닫을 수 없는 과거:제주4·3 피해자 유족, 베트남 민간인 학살을 마주하다
[빈안학살 50주년 평화 기행]②성찰의 시작은 사과다:빈안학살 50년, 사과하는 한국인에 박수 보낸 베트남?

[빈안학살 50주년 평화기행③] ?"카이,카이,카이(말 좀 하게 해 주세요)"

“카이, 카이, 카이.(khai, khai, khai.)”

‘카이(khai)’는 베트남어로 “선언하다”, “주장하다”라는 뜻이다. 쯔엉탄 학살 위령관 참배를 마치고 버스에 오르는 한국인들에게 “카이(khai)”를 다급하게 외치는 이가 있었다. 한국인이 온다는 소식에 달려와 “나도 말 좀 하게 해 달라”고 사정한 판 딘 란(Phan Dinh Lanh)씨. 그가 그토록 하고 싶은 말은 무엇이었을까.

27일 이른 아침, 기행단은 빈딘성 푸깟현 깟띠엔사에 도착했다. 밭길을 한참 따라가 길이 끝나는 곳에 쯔엉탄 학살 위령관이 있었다. 쯔엉탄 마을 바로 앞산 ‘누이바산(어머니산)’은?맹호부대가 주둔했던 곳이다. 그 뒤로 깊은 산은 베트콩(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 주둔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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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딘성 쯔엉탄 학살 위령관

한국군과 베트콩이 가까운 만큼 교전도 자주 일어났다. 쯔엉탄 마을의 남성들은 대부분 전투에 나갔고 마을에는 주로 여성들과 아이들이 남아있었다고 한다. 쯔엉탄 학살 위령비에 적힌 희생자 대부분이 노인, 여성, 어린이였다.

쯔엉탄은 한국인이 오길 기다리고 있었을까. 쯔엉탄 학살 위령비?비문은?한글과 영문으로 돼 있다. 지금까지 구수정 아맙 본부장이 찾은 민간인 학살 위령비 중 한글 위령비는 이곳이 유일하다.

"1966년 9월 24일 남한 병사들(맹호사단 속함)은 TRUONG THANH 마을에 속한 GO SAT(SAT 언덕) 및 NGUYEN AN VAN 씨네 집의 정원에서 58명의 양민 주로 노인, 여자 그리고 어린이들을 살해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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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역으로만 전해 듣던 비문을 한글로 읽었을 때, 위령관 주변은 절로 고요해졌다. 기행단은 희생자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부르며 사죄했다. 다른 위령비와 달리 이곳은 희생자 명단이 가족 단위로 적혀 있다. 모두 12가족이 학살됐고, 개인 2명이 학살됐다. 이 마을에서 살아남은 이는 어린이 1명이었다.

기행단을 맞이하러 나온 응우옌 찌 호앙(Nguyen Dh Hoang) 깟띠엔사 인민위원회 부주석은 “이곳을 찾아주신 여러분께 감사의 인사를 전한다”며 “(한국인의 참배가) 한 번으로 끝나지 않고 계속 찾아줬으면 좋겠다”고 당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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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에서는 무덤이 향 연기로 자욱하게 덮도록 향을 올리는 게 예의라고 한다. 한국인들은 두 손을 모으고, 때로는 무릎을 꿇고 집단 무덤에 향을 올렸다. 그 모습을 위령관 담 너머에서 계속 지켜보는 이가 있었다.

후옌 티엔 타오(Huyen Thi Dao) 씨는 1966년 당시 쯔엉탄에서 다른 마을로 피난 갔다. 마을에 남아있던 동생 일가족 일곱 명이 모두 희생됐다. 아이가 다섯이었다. 1975년 전쟁이 끝난 후, 그는 동생 가족의 무덤을 지키기 위해 마을로 다시 돌아왔다고 한다.

그는 “그때는 여기 무덤도 없었어”라며 끔찍했던 기억을 다시 떠올렸다. 유가족들이 위령관을 짓기 위해 모금을 시작하자 빈딘성 인민위원회가 한 기업가를 연결해줬다.

“우리 정부가 위령관을 지어줬어”라는 말이 왠지 미안해 어쩔 줄 모르는 한국인들을 안심시키려는 듯했다. 한국인의 손을 붙잡고 이야기를 이어가는 그의 작은 몸은 심하게 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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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옌 티엔 타오(Huyen Thi Dao) 씨

후옌 티엔 타오 씨를 뒤로하고 버스에 올랐는데 누군가 멀리서 소리를 지르며 달려왔다. 괜히 마음이 움츠러들었다. 학살을 저지른 자들이 왔으니 한 판 하려고 온 걸까. 그가 지르던 말은 “카이, 카이, 카이.(khai, khai, khai.)”였다.

그는 쯔엉탄 마을에 한국인들이 온다는 소식을 듣고 3km 떨어진 아랫마을 깟흥사 미룡촌에서 자전거를 타고 달려왔다. 어떻게 소문이 그곳까지 났을까. 한국인 방문 소식은 민간인 학살이 일어난 마을에서는 분명 큰 이슈였을 것이다.

구수정 본부장은 판 딘 란 씨에게 버스에 올라타 이야기할 수 있도록 했다. 판 딘 란 씨는 1966년생이다. 맹호부대가 빈딘성에서 크고 작은 학살을 벌이던 바로 그 해다. 그는 태어난 지 3일 만에 어머니와 친척들을 잃었다고 한다.

“태어난 지 3일 만에 어머니, 할머니, 친척들이 방공호에서 다 죽었어요. 왜 한국 사람들은 여기(쯔엉탄)는 오고 우리 마을을 안 오는지 너무 억울해서 왔어요. 내가 지금 데리고 가서 보여주고 싶어요. 우리 마을에는 아직 위령비도 없어요. 여기처럼 위령비라도 있으면 한국인들이 찾아오는데...우리 엄마도, 우리 가족들도 억울하잖아요. 우리 가족 무덤에도 한국인들이 향을 한 번 밝혀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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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 딘 란(Phan Dinh Lanh) 씨

그는 분명 한국인을 기다렸다. 위령비가 없어 한국인들이 못 찾아오나 싶어 3km를 달려왔다. 어머니와 친척들이 한국인에게 사죄받을 수 있도록 해주고 싶었다.

빈딘성 푸깟현 깟흥사는 1999년부터 한국군 학살지 답사를 다닌 구수정 본부장도 처음 들은 곳이다. 평화기행을 다니면 이런 일은 비일비재하다. 여전히 알려지지 않은 한국군 학살지가 얼마나 더 있을지 모른다.

기행단은 그에게 아무것도 약속할 수 없었다. “다음에 찾아뵙겠다”는 이 한마디가 너무 무거워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구수정 본부장은 “이분들이 한국인을 만나 이렇게 한번 털어놓으면 그만큼 아픔이 가벼워진다. 들어 드리고, 무슨 일이 있으셨냐고 물어보는 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 말했다.

돌아가는 버스 안, 훌쩍이는 소리가 잦아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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