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핵’과 ‘기본소득’으로 마을 공화국을 꿈꾸다

[서평] 고르게 가난한 사회(이계삼, 2106, 한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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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3-17 16:24 | 최종 업데이트 2016-03-17 16:25

사순시기 즉, 저항시기를 시작하며 몇 권의 책을 읽기 시작했다. 총 일곱 권의 책을 읽으려고 했으나 이런저런 사정과 나의 게으름으로 인해 네 권으로 줄었다. 첫 책으로 밀양 송전탑반대대책위에서 어르신들과 함께 국가폭력에 맞서 싸우는 이계삼 선생의 <고르게 가난한 사회>를 골랐다.

나는 저자와 대구 공부모임에서 인사를 몇 번 나누었다. 어느 때는 제자들과 대구에 영화를 보러 오기도 했다. 현재는 교직을 그만두고 귀농과 생태교육공동체를 구상하던 중 국가자본인 한국전력의 폭력적인 송전탑 공사 강행에 저항하는 활동가가 됐다.

▲, 이계삼, 2016. 2. 15, 한티재
▲<고르게 가난한 사회>, 이계삼, 2016. 2. 15, 한티재

최근 이계삼 선생은 한겨레와 녹색평론 등에 쓴 글을 묶어 책을 냈다. 책을 관통하는 주제는 탈핵과 기본소득이다. 머리말에서 저자는 어린 시절 밀양의 풍경을 묘사하면서 시작한다.

"학살자의 역겨운 얼굴과 독재의 공기도 틈입할 수 없었던, 산업화와 착취의 기계 소리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었던 내 고향 남포리, 그 '고르게 가난한 사회'를(7쪽)".

가난을 고르게 하다니? 혹자는 빈곤의 시대로 가자는 말이냐고 생각할 수도 있다. 저자는 스스로가 말한 가난은 빈곤이나 물질적 풍요와는 전혀 다른 의미라고 밝힌다.

"고르게 가난했으므로 나눔과 유대가 숨 쉴 수 있었고, 아직 돈에 오염되지 않았기 때문에 인간적이었던 '가난'이었다."(68쪽)

예수의 산 위 가르침의 여덟가지 행복을 인용해 "그것은 현세에서 풍요와 기쁨과 의로운 혁명으로 뒤집히는 질서를 기약해 주는 것도, 죽어서 찾아가는 세계에서 구현되는 것도 아니었다. 그 복된 세계는 바로 여기, 우리들 안에, 이미, 와 있다는 것이다"(8~9쪽). 곧 빈곤과 가난은 다르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저자는 질문을 던진다. "지금 이 시대는, 그리고 다가올 시대의 현실은 '풍요'인가, '가난'인가. 또 하나, 고르게 풍요로운 사회가 가능할 것인가, 고르게 가난한 사회가 가능할 것인가". 첫 질문은 쉽게 대답하겠지만, 후의 질문 앞에서 대다수는 주저할 것이다.

이어 돈에 대한 생각을 바꿔볼 것을 제안한다. 빈곤과 가난에서 돈은 빠질 수 없는 이야기다. 삼성의 예를 들어 우리가 돈에 대한 접근을 제한당하고 있음을 설명한다. 삼성 스마트폰은 삼성만의 기술이 아님을, 삼성의 축적된 부는 이건희와 주주들만의 것이 아닌 삼성 산업재해 희생자와 노동자, 그리고 모든 사람의 것임을 말한다.

신용의 사회화. "누구나 돈에 접근할 권리가 있다. 부는 자본가와 창의적인 몇 사람이 아니라 모두가 각자의 방식으로 협력한 결과물이다", "부는 근원적으로 자연의 선물이며, 인류의 축적된 유산의 결과물이다"라고 말이다.

저자는 기본소득 도입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세모녀 사건과 세자매 사건 등 가난한 사람들의 잇따른 죽음은 모두 기본소득이 없었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라고 한다.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나는 처음엔 기본소득론에 회의적이었다. 왜 돈으로 인생을 결정해야 하는가 생각했다. 그러나 세모녀 사건 이후 기본소득의 중요성을 인식하게 됐다.

기본소득은 현재 유럽 정치의 주요의제로 떠오르고 있고, 유명한 경제학자들이 적극 제도화할 것을 제안하고 있다. 대한민국에선 경기도 성남시가 추진하고 있다. 기본소득의 기원을 성경에서 찾는 것도 흥미롭다.

"따라서 예수의 비유처럼 포도원 주인이 아침부터 일한 사람이든, 저녁 무렵에 도착한 일꾼이든 똑같은 한 닢 데나리온을 주는 것은 극히 당연한, 인간적이고 합리적인 분배방식이다"(74쪽).

노인들에게 주는 소득은 노인들에 대한 기본소득이고, 무상급식은 주부에 대한 기본소득이다. 그리고 새누리당이 공약한 반값등록금은 대학생에 대한 기본소득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장애인인 나는 한 가지 덧붙이고 싶다. 장애등급 없는 장애연금은 장애인에 대한 기본소득이다.

그는 국가가 정치를 잘못하면 멈추고 광장으로 나가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러나 현재 한국정치는 박근혜 대통령 한 사람만 하는 것은 아니냐고 저자는 말한다. 여당이든 야당이든 청와대에 들어앉아 있는 사람 눈치만 보고 있다고 지적한다. 파시즘으로 치닫고 있는 남한사회 정치는 "도덕적 당위와 합리성이 아니라, 주어진 틀의 완강함이, 힘의 관계가 구조화시켜 놓은 압도적인 완력이 작동하는 것"(43쪽)이다. 세월호 참사 이후 일을 멈추고 광장으로 나오지 않는 야당의 행태는 한반도에 사는 사람들에게 정치에 대한 환멸을 느끼게 했다.

그럼에도 저자는 독자들에게 "그러나 정치만은 내 몫이 아니라며 누군가에게 떠넘기는 것은 의롭지 않은 일"이라고 한다. 프란치스코 교황도 정치참여는 그리스도인의 의무임을 강조했다. 지속되고 있는 남한사회의 파시즘화 때문에 나도 젊은 사람들도 지쳐버렸다. 이 책에서 저자의 제자가 울면서 전화해 진로에 악영향을 미치는 걸 걱정하는 일화는 내 마음을 무겁게 했다. 저자는 그래도 "의롭고 고통받는 자를 돕는 힘을 나는 믿는다. 함께 손을 잡자. 같이 손을 놓지 말고 함께 걸어가자! 살아 있을. 누구든, 살아 있으라"고.

그렇다면 정치란 무엇인가. "국가와 시민이 맨낯으로 직접 부딪치지 않게 하기 위해 정치가 존재한다. 세월호 사건은 정치가 먼저 나서서 국가의 기능을 일시 중지시키고 시민들을 광장으로 불러내어 거대한 대화와 토론의 마당을 열어놓아야 마땅한 사태인 것"(228쪽)이라고 말한다.

밀양 송전탑 문제도 빼놓지 않는다. 2005년부터 시작된 한국전력의 만행은 극에 달하고 있다. 자연만이 아니라 인간의 몸, 마을 공동체까지 파괴하고 있다. 마을 공동체가 파괴된 과정, 무관심으로 일관한 국회의원의 태도에 화가 났다. 정부와 정치권, 폭력이 된 공권력, 폭거를 일삼는 공기업에 세금을 내야 한다니.

저자는 "밀양송전탑 싸움을 통해 내가 얻은 가장 큰 학습은 정치공간이 '허당'이 되어 버릴 때, 국가와 시민이 직접 부딪칠 때 재난이 도래한다는 사실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정치이며, 그 정치는 저들을 향한 청원이 아니라 우리들 스스로 엮어 세우는 방향으로 귀결되어야 한다는 중요한 진실"(229쪽)을 배웠다고 말한다. 정치를 잘못 배운 힘의 운반자들과 정치를 TV드라마로 배운 사람들이 이 땅의 정치를 망치고 있다.

밀양에는 행정대집행과 한전의 폭력 속에도 굴하지 않는 자유인들이 있다. 한전직원과 한바탕 싸웠음에도 짜장면을 함께 나눈 어르신들의 모습은 슬프면서도 유쾌했다. 청도 삼평리 어르신들도 한전직원들과 다투었음에도 마치 자식처럼 대하는 모습을 보면 원수 사랑에 대한 예수의 가르침이 생각나 그리스도인인 내 마음을 부끄럽게 한다. 밀양과 청도 어르신들은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이 아닐까. 성경 열심히 읽고 교회참여 열심히 해도 원수를 미워하고 자기와 맞지 않으면 배제해 버리는 위선이 나를 포함한 그리스도인들에게 참 많다.

"흙 속에서 노동하는 자만이 가진 빛나는 인간의 위엄을 지닌, 선하고 어진 자유인들을 이 싸움의 본질은 돈의 노예와 자유인의 투쟁이다. 부디 이 자유인들에게 승리가 돌아갈 수 있기를"(156쪽) 저자가 응원하듯 겁 많고 소심한 나도 청도와 밀양 어르신들을 응원해 본다. 함께 하지 못해 죄송하기도 하다.

밀양과 청도에 세워진 송전탑은 모두 위험한 고리 1호기 핵발전소 수명연장을 위한 것이라고 한다. 노후 핵발전소는 잦은 사고가 있었는데 한전이 은폐했다고 한다.

그런 위험한 핵발전소에서 일하는 노동자에 대한 인터뷰는 흥미로웠다. 저자는 핵발전소 노동자들과 인터뷰가 쉽지 않았다고 한다. 비정규직인데다 위험한 곳에서 일하지만, 한전의 처지를 대변한다. 그래서 유가족들과 인터뷰를 했다고 한다. 방사능에 노출된 고인의 생전 모습에 관한 유가족의 묘사는 체르노빌 핵사고를 다룬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의 ‘체르노빌의 목소리’에 나오는 증언들과 비슷했다. 핵 문제는 환경 문제만이 아니라 노동문제도 얽혀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핵발전소에서 만들어진 전기를 도시 사람들에게 보내는 과정에서 누군가는 끔찍한 전자파를 맞으며 살아야 한다는 것, 그리고 누군가는 반드시 살던 곳에서 내쫓겨야 한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리고 핵발전소에서 매일처럼 피폭당하는 사람들이 있다."(122쪽)

교직에 몸담았던 저자는 교육문제도 다루고 있다. 그는 "이 나라 아이들이 처해 있는 현실이야말로 잔혹, 엽기 그 자체이다. 청소년 사망 원인 1위가 '자살'인 이 나라 현실이야말로 사탄스럽다"(114쪽)고 말한다. 청소년과 아동을 아이다움, 순진한 동심이라는 판타지에 가둬둔 채 친구를 적으로 만든 공교육 현실을 안타까워하고 있다.

작년 홍준표 경남도지사가 학교는 밥 먹는 곳이 아니라 공부하는 곳이라며 무상급식을 폐지해 난리가 난 적이 있다. 이에 저자는 밥 한 공기에 세상사가 있다는 동학 2대 교주 해월 최시형의 말을 인용해 반박한다. "'밥'은 아주 중요한 교육적 가능성을 담고 있는 영역이죠. 그러므로 밥 한 그릇에 담겨 있는 세상사를, '밥'으로 향하는 삶의 기술을 학교가 가르쳐야 한다고 생각해요."(109~110쪽) 이 대목에서 가톨릭재단 학교들은 무상급식을 하고 있는지 궁금하다. 안 하는 곳이 있다면 정치문제와 상관없이 무상급식을 했으면 좋겠다.

저자는 한국의 교육에 대해 이제 교육불가능으로 정의한다. 그래서 "공교육의 학교로 들어온 것을 처음으로 후회했고, 그래서 슬펐다"고 고백한다. 앞으로 제자들이 마주해야 할 암울한 노동현실로 내보내야 한다는 것에 마음이 늘 무거웠다고 한다. 교육불가능 현실에 대한 해결책은 "지금 학교 교육이 처해 있는 제도와 시스템, 경쟁과 입시를 향한 모든 관행과의 혁명적인 단절, 거기서 생겨날 혼란을 감당할 성숙한 용기 뿐"(79쪽)이라고 제안한다.

마지막으로 저자가 꿈꾸는 고르게 가난한 사회란 무엇인지를 언급하며 마무리할까 한다.

"내가 살고 싶은 나라는 마을 공화국이다. 풍요와 안락의 광태가 사그라든 뒤에야 찾아올지도 모를 고르게 가난한 사회다. 관건은 '민주주의'이리라. 민주주의는 복잡하고, 더디며, 소란스러운 것이며, 주권은 누군가에게 양도하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이 직접 행사해야만 주권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엄밀한 의미에서 민주주의는 개인의 책임성 범위 내, 곧 마을 수준에서 가능한 것인지도 모른다."(27쪽)

"여전히 나는 꿈을 꾼다. 오래된 미래처럼 우리에게 다가올 어떤 그림을, 고르게 가난한 나라, 그 가난이 가져다줄 삶의 평화, 그 평화의. 정경을."(28쪽) 해방신학스럽게 말하자면, 고르게 가난한 사회는 하느님나라고 하느님나라는 고르게 가난한 이들이 모인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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