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수의 성지? 퀴어도시 대구

[인터뷰] 배진교 대구퀴어문화축제 조직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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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6-28 15:14 | 최종 업데이트 2016-06-28 15:26

*이 기사는 주간 <워커스> 16호에도 실렸습니다.

6월을 ‘호국 보훈의 달’이라고 대답한다면 당신은 ‘전후 세대’, ‘6.15 공동 선언의 달’이라고 대답한다면 당신은 ‘아재’다. 6월은 ‘퀴어’한 달, 성소수자에게는 해방의 달이다. 지난 11일 서울 광장에서는 열린 퀴어 축제는 끝났지만, 아직 끝이 아니다. 26일 대구퀴어문화축제가 기다리고 있다.

서울 이외 지역에서는 유일하게 열리는 퀴어 축제. 누군가는 대구를 보수의 성지라고 불렀지만, 이곳에서 벌써 8년째 퀴어문화축제가 이어지고 있다. 덕분인지 대구는 한 설문 조사에서 ‘동성 결혼 법적 허용’에 가장 높은 찬성률이 나왔다. (2014년 12월 한국갤럽이 실시한 설문 조사 결과 대구/경북은 동성 결혼 법적 허용에 대한 찬성 39%로, 2위 부산/울산/경남, 3위 서울을 제치고 1위를 차지했다.)

동성 결혼 합법화는 사랑에서 시작해 혼인으로 귀결되는 한국 사회에서 중요한 질문이다. 단 한 번 설문으로 설명할 수 없겠지만, 대구를 보수의 성지로 일반화하는 것 또한 틀린 소리라는 방증이다. 적어도 성소수자 인권 문제에서 대구는 특별히 더 뒤처질 것이 없다. 그리고 이런 결과에는 8년 차를 맞은 대구퀴어문화축제가 어떤 역할을 했음이 분명하다. 수많은 활동가와 시민의 힘으로 만든 축제, 시작이 중요한 법이다. 시작은 배진교 대구퀴어문화축제 조직위원장의 무모함이었다.

▲2015년 제7회 대구퀴어문화축제에서 배진교.
▲2015년 제7회 대구퀴어문화축제에서 배진교.

잘나가던 옷 장사꾼, 최현숙을 만나다
배진교는 대구 동성로 야시골목에서 잘나가던 보세 옷 장사꾼이었다. 대학 졸업 후 시작한 옷 장사가 10년쯤 됐을까. 돈 세는 재미와 통장 찍어 보는 맛에 행복을 느끼던 시간은 지나가고 무료함이 찾아왔다. 그러던 가운데 2007년 당시 최현숙 민주노동당 성정치위원장이 커밍아웃을 하고 총선 출사표를 던지는 장면을 목격했다.

“한미 FTA로 한창 논쟁일 때 심상정 의원이 노무현 대통령과 격렬하게 토론하는 걸 보고 반하기는 했지만, 평범한 시민이었어요. 그때 최현숙 씨의 커밍아웃과 출마 선언을 봤죠. 이 사람을 지지할 방법이 없을까 생각하다가 친구에게 물었어요. 얼마 후 진보신당이 창당되는데, 그때 당에 가입하면 지지할 수 있다고 해서 진보신당 창당과 함께 가입했어요.”

약 1년 정도는 당비만 내는 ‘종이 당원’이었다. 우연히 대구시당 행사에 참석했다가, 여성 모임을 만난 배진교는 당시를 “새로운 세상이었다”고 회상한다. 평범한 자영업자에게 처음 만난 진보 정당 활동가들은 신세계였다. 2008년 말, 지방 선거를 준비하던 대구시당이 배진교에게 상근 활동을 제안했다. 그는 무료해지던 옷 가게를 접고 진보신당 상근 당직자가 됐다.

“상근을 시작하고, 중앙당 회의 자리에서 동경했던 최현숙 씨를 만났어요. 당시 성정치위원회 회의 내용이 퀴어 축제였어요. 즐거웠지만, 성소수자 관련한 논의는 늘 서울이었어요. 그래서 성소수자 운동 활동가는 지역에도 있는데 왜 서울에서만 하느냐고 질문을 던졌어요.”

활동가는 있지만, 축제를 만들 사람이 없다는 답을 들었다. 사회 운동 경험이 적었던 배진교는 일단 부딪쳤다. 축제를 하려면 필요한 것은 무엇인지 알아봤고, 대구의 활동가를 소개해 달라고 했다. 연락을 돌리고, 한자리에 모였다. 그는 대구에서 퀴어 축제를 해 보자고 제안했다. 성소수자 운동 활동가들은 배진교의 제안에 소위 말해 ‘벙쪘다’. 염산 테러를 당한 기억을 가진 활동가도 있었다. 대구는 퀴어 축제를 할 만한 분위기가 아니라는 거였다. 정 하고 싶으면 조용히 영화제 정도나 하자고.

“이들은 활동하면서 아웃팅 문제 등 인권 감수성이 풍부한 상태였어요. 지역 분위기도 잘 알고 있었고. 그런데 나는 그들이 보기에 ‘듣보잡’이었죠. 참여자 안전을 어떻게 보장할 것인가부터, 당사자 커뮤니티에는 들어가 봤느냐는 지적도 받았어요. 축제만 한다고 되는 게 아니었던 거죠. 지역 정서도 알아야 하고, 현실적 문제에 대한 고려도 필요했어요.”

왜 서울에서만 해? 대구에서도 퀴어 하자
배진교는 곧장 소개를 받고 당사자 커뮤니티에도 들어갔다. 곡절을 겪고 1회 대구퀴어문화축제 기획단 모임을 했다. 당사자 3명이 왔고, 10명이 채 안 됐다. 회의는 4시간을 넘어갔지만, 축제를 할지 말지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활동가들은 시기상조라고 판단했다. 그때 어떤 성 소수자가 “지금 안 하면 몇 년 동안 축제 이야기도 못 꺼낼 것 같다”고 이야기했다.

“그 이야기를 듣고, 우리가 해 보자고 했어요. 그때 진보신당 임원들한테 축제하고 싶다고 말했더니, 엄청 좋아했어요. 당시 조명래 대구시당 위원장은 행사장 갈 때마다 저를 데리고 다녔어요. 퀴어 축제를 하는데 돈이 없으니 도와 달라는 이야기를 엄청 했죠. 그런데 일각에서는 당이 우리를 이용하는 것 아니냐는 우려도 나왔어요. 저는 우리가 당을 이용하자고 했는데, 잘 안 됐죠. 당사자가 없는 축제라는 점이 아쉬웠지만, 그대로 진행했어요. 지금 그 사람들이 못 나온다면 나올 수 있도록 판을 깔아 주자. 1회 때 2명 참석하면, 2회 때는 5명, 3회 때는 10명이 올 수 있도록 하자고 했죠.”

돈도 없었고, 사람도 부족했다. 마침 게이 인권운동 단체 ‘친구사이’에서 스톤월 항쟁 기념 전국 순회 영화제가 있던 터라 대구 퀴어 축제와 시기를 맞추기로 했다. 퍼레이드 차량은 민주노총 방송 차량을 빌려 무지개 현수막을 감싸는 것으로 마련했다. 부스는 진보신당과 퀴어 축제 기획단 단 두 곳이었지만, 어쨌든 2009년 6월 20일 대구 동성로 한일극장 앞에서 1회 대구퀴어문화축제가 열렸다.

“소리로 담근 술, 바람소리라는 게이-레즈비언 풍물패가 오기로 했어요. 악기를 승합차에 싣고 오다가 작은 사고가 났어요. 우여곡절 끝에 퍼레이드에 맞춰 도착하기는 했는데 또 비가 오는 거예요. 풍물패가 앞장서고 행진하는데 퍼레이드 차량이 비에 젖으면서 무지개 현수막이 아니라 민주노총 구호가 더 잘 보이기 시작했어요. 풍물패는 비 때문에 상모도 안 돌아가는데 정말 미친 듯이 돌리고 있고. 그때 눈물이 한 방울 났어요. 그렇게 무지개 깃발 들고 동성로를 한 바퀴 도는 것으로 첫 행진을 마쳤어요.”

1회 축제, 대구시민은 뭘 하는지 몰랐다
당시 퀴어 축제를 지켜보던 대구시민의 반응은 어땠을까.

“우리는 축제 전에 한참 고민했어요. 당사자가 다치지 않도록 어떻게 대열을 정비할까 등. 그런데 막상 축제를 시작하니 우리한테 별 관심이 없었어요. 그냥 풍물 치는구나 정도? 하지만 서울이 아닌 지역에서 퀴어 축제를 했다는 것, 그리고 대구가 시작하면 부산이나 대전 등으로 확산되지 않을까 기대와 책임감이 같이 생겨났어요.”

사실 시민들만 무관심한 것은 아니었다. 퀴어문화축제가 열리기 전까지 대구 시민 사회 단체, 노동운동 진영도 마찬가지였다. 성소수자 존재에 대한 인식도 없었다. 그런 점에서 보면 배진교는 어딘가 독특한 구석이 있다. 그는 지난해까지 2년 동안 민주노총 대구지역본부에서 상근 활동을 했다. 진보 운동 안에서도 성소수자 운동에 대한 감수성이 그리 높지 않다고 평가되는 곳이 노동조합이다.

“퀴어 문화 축제를 하면서 시민 단체도 고민할 계기가 됐다고 생각해요. 저는 종이에 물 스미듯 하는 게 진보 운동이라고 생각해요. 너무 앞서가기만 하면 옆 사람 설득이 안 되잖아요. 반 발짝 정도만 앞서가는. 민주노총도 1회 때부터 축제에 이름은 걸었지만, 조합원을 직접 만나서 동의를 얻지는 않았죠. 시민 단체도 마찬가지죠. 모든 회원이 찬성해서 같이하고 있을까? 그렇지 않다고 봐요. 민주노총에서 일할 때도 그런 생각이었죠. 사람이 바뀌면 조직을 조금이나마 바꿀 수 있다고.”

2회 축제를 앞두고 또 할 수 있을까 고민하던 차에, 기자들에게 “올해도 축제 해요?”라는 전화가 걸려 왔다. 단발성으로 끝나면 다시 하기 어려울 것 같아, 또 시동을 걸었다. 하지만 2회 때까지도 당사자들의 움직임은 없었다.

“제가 커뮤니티에 들어가 활동했잖아요? 모든 번개, 정모에 다 나가고, 온라인 활동도 굉장히 열심히 했어요. 그때는 축제 같이 하자는 말을 못 꺼냈죠. 3년 정도 지났을까? 당사자 카페에서 먼저 ‘퀴어 축제 후원의 밤이라도 해 볼까’라는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나왔어요. 그렇게 당사자들이 후원금을 모으고, 3회부터 축제 기획에 참여하기 시작했어요. 자원봉사자를 당사자로 모았죠. 3회 퍼레이드 때 메인 현수막을 당사자가 들었어요. 차량 위에 올라가서 아래를 봤는데, 가면을 쓰기도 하고 눈을 가리기도 했지만, 다 당사자인 거에요. 순간 울컥했죠.”

4회 축제는 ‘평등 결혼’을 내걸었다. 대구 도심 한복판에서 동성 결혼식을 진행하는 게 축제의 하이라이트였다. 동성 커플을 모집했고, 두 커플이 신청했다. 하지만 축제 전 아무래도 참석이 어렵겠다는 연락을 해 왔다. 어쩔 수 없었다. 퍼포먼스이지만 동성 커플 결혼식을 열었다. 턱시도를 입은 남-남 커플, 드레스를 입은 여-여 커플이 혼인 서약을 하고, 레인보우 배지를 달아 줬다.

“이 장면을 본 이성애자 시민들이 문화적 충격을 받았던 것 같아요. 그러면서 사람들이 퀴어문화축제 = 동성애 축제라는 걸 알게 됐죠.”

자연스러움과 무관심의 차이 성소수자에게 숨구멍을 틔우다
자연스러움과 무관심은 다르다. 무관심은 사실 존재 자체를 부정하고 은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4회 축제를 마친 이후부터 무관심은 두 가지 줄기로 나뉘었다. 존재의 긍정과 존재의 혐오로. 기독교 단체를 중심으로 조직적인 반대가 시작됐다. 혐오 단체들은 대구퀴어문화 축제에도 나타났다. 행진 차량 아래로 들어가 퍼레이드를 막는가 하면, 행진 경로를 막고 통성 기도를 하기도 했다. 혐오 단체에 대해 배진교는 혐오가 아닌 긍정으로 답했다.

“아무래도 일부 기독교인들이 대구를 성지라고 생각하고 있었나 봐요. 퍼레이드 행렬을 에워싸려고 하기도 했죠. 그렇다고 붙어서 싸울 필요는 없었어요. 6회 퍼레이드 당시, 골목을 막고 통성 기도를 하는 이들이 있었어요. 집회 신고를 냈으니, 경찰도 이들을 강제 연행 할 수 있다고 했죠. 우리는 자진 해산할 때까지 기다려 주겠다고 했어요. 그래도 막으면 다른 길로 가면 된다고. 우리가 대열을 돌려 목적지까지 행진을 끝냈는데, 통성 기도 하던 이들은 하나님이 우릴 쫓아냈다고 눈물을 흘렸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축제 규모가 커지면서 관공서와 마찰도 생겨났다. 2014년 6회 축제를 앞두고는 대구시설관리공단이 축제 장소 대여 신청을 불허하는 일이 벌어졌다. 7회 축제를 앞두고는 경찰청이 퍼레이드에 대해 집회 금지 통고를 했고, 중구청은 야외 무대 사용을 불허했다.

“아, 이제 우리가 뭘 하는지 아는구나, 그리고 반대하는 이들이 잘못된 정보를 가지고 반대하는구나. 이제 우리가 뭘 해야 할지가 명확히 보이기 시작했어요. 잘못된 정보에 대해 제대로 알려야겠다는 것 말이죠. 그동안 성소수자는 조용했잖아요. 아무 일이 없어서 조용한 게 아니라, 죽은 듯 지내고 있었기 때문에 무시됐죠.”

배진교는 퀴어 문화 축제가 대구에 사는 성소수자에게 숨구멍 하나를 열었다고 말한다.

“엄두를 내지 못한 사람들에게 숨 쉴 수 있는 구멍이 생긴 거죠. 동성애자라고 해고당하거나, 직장 생활을 할 수가 없어서 막막하거나, 가족들한테 귀신 쓰였다고 폭행당하거나. 성소수자의 존재를 알려 내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를 통해 나타나는 차별, 폭력, 혐오 등을 많은 사람이 알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제가 40년을 살면서 제일 잘한 일이 퀴어 문화 축제를 한 거예요. 10회를 기점으로 반대 집회, 폭력 우려는 점점 줄어들 수밖에 없을 거예요. 퀴어 문화 축제는 대구시가 자랑스러워해야 할 축제인 거죠. 조만간 대구시가 유치하려고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어요. (웃음) 이제 존재를 알렸고, 앞으로는 성소수자가 겪을 부당함을 하나하나 같이 싸워 나가야죠.”

▲2016년 6월 26일 열린 제8회 대구퀴어문화축제
▲2016년 6월 26일 열린 제8회 대구퀴어문화축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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