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교협 시사 칼럼] 사회적 고통의 크기 : 공동체적·사회적 차원의 예방 / 김은영

18:17

개코원숭이의 관찰은 늘 우리에게 흥미로운 시사점을 가져다준다. 가령 그들 간에 싸움이 일어났다고 가정해보자. 한 수컷 원숭이가 싸움에서 졌다면, 그 원숭이는 주변을 둘러보다가 젊은 수컷 원숭이를 발견하고는 재빨리 쫓아가 가격한다. 갑작스레 얻어맞은 젊은 수컷은 근처에 있던 암컷의 머리를 쿵 박고, 기분이 상한 암컷 원숭이는 옆에 있던 어린 원숭이를 후려친다. 그리고 어린 원숭이는 태어난지 얼마 되지 않은 아기 원숭이를 두들겨 팬다.

바래시와 립턴에 의하면 이러한 공격성의 전이는 약 15초 안에 모두 일어난다. 이는 어떤 좌절에서 시작된 공격성이 좌절을 안겨준 대상이 아닌 또 다른 대상을 향해, 정확히는 힘의 서열에서 낮은 위치에 놓인 대상을 향해 빠르고 효율적으로 전달, 혹은 증폭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러한 공격성은 많은 경우 무리를 지어 특정 개체를 배제시키거나 괴롭히는 집단적 형태로 드러나기도 한다.

그렇다면 궁금하다. 두들겨 맞은 아기 원숭이, 혹은 무리로부터 배제되고 괴롭힘을 당한 개체의 마음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질까? 이를 알기 위해서는 가장 간단한 형태의 사회적 배제가 개인에게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해 알 필요가 있다. 호기심이 많은 연구자들은 사회적 배제가 어떤 고통을 야기하는가라는 문제의식을 가지고 진통제인 타이레놀과 사회적 고통 간의 관계를 관찰했다.

연구자들은 피험자들에게 각각 컴퓨터를 이용하여 가상의 공놀이를 하게 했는데, 이때 피험자들은 자신들이 다른 피험자들과 함께 가상적 공놀이를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사실은 컴퓨터가 각 피험자들과 공놀이를 진행했다. 컴퓨터는 초반에는 피험자와 화기애애하게 공놀이를 진행했지만, 이후에는 피험자에게 전혀 공을 주지 않았다. 즉 피험자들은 자신만 공을 못 받고 있다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흥미로운 결과가 보고된다. 진통제를 두 알 복용한 피험자들이 복용하지 않은 피험자들에 비해 유의하게 낮은 사회적 스트레스를 보고한 것이다. 이를 역으로 추론해 보면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릴 수 있다. 가상적인 공놀이에 끼지 못한 사회적 고통은 단순한 심리적 고통이 아니라 진통제를 통해 완화되는 물리적 실체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질문을 던져볼 수 있다. 가상적 공놀이에서 배제된 고통이 진통제 두 알을 통해 완화될 수 있는 물리적 실체로서의 고통이라면, 현실에서 사회적 배제와 괴롭힘을 경험하는 이들이 지각하는 사회적 고통의 크기는 얼마일까?

얼마 전 사회를 들썩이게 했던 학교폭력 피해와 관련한 호소는 피해자의 고통이 단순히 학창 시절에 한정되지 않고 발달 과정 자체를 저해하며, 나아가 성인기의 만성적 우울, 사회 부적응, 그리고 심각한 정신장애로 진행될 수 있다는 사실을 단적으로 보여주었다. 그리고 사실 우리는 방치된 학교폭력이 어린 학생의 자살과 자해와 같은 극단적 결과를 가져온다는 것을 익히 알고 있다. 집단적으로 이루어지는 배제와 비방, 모욕, 차별, 괴롭힘의 경험은 피해자로 하여금 자신을 둘러싼 온 세계가 자신을 핍박하고 있다는 두려움과 공포를 갖게 하고, 사회로부터 철수하게 한다.

성인이 된 어느 피해자는 아직도 많은 이들이 SNS에서 자신에 대한 비방과 험담을 하고 있다며 불안해하고, 혹은 자신을 괴롭힌 가해자를 응징하기 위해 이미 군대와 경찰이 동원되었다는 생각에 깊숙이 빠져들기도 한다. 이러한 증상은 박해망상(persecutory delusions)으로 명명되는데, 피해자가 경험한 집단적 폭력의 경험이 적어도 피해자에게는 망상이 아닌 현실이었기에, 이들의 조건화된 반응을 피해망상이라 부르는 것이 과연 적절할지 의문스럽기도 하다.

그렇다면 이토록 치명적인 고통은 얼마만큼의 크기일까? 가상적 공놀이에서 배제되는 고통이 진통제 두 알에 해당한다면, 집단적 배제와 괴롭힘으로 인한 고통은 진통제 몇 알에 해당할까? 만일 그 크기가 100배 정도라면, 진통제는 이미 효과를 넘어 치사량을 넘어선 셈이다.

▲마스크 착용은 일선 교사로 하여금 학생들 간 비언어적 소통을 짐작하기 어렵게 하는 측면이 있다. 역으로 보자면, 그 어느 때보다도 교사와 학생 간의 응집력, 학생들 간 친밀한 상호작용을 만들기 위한 부단한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이다.(사진=자료사진)

사실 근래 학교들이 심상치 않다. 외견상 학교폭력 신고 사안이 증가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지역의 한 Wee센터가 집계한 바에 의하면, 학기 초 2주간 올라온 학교폭력 신고 사안은 코로나19 이전 시기를 기준으로 할 때 약 2개월 간 접수된 사안 수와 맞먹었다. 이러한 변화가 일시적인 것인지 혹은 장기적인 것인지에 대해서는 좀 더 시간을 두고 지켜볼 필요가 있지만, 결코 간과할 수 없는 조짐임은 분명하다.

학교폭력의 유형, 내용, 진행 과정 등은 사안별로 모두 상이하게 나타난다. 그러나 지난해의 비대면 교육, 그리고 대면 교육으로 점진적 전환과정이라는 작금의 맥락과 관련하여 공통적 요인을 살펴보면 몇 가지의 시사점을 찾을 수 있다. 코로나19 방역의 일환으로 진행된 사회적 거리두기는 학업 현장에서 비대면 교육을 통한 또래 관계의 제한과 단절을 불가피하게 가져왔고, 동시에 비대면 공간에서 사이버 폭력을 3배 이상 급증시킨 것으로 보고됐다.

재개된 대면교육 환경 또한 마스크 착용을 통한 비언어적 소통 단절과 함께 엄격한 거리두기 수칙 준수를 통해 학생 간 상호작용과 사회적 관계의 제약을 가져오면서, 경우에 따라서는 집단적 쏠림과 따돌림 현상에 취약해진 것으로 드러났다.

가령, 외향적이고 활달한 학생들은 방역과 거리두기라는 조건에서도 사회적 관계를 이어갈 수 있지만, 내향적이거나 사회적 기술의 발달이 미흡한 학생은 소통의 제한과 교실 내 거리두기 수칙에 묶여 온종일 한마디도 하지 못하고 귀가하거나, 대화의 무리에 끼기 위해 안간힘을 쓰다 좌절을 거듭하는 것이다.

교실에서 누구와도 대화하지 못하고 스스로 외톨이라고 지각하는 것은 사실상 자신이 사회적으로 배제되었다는 느낌과 동일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사회적 배제에 대한 지각과 불안은 무리 짓기에 대한 강화된 욕구와 반복된 좌절로 이어져 학교폭력에 취약한 구조를 만들어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러한 시기에 학교폭력에 대한 개입과 예방은 다방면으로 이뤄져야 한다. 사안별 대처는 물론이고, 학급과 학교 차원에서의 개입과 예방이 시급하다. 마스크 착용은 일선 교사로 하여금 학생들 간 비언어적 소통을 짐작하기 어렵게 하는 측면이 있다. 역으로 보자면, 그 어느 때보다도 교사와 학생 간의 응집력, 학생들 간 친밀한 상호작용을 만들기 위한 부단한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차원에서의 예방책은 공동체적, 사회적 차원의 노력에 놓여있다. 사회적 배제와 괴롭힘, 차별에 대한 공동체적, 사회적 용인의 정도에 달려있는 것이다. 학교는 사회의 축소판이자 당대 사회를 비추는 거울이기도 하다. 그리고 우리는 코로나19라는 위기를 거쳐 오며 사회 곳곳에서 사회적 배제와 차별이 용인되는 모습을 종종 발견하게 된다.

코로나19가 가져온 명암은 영세 자영업자와 도시 서민에게 딛고 서기 힘들 만큼의 시련임에 틀림없다. 안이 텅 빈 상점, 기한 없이 휴업을 내건 가게, 수없이 바뀌는 간판들 아래에서 피고 지었을 희망과 좌절. 가까운 경북대학교 서문을 나서면 거리 곳곳에서 그러한 고통과 좌절을 읽게 된다. 심지어 특정 종교를 가진 외국인 유학생들에 대한 배제와 차별의 메시지를 담은 현수막과 유인물에서조차 오늘의 시련과 좌절이 얼마나 무겁고 무서운지를 실감하게 된다.

포용과 관용에 대한 요구는 사치처럼 들린다는 호소마저 들린다. 그러나···만일 오늘의 사회적 배제와 차별을 용인한다면, 우리는 다음 세대의 아이들을 지킬 힘을 잃을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어른들 사회의 모습은 교실에서 그대로, 남김없이 재현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하기에 공동체적, 사회적 차원에서의 학교 폭력의 예방은 가장 힘들고 무거운 과제임에 분명하다.

김은영 경북대학교 교육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