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주기 10월항쟁 합동위령제···“2기 진실화해위가 영혼들 해원해달라”

19:05

1일 ‘10월항쟁 등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희생자 위령탑(대구시 달성군 가창면 용계리 128)’이 지난해 건립된 이후 처음으로 합동위령제가 열렸다. 10월항쟁유족회 등은 최근 출범한 2기 진실화해위원회가 제대로 진상규명할 것을 요구했다.

▲10월 1일, 대구시 달성군 가창면 용계리에 건립된 10월항쟁 및 한국전쟁 전후 민간일 희생자 위령탑에서 합동위령제가 열렸다. [사진=정용태 기자]

10월항쟁유족회가 주최하고 대구시가 후원한 합동위령제에는 10월항쟁 유족을 포함해 경산, 영천 등 전국 각지에서 활동하는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희생자 유족을 포함한 100여 명이 참석했다.

▲채영희 10월항쟁유족회장 [사진=정용태 기자]

10월항쟁에 참가한 이후 1950년 6.25전쟁 직후 경찰에게 연행된 뒤 불상지에서 살해된 채병기(1925년생) 씨의 딸 채영희(74) 10월항쟁유족회장은 “위령탑에 새겨진 희생자 명단은 800명도 안 된다. 2기 진실화해위원회가 출범하고 신고를 받고 있지만, 아직도 불이익을 당할까 신고하지 않는 이들이 많다”며 “아프고 슬픈 억울한 역사도 명백히 밝혀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먼 나라의 아우슈비츠나 킬링필드는 알아도, 가까운 10월의 가창골이나 경산 코발트, 대전 골령골은 모르고 있다”며 “제2기 진실화해위원회는 한 사람의 억울함도 없이 조사해서 귀천을 떠도는 영혼을 해원해달라”고 말했다.

권영진 대구시장은 “앞으로도 추모제와 평화, 인권교육 등 다양한 위령 사업을 통해서 과거의 역사적 아픔을 잊지 않고 기억하여 유가족의 아픔을 치유하고, 지역 사회의 인권증진에 최선을 다하겠다”고 추도사를 전했다.

김원웅 광복회장도 “미군정하에서 일어난 대구 10월항쟁은 해방 이후 미군정과 친일기득권 세력에 저항한 최초의 대규모 민중항쟁이었다”며 “해방 이후 민초들의 정의로운 항쟁은 항일 독립운동의 연장선상에 있으며, 이들의 처절한 항쟁은 투쟁 역량이 강화되어 4.19혁명과 6월항쟁, 촛불혁명으로 이어지는 ‘승리의 역사’를 다지는 밑거름이 되었다”고 추도사를 전했다.

이어 김 회장은 “청산의 대상인 친일적폐세력과 국민 화합을 이루자는 것은, 일제하 조선총독부가 내세운 내선일체와 다를 바 없다”며 “존재 자체가 악인 친일반민족세력이 76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활보하고 있으나, 깨어난 민초들에 의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날도 멀지 않았다”고 밝혔다.

▲10월 1일, 대구시 달성군 가창면 용계리에 건립된 10월항쟁 및 한국전쟁 전후 민간일 희생자 위령탑에서 합동위령제가 열렸다. [사진=정용태 기자]

위령제는 10월문학회 회원들이 준비한 추도시 낭독, 문화예술인들이 준비한 진혼무, 지신밟기 등으로 진행됐다.

진보당 대구시당은 이날 성명을 내고 “진실 규명과 희생자 명예회복이 제대로 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10월 항쟁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위한 특별법’이 제정되어야 한다”고 밝혔다. 지난 6월 29일 국회에서는 ‘여수·순천 10·19 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됐다.

10월항쟁75주년행사위원회는 이날 저녁 7시 대구백화점 앞 야외무대에서 시민대회도 연다. 오는 8일에는 대구형무소 옛터인 삼덕교회에서 위령탑까지 도보순례 행사도 진행한다.

10월항쟁은?

10월항쟁은 대구에서 시작해 전국으로 퍼져나간 해방 이후 최초의 민중항쟁이다. 1946년 9월 24일 대구에서도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전평)의 총파업에 동참한 노동자들의 시위가 벌어졌다. 9월 30일 미군정의 식량 정책에 항의하는 시민 400여 명이 쌀을 요구하는 시위도 벌어졌다. 10월 1일 경찰 발포로 희생자가 발생하면서 미군정의 식량 정책과 친일 경찰 중용 문제에 분노한 시민들이 거리에 나왔다.

2일부터는 시민 2만여 명이 참여하는 대규모 시위가 벌어지면서 경찰과 충돌이 일어났다. 미군정은 계엄령 선포로 맞섰다. 130여 명이 목숨을 잃고, 260여 명이 다쳤다. 수천 명이 ‘폭동’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검거됐다. 대구의 봉기는 이후 경북 지역을 시작으로 남한 전역으로 번져 그해 12월까지 시위가 지속됐다.

▲출처: 김일수, 2004,「대구와 10월항쟁- 10.1사건을 보는 눈, 폭동에서 항쟁으로」 중에서

한국전쟁 전후 10월항쟁 참가를 이유로 희생이 이어졌다. 1950년 7월 대구형무소에 수감됐던 10월항쟁 참가자들은 다른 재소자들과 함께 가창골, 경산 코발트 광산 등지에서 적법절차 없이 처형됐다. 경찰의 집단 처형 인원은 1,438명으로 추산된다. 좌익에 있다가 전향한 사람을 가입시켜 정부가 만든 국민보도연맹원을 적법절차 없이 처형한 사건도 벌어졌다. 확인된 희생자 숫자만 4,934명, 대구는 99명이다. 학자들에 따라 의견이 다르지만, 최소한 10만여 명이 학살된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폭동에서 항쟁으로 60년
대구시 조례 제정과 위령탑 건립까지

10월항쟁은 그동안 ‘좌익폭동’으로 규정돼 60여 년 동안 묻혀있었다. 1960년 4.19혁명 이후 정부와 지방자치단체, 유족이 함께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학살 진상규명, 경북·대구유족회’를 결성하고, 진상규명과 조사활동을 시작했다. 하지만 1년 후 일어난 5.16 군사반란으로 유족들이 구속되면서 유족회는 강제해산됐다. 1987년 민주화와 함께 10월항쟁을 폭동이 아닌 항쟁으로 조명해야 한다는 연구 결과들이 나왔고, 2005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 기본법 제정으로 진실규명의 물꼬가 트였다.

2009년 진실화해위원회가 10월 대구사건과 대구보도연맹 관련 사건이 공권력에 의한 희생이었다는 진상규명 결과를 결정했고, 10월항쟁유족회가 결성됐다. 유족회는 이때부터 많은 희생자가 나온 가창골에서 합동위령제를 지냈다. 때마침 2010년 3월 ‘진실화해위원회’가 국가 책임을 인정한 뒤 정부 쪽에 사과와 위령 사업 지원을 권고하면서 명예회복의 길이 열렸다.

대구시의회도 2016년 7월 26일 ‘10월항쟁 등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희생자 위령사업 지원 등에 관한 조례’를 제정했다. 대구시도 예산 8억5천 원을 들여 2018년부터 위령탑 건립 사업을 시작했다.

위령탑에는 유족이 확인된 희생자 명단 573명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위령탑 옆 건립취지문에는 “한국전쟁 전후 정치·사회적 혼란속에 많은 민간인이 무고하게 희생되었고, 그중에서도 가창 골짜기는 1946년 대구 10월항쟁 직후부터 1950년 한국전쟁시기까지 많은 민간인이 정당한 법적 절차 없이 억울하게 희생된 곳입니다…(중략)…아픈 역사를 기억하는 추모의 장이 되고 나아가 국민의 인권이 존중되는 참다운 역사 발전의 밑거름이 되기를 바란다”는 내용이 대구시장과 10월항쟁유족회 명의로 기록됐다.

천용길 기자
droadb@newsmi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