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듯 다른 역사] 1788년, 가체금지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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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8년 음력 11월 9일, 함경도 갑산의 진동진 만호로 근무하던 노상추盧尙樞는 조정으로부터 내려온 명을 기록으로 남겼다. 변방 중의 변방인 진동진에서 나라를 지키는 일도 모자라, 아낙들의 머리까지 단속해야 하는 일이 벌어졌으니, 명에 사는 무관이라도 편한 심기는 아니었다. 가체加髢를 쓴 아낙들이 대부분 사족 집안이거나 혹은 기생이었으니, 이들을 단속하는 게 보통 성가신 일이 아니라는 것쯤은 쉽게 예상되었다. 단속하는 군관들이 행여 실수라도 하면, 여성 문제로 지역 사족과 관아의 싸움이 벌어질 수도 있었다.

▲Vanvelthem Cédric, CC BY-SA 4.0 <https://creativecommons.org/licenses/by-sa/4.0>, via Wikimedia Commons

가체는 여성의 머리에 덧대어 올리던 장식품으로, 머리 모양을 풍성하게 보이도록 하는 데 사용했다. 여러 화려한 장식품을 달아 풍성한 머리와 화려한 치장을 동시에 하려는 용도이기도 했다. 여성들이 머리를 얹는 것이야 오랫동안 전승된 양식이니 이를 무어라 할 수는 없지만, 거기에 돋보이고 싶고 화려해지고 싶은 욕망까지 얹어진 것이 문제였다. 돋보이고 싶은 만큼 본머리에 ‘다리(가체를 의미하는 다른 말로, 다래라고도 함)’를 얹었는데, 심한 경우 사방의 높이가 한 자가 되었다. 문제는 화려한 만큼이나 높은 가격이었다. 가체가 비록 가짜머리라고 해도, 재료는 실제 사람 머리카락을 사용했다. 그리고 수공 과정과 장식까지 합하면, 그 가격은 천문학적으로 뛰었다. 당시 가체가 웬만한 집 한 채 가격이었다는 말이 허투루 들리지 않는 이유이다.

주자학 이념에 따라 세워졌던 조선은 ‘검소함’이 중요한 덕목 가운데 하나였다. 문정왕후의 죽음 이후 중앙정계를 차지했던 사림파들은 특히 검소함을 강조했고, 이는 매번 가체 금지 논의로 이어지곤 했다. 머리 사치를 위해 가산을 탕진했다는 이야기로부터, 나이 어린 신부의 방에 시아버지가 들어오자 갑자기 일어나다 머리 무게에 눌려 목뼈가 부러진 일화도 기록될 정도로 사회 문제였다. 그러나 실제로 단속하거나 금하는 행동이 없자, 가체는 사대부 결혼의 필수품으로까지 자리를 잡았다. 욕망의 높이만큼 커지고 화려해졌으며, 가격 역시 일반인들에게는 꿈도 꿀 수 없게 되었다. 1747년 영조 역시 가체를 금하고 족두리를 사용하도록 명을 내렸던 이유이다. 그러나 수백 년에 걸쳐 문화 현상으로 굳어 버린 탓에, 가체는 1788년까지도 계속 하늘로 솟아오르고만 있었다.

정조의 입장은 분명했다. 생활필수품도 아닌 자신의 체면을 차리기 위한 도구임에도 서로 경쟁하듯 높은 가격을 주고 구매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생각이었다. 당시 우의정이었던 채제공蔡濟恭 역시 근면한 백성들 입장에서 가지는 상대적 박탈감과 상실감을 우려했다. 아무리 돈이 많아도 함께 살아가는 평범한 백성들의 마음을 헤아려, 이를 금해야 한다는 주장이 이어졌다. 정부 입장에서 금령을 만들고, 강하게 단속해야 하는 이유였다. 1788년 정조의 명에 의해 ≪가체신금절목加髢申禁節目≫이 만들어지고, 노상추가 근무하는 오지까지 관련 금령이 내려진 이유였다.

내용 역시 분명하면서도 자세하여, 단속과 실행이 바로 이루어지도록 했다. “사족(양반가)의 처첩이나 여항(양민을 의미)의 부녀로서 다래를 땋아 머리에 얹는 일과 밑머리로 얹는 제도를 일절 금한다”라는 구절을 시작으로 총 8개의 구체적인 금령이 만들어졌다. 자기 생머리를 땋아 올림머리를 하는 것까지 허락되었고, 머리에 장식할 수 있는 것은 족두리에 한정했다. 절목 내에서는 심지어 족두리를 허락하면 거기에 칠보와 같은 것으로 장식하는 경우가 있을 것을 우려하여, 이름만 바꾸었을 뿐 검소함을 지향하는 금령의 의미를 퇴색시킬 수 없도록 했다. 장식 없는 족두리만 허락했다. 게다가 금령에는 사용자뿐만 아니라 판매하는 방물장수까지 처벌하도록 함으로써, 거래 자체를 없애려 했다. 당연히 족두리는 일반 모든 여성에게 허락한 것이 아니라, 사족에만 허락되었다. 더불어 의녀나 기생만 자신의 머리카락 외에 예외적으로 다른 것을 얹을 수 있도록 했는데, 그 역시 가리마를 착용하여 신분을 드러내는 용도에만 한정시켰다.

이 절목은 목판으로 판각된 후 인쇄하여 전국 관아로 반포되었다. 효율적으로 전국에 절목을 전파하기 위한 것으로, 지난 10월 3일 비변사 안으로 왕에게 올라왔던 절목이 불과 한 달이 갓 지난 음력 11월 9일 함경도 갑산까지 내려졌다. 당시 교통망이나 문서 전달 속도로 보면 이만저만 빠른 게 아니었다. 아마 당시 각 지역 관아에서도 조정에서 내려온 절목을 기반으로 다시 복각본을 만들어서 뿌렸을 것으로 추정하는데, 여성을 대상으로 한 금령이어서 한글과 한문을 병기해서 배포했다. 서울은 동지부터, 그리고 지역에서는 동지 이후 20일부터 시행하기로 했으니, 시행만 남은 셈이었다. 여성 대상의 대대적인 두발 단속 예고와 그 시행령이 함경도의 국경에 있는 군부대에까지 전달되었을 정도였으니 전국에는 어떠했을지 짐작할만하다.

21세기 대한민국에서 여성의 두발이나 복식에 제한을 가하는 금령이 내려진다면, “이게 나라냐”라는 항의가 빗발칠 것이다. 어쩌면 오늘 이 기사가 많은 사람에게는 2021년 아프가니스탄에서 일어남직한 탈레반 여성 정책을 떠올릴 수도 있을 것이다. 적어도 우리 사회는 어떤 사람이든 복식과 두발은 ‘개인의 선택 영역’에 속하도록 규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가체에 대한 금령이 이해되지 않는 것도 아니다. ‘국민 정서’의 영역에서 용인되기 어려운 고가의 소비재나 명품에 대한 비판이 우리 사회에도 여전히 존재하듯 말이다. 특히, 공동체를 해칠 정도로 일반인들이 박탈감을 느끼게 하는 소비 행태에 대해서는 국가적 조치까지 요구하는 경우도 많은 것이 현대사회가 아니던가!

자유는 넓을수록 의미가 있다. 옳고 그름으로 재단되지 않는 ‘선택지의 영역’이 가능한 많은 사회가 자유로운 사회라는 의미이다. 자유로운 공동체가 우리의 이상적 공동체라는 인식은 여기에서 나온다. 하지만 어느 사회나 타인의 자유를 침범하는 개인의 자유나 공동체를 깨뜨리는 자유까지 이상적 자유의 영역에 두지는 않는다. 물론 현대사회로의 이행 과정은 자유의 영역을 최대한 넓히는 과정이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여전히 대부분의 공동체 구성원들이 동의하고 행복감을 느끼게 하는 ‘보편적 자유의 영역’은 이보다 훨씬 더 보수적일 수밖에 없다. 다른 공동체 구성원에게 박탈감을 주는 ‘자유로운 행위’까지 이 보수적 영역에 들어있다고 보기 어려운 이유이다. 돈만 있으면 어떤 소비도 ‘선택의 영역’이기는 하지만, 좀 더 보수적인 선택을 바라는 것이 필자의 마음에만 한정된 것일까?

 

이상호 한국국학진흥원 책임연구위원

<다른 듯, 같은 역사>는 달라진 시대를 전제하고, 한꺼풀 그들의 삶 속으로 더 들어가서 만나는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사람의 삶은 참 예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네”라는 생각을 기록을 통해 확인하는 시간으로 기획된 것이다. 이 원문은 일기류 기록자료를 가공하여 창작 소재로 제공하는 한국국학진흥원의 ‘스토리 테파마크(http://story.ugyo.net)’에서 제공하는 소재들을 재해석한 것으로, 예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은 우리의 현실들을 확인해 보려 한다. 특히 날짜가 명시적으로 제시된 일기류를 활용하는 만큼, 음력으로 칼럼이 나가는 시기의 기록을 통해 역사의 현장 속으로 들어가 보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