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듯 같은 역사] 당량唐糧, 명목만 남아도 부담은 그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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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28년 음력 3월 25일, 김령은 옆 고을 안동부에서 당량唐糧을 가흥창으로 운반하기 시작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제 며칠 지나지 않아 예안현(현 경북 안동시 예안면 일대)에도 당량을 거두기 위한 관아의 독촉이 쏟아질 판이었다. 안 그래도 주린 배를 부여잡고 하루하루 보릿고개를 넘기고 있는 백성들에게 이 소식은 소문만으로도 감당하기 힘든 절망이었다.

당량을 말 그대로 해석하면 ‘당唐’, 즉 중국인들을 위한 ‘식량’이다. 당시 조선의 중국은 명明이었으니, 당량은 명을 먹이기 위한 식량이다. 왜 조선이 명을 먹일 식량을 거두어야 하는지 이유를 알려면, 당시 상황을 조금 살펴볼 필요가 있다. 17세기 초, 조선을 둘러싼 국제정세는 한 마디로 후금後金(청淸의 전신)의 발호와 명의 약화로 요약된다. 광해군 집권기였던 1621년 3월, 후금은 심양과 요양까지 함락하면서 세력을 키웠다. 이로 인해 이 지역을 지켰던 명의 장군 모문룡毛文龍은 패한 명나라 군사들을 이끌고 압록강변의 진강까지 도망쳤다.

이후 진강까지 쫓아온 후금 군대를 피해 모문룡은 조선인 복장을 한 채 도망쳐 그해 7월 평안도 철산 앞바다에 있는 가도椵島를 무단 점령했다. 역사적으로도 유명한 정묘호란(1627년)의 원인 가운데 하나가 이렇게 시작되고 있었다. 명나라 패잔병들과 난민들을 수습해 무단으로 가도를 점령한 모문룡은 철산과 용천, 의주 지역에 대한 약탈을 일삼기 시작했다. 생명만 겨우 유지한 채 도망친 군대의 사정이야 이해되지만, 약탈을 당해야 하는 조선 백성들 입장에서는 도적도 그런 도적이 없을 터였다.

난감해진 것은 평안감사였다. 무단 점거인데다 약탈까지 일삼으니 당연히 무력으로 제압해서 추방해야 마땅하지만, 꼴에 그들은 천조국天朝國 군인들과 백성들이었다. 그냥 두자니 민간의 피해를 감당할 수 없겠고, 쫓아내자니 그 이후 어떤 문제가 발생할 지는 굳이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결국 평안감사는 광해군에게 보고서를 올려 대책 마련을 요구했고, 광해군은 가도에 모문룡 군대 주둔을 받기로 했다. 이렇게 되자 모문룡은 자신들이 심양을 수복할 군대라면서 주둔비를 요구했고, 결국 조선 조정은 이것까지 부담해야 했다. 이렇게 해서 거둔 세금이 당량이었다.

그런데 김령이 당량으로 탄식하던 해는 1628년 3월이었다. 모문룡이 가도를 무단 점거한 지 이미 7년이 지났고, 그 사이에 많은 변화도 있었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인해 광해군이 폐위되었고, 반정에 대한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인조반정 세력들은 좀 더 적극적으로 친명 정책을 추진했다. 당연히 당량은 고착화되었고, 점점 심해지는 모문룡의 요구에 조선 조정은 쩔쩔매기 일쑤였다. 그런데 조선 조정이 명나라 군대의 주둔을 받아 주고 있는 상황은 중원으로의 세력 확장을 꿈꾸고 있었던 홍타이지(누르하치의 8번째 왕자로, 이후 청태종이 된다)에게 여간 거슬리는 일이 아니었다. 결국 1627년 정월 홍타이지는 이를 빌미로 조선을 침략했는데, 이게 잘 알려진 정묘호란이다.

정묘호란은 기본적으로 대조선 강경론자였던 홍타이지의 성향 때문이기도 했지만, 침략의 직접적 이유 가운데 하나는 가도에 주둔한 명의 군대였다. 군사 3만의 대군을 거느리고 후금이 조선 정벌에 나섰다는 소식에 모문룡은 도망치기 바빴고, 의주에서는 이러한 후금의 군대를 막느라 의주부사 이완李莞을 비롯한 수만 명의 병사들이 도륙당했다. 임진왜란 이후 다시 왕이 한양을 버리고 강화도까지 도망까지 해야 했던 전쟁은 결국 굴욕적인 화친을 통해 나라만 건사했다. 형제의 예로 청나라를 대하기로 약조한 결과였다. 조선이 당량으로 모문룡을 먹인 댓가 치고는 너무나 큰 피해였다.

1628년이 되면 가도에는 모문룡이 없고, 더 이상 먹일 명나라 유민이나 군졸도 없었다. 그런데 모문룡이 도망간 그 이듬해(1628년) 음력 3월, 조선 조정은 다시 관례로 당량을 거두기 시작했다. 당량의 필요는 완전히 없어졌음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당량으로 인해 국가 존립이 위태로운 위기를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거두던 세금은 거두고 보자는 식이었다. 하긴 그러고 보면 임진왜란이 끝난 지 30년이 다 되어 가는 당시까지 삼수량三手糧이나 사포량射砲糧도 남아 있었으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싶기는 하다.

삼수량도 황당하기는 하다. 임진왜란을 통해 조선은 전문적인 전투 병력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이를 위해 설치한 것이 바로 훈련도감이었는데, 여기에서 양성하는 병력들은 포수와 사수, 살수, 즉 삼수三手였다. 삼수량은 이러한 훈련도감의 운영비용이었는데, 임진왜란 당시 나라살림이 가난해서 이를 백성들에게 부담시켰다. 처음에는 1결당 쌀 2말 2되씩 거두다가, 인조 때에는 1말을 줄여 1말 2되를 거두었다. 사포량 역시 마찬가지였다. 임진왜란 이후 행여 있을 전쟁을 대비해 각 진영에 사수와 포수들을 상존시켜야 했고, 이들을 위한 특별세가 필요했다. 삼수량과 별도로 사포량도 거둔 이유였다. 그런데 임진왜란이 끝난 지 30년이 다 되어 가는 1628년에도 조선 조정은 여전히 삼수량과 사포량을 거두고 있었다.

조선의 백성들은 전세를 내고도 삼수량과 사포량, 그리고 당량까지 부담해야 했다. 기록에 따르면 임진왜란 전에는 대략 1결당 4말~6말 정도의 세금과 그 세금을 운송할 비용 정도만 부담했다. 그런데 이 시기 김령의 기록에 따르면 예안 백성들은 1결당 14~15말의 세금을 내고 있었다. 대충 봐도 평균 10말 가까운 추가 부담이다. 잡다한 세금이 본래 세금인 전세의 2배를 넘겼다. 만약 현대를 기준으로 20여 년 상간에 세금이 3배 늘었다면 나라가 뒤집혀도 10번은 더 뒤집힐 일이다.

나라가 전란에 빠지고 어려울 때야 백성들도 함께 고통을 감당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렇듯 전쟁이 끝나고 나라가 평화로워지면, 백성들의 고통을 줄여주는 것도 나라의 몫이다. 그러나 조선 조정은 이미 만들어진 세금 항목을 없애지 않았고, 이로 인해 백성들의 부담은 임진왜란 이전에 비해 세배 가까이 늘었다. 게다가 외국 군대 주둔비용까지 내야 했고, 심지어 주둔군이 없어진 상황에도 그들은 여전히 그 명목으로 세금을 내야 했다. 나라가 급할 때야 오죽 급하면 백성들의 호주머니까지 털까 싶지만, 평화의 시기까지 그렇게 한다면 더 이상 나라와 도적을 구분하기 힘들어진다.

이상호 한국국학진흥원 책임연구위원

<다른 듯, 같은 역사>는 달라진 시대를 전제하고, 한꺼풀 그들의 삶 속으로 더 들어가서 만나는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사람의 삶은 참 예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네”라는 생각을 기록을 통해 확인하는 시간으로 기획된 것이다. 이 원문은 일기류 기록자료를 가공하여 창작 소재로 제공하는 한국국학진흥원의 ‘스토리 테파마크(http://story.ugyo.net)’에서 제공하는 소재들을 재해석한 것으로, 예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은 우리의 현실들을 확인해 보려 한다. 특히 날짜가 명시적으로 제시된 일기류를 활용하는 만큼, 음력으로 칼럼이 나가는 시기의 기록을 통해 역사의 현장 속으로 들어가 보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