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선우] 우리의 영웅, 우리의 이웃들 ‘타이타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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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년 여객선이 빙산에 부딪혀 침몰하면서 1,500여 명이 사망한 20세기 최악의 해난 참사를 다룬 <타이타닉(1997년)>은 20세기 최고의 영화로 칭송받고 있다. 박스오피스 15주 연속 1위라는 역대급 기록을 달성하고, 1997~2009년 전 세계 박스오피스 1위를 차지했다. 현재 전 세계 흥행 수익 20위권 영화에서 20세기에 나온 작품도 <타이타닉>이 유일하다.

<타이타닉>이 전 세계인의 사랑을 받은 것은 비극적인 재난에 아름다운 로맨스를 녹여냈기 때문인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지만, 영화 곳곳에서 등장한 실존 인물들의 숭고한 희생도 한 몫 한다. 영화는 철저한 고증을 통해 스스로를 희생한 영웅들을 그려졌다.

로즈 드윗 부카더(케이트 윈슬렛)에게 구명조끼를 주면서 튼튼한 배를 만들지 못해 미안하다는 말을 남기고, 흡연실에서 최후를 맞은 것으로 그려진 타이타닉호의 설계자 토마스 앤드루스는 실제로 승객들을 돕다가 흡연실에 남아 사망했다고 알려졌다. 타이타닉의 기관장 조지프 G. 벨을 비롯한 기관부 선원들은 배가 완전히 침몰하기 2분 전까지 위치를 지키면서 전력 공급을 위해 분투했다. 이들은 모두 배와 함께 운명했다. 선장 에드워드 존 스미스도 승객들의 대피를 돕다 배에 남아 최후를 맞이했다.

영화는 귀한 신분일수록 의무를 다하는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하는 이들도 그렸다. 1등실 승객인 뉴욕 메이시백화점 오너 이시도르·아이다 스트라우스 부부는 구명정 승선을 거부했다. 구명정에 타지 못한 아이들과 부녀자들을 보고선 자신들의 구명정을 양보한 것이다. 아이다 스트라우스는 입고 있던 모피 코트를 하인에게 건네주고, 차가운 물속으로 가라앉았다. 영화에서 선실 침대에 누워 서로를 위로하며 최후를 맞는 노부부다.

타이타닉 승선자 중 최고 부호였던 뉴욕 월도프 아스토리아 호텔 소유주 존 제이콥 애스토어는 아내를 구명정에 태웠지만, 자신은 구조 우선 순위에서 밀렸다. 그는 영화에 그려진 대로 배의 난간을 붙잡고 밀려드는 바닷물을 바라보며 최후를 맞는다. 미국의 철강 재벌 벤자민 구겐하임도 약자를 우선하는 구명정의 승선 원칙을 지켰다.

2등실 승객 가톨릭 사제 토마스 바일스는 구명정 승선을 거절하고 다른 이들의 구명정 승선을 도왔다. 구명보트를 타지 못한 사람들에게 고해성사를 해주고 갑판 위에서 많은 사람들과 함께 미사를 드리다가 숨을 거두었다고 한다. 또 바이올리니스트 월리스 하틀리와 8명의 악사는 공포에 떠는 승객들을 진정시키기 위해 하선을 포기하고 끝까지 갑판 위에서 연주했다.

현실은 영화 못지않다. 코로나팬데믹이 장기화하고 의료진은 위험을 무릎 쓰고 최일선에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이하 코로나19)과 3년째 사투를 벌이고 있다. 수많은 사람들이 코로나19 확산을 막기 위해 기부에 나섰다. 광주 시민들은 확산 초기 대구의 환자들을 수용하겠다고 선언했다. 세월호 참사 유가족과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들도 대구 의료진과 취약계층을 위해 후원 물품을 보냈다. 모두 평범한 우리 이웃들이다.

독일의 시인이자 작가 베르톨트 브레히트는 <갈릴레이의 생애>에서 “영웅이 없는 나라는 불행하다”는 갈릴레이의 제자에게 갈릴레이의 입을 빌려 이렇게 말한다. “영웅이 없는 나라가 불행한 게 아니라 영웅이 필요한 나라가 불행하다.”

이탈리아의 철학자이자 소설가, 기호학자, 역사학자, 미학자 움베르토 에코는 “영웅이란 보통 사람들이 할 수 없는 것을 하도록 초인적 능력을 이어받은 인물이다. 영웅에게 호소하는 것은 언제나 무능력의 증상을 드러내는 것이며, 영웅이 있다는 믿음은 자신의 게으름에 대한 변명”이라고 말했다.

코로나팬데믹이 숙지고 있지만 아직 끝난 것은 아니다. 언제든 다시 창궐할 수 있다. 안심하기는 이르다. 베르톨트 브레히트와 움베르토 에코의 말은 영웅이 나타나기를 바라거나, 누군가에게 책임을 전가하지 않고 모든 사람들이 선과 정의를 위해 나서면 누구든 영웅이 될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평범한 우리 이웃들처럼.

손선우 전 영남일보 기자